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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117 셋째, 학력을 보면 특히 중심인물인 홍면옥이 한문을 2-3년 정도 공부한 인 물임이 주목된다. 그 외에 인물들은 한문을 좀 공부했거나 한글을 해독할 수 있 거나 문맹인 경우이다. 이들의 한문 공부는 주로 서당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당시 서당은 항일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대한제국관리를 지낸 이 정근은 수원군내 장안면 등 7개 면에 서당을 세우고 학생들에게 항일의식을 고 취하였다. 또한 서당에서 문맹을 퇴치하기 위한 교육활동을 펼치는 한편 동지들 을 규합해 나가면서 일제식민통치는 3년을 넘지 못한다는 말을 유포시키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의 서당은 무단통치하에서는 반일운동의 거점으로서 중 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면서기인 홍준옥과 문상익은 신식공부를 하였다. 문상익은 5년간 한문을 배우고 난후 남양의 사립학교인 보흥학교에서 반년-1년간 배웠다. 그가 다닌 사 립 보흥학교는 1901년 미국인 조원시의 기부금, 매달 6원을 기금으로 삼아 설 립된 학교였다. 그 후 학생들이 늘고 교세가 확장되자 경향 각지의 인사들의 기 부금으로 유지되었다. 특히 보흥학교는 기독교학교로 “폭도를 양성하는 학교” 로 불리워질 정도로 반일적인 학교였다. 21) 다음에 그는 남양 공립보통학교 야학 을 두달 동안 다녔다. 이 학교는 1898년 10월 1일에 당시 남양군 음덕면 남양리 에 있던 원 남양도호부 집사청을 차입하여 남양공립소학교를 개교하였으니 고 종의 교육입국조서 이후 신학제에 의한 이 지역 교육기관의 효시였다. 현 남양 초등학교의 전신인 남양공립소학교의 설립 당시 교원은 박재현 1인이며 아동수 는 35명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이후 1906년 8월 27일 공포된 《보통학교 21) 보흥학교 부교장을 역임한 이창회는 1919년 보안범을 위반하여 금고 4개월에 처해졌으며, 1924년에는 공산당 선전 관계로 징역 3년에 처해졌다고 한다.(조성운 학형 교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