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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113 깃발을 16) , 송산면 중 송리 방면에서도 태 극기를 내세우고 만 세를 고창하며 몰려 왔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노구찌 부장은 자전거를 타 고 남양 방면을 향하 여 도주하기 시작하 였다. 일경은 일단 남양으로 철수하여 수원경찰서에 응원을 청함과 동시에 남양 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소집하여 이를 진압하려는 방책을 세우고자 하였던 것 이다. 사강리 주재소에 들리어 노구찌부장이 자전거를 타고 남양에 돌아갈 준 비를 하고 있을 때 군중들은 빨간모자를 쓴 자를 죽이라고 절규하고 도로를 점 16) 서신면 지역의 만세운동에 대하여는 그 중요성에 비하여 자료들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홍면옥의 신문 시에 그 는 서신면, 송산면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고(21권, 217)하고 있고, 또한 김명제(21권, 220) 그리고 일제측도(21권, 226, 229) 서신면민들의 참여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또한 송산면 상안 1리에 주민들이 세운 만세운동 기념비(1979년 3 월 28일자, 이종수 글, 노경호 씀) 가 남아 있어 그 일단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앞으로 보다 심층적인 분석과 조사가 필요할 듯 하다. 3·1운동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상안리에 거주하던 이원행씨가 주동이 되어 일제에 항거한 서신면은 노도와 같이 들고 일어섰다. 3월 26일부 터 주민이 합세한 이 운동은 3월 28일 새벽 굴고개를 단숨에 넘어 송산면민과 합세, 마침 사강 장날이라 수많은 군중 이 이에 호응, 거센 독립만세소리는 천지를 진동케 했다. 주로 민중의 선두에 나섰던 이원행씨와 전곡리 홍성휴씨 그리고 이재항씨와 송교리 홍대규씨는 더욱 울분에 싸여 일제의 만행에 소리쳐 항거했다. 그 후 일제 왜경과 헌병은 마을을 습격 불을 지리며 전곡리 홍대우지사를 학살하는 등 만행을 자행했다. 이원행씨는 그 후 해외로 망명, 블라디보수톡 , 하얼빈, 상하이 등지에서 조국광복을 위한 독립 운동으로 이국 타향에서 가진 고초 끝에 수년 후 귀국하여 향리에 돌아 오신 뒤 국권회복은 오직 젊은 청소년들에 게 애국정신 고취와 민족교육에 있음을 느끼시고 서신학습강습소에서 후배 양성을 위한 몽학에 전념하시다 조국광 복전에 53세로 돌아가셨다.” 상안 1리 노인들 특히 이용안(1917년생, 이원행의 조카, 상안 1리 거주)의 증언에 따르면 이원행은 양성 이씨로 부농이었고. 보 성전문 학생이었다고 한다. 1984년에 만들어진 『양성이씨 대동보 권3』에 따르면 이원행은 1889-1939년이며 아 버지는 이현진, 형은 이원영이다. 또한 홍성휴는 남양홍씨 대호군파이며, 이재항은 전부이씨이고, 홍대규는 당성 홍 씨라고 한다. 노구찌 순사 처단 현장 검증도(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