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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한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은 송산면과 지리적 인접성과 더불어 인천의 경우 배를 통한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하였다. 수원읍내와 친천, 안산지역의 만세운동 소식은 그곳을 오가는 지역민들을 통하여 입으로 입으로 전해졌을 것임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런 가운데 서울 등 인근지역의 만세소식은 신문을 통하여 확인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송산 면 사강리 지역에 살고 있는 홍면옥 (일명 홍면)6) 역시 매일신보를 통하여 만세소 식을 접하였다. 7) 그는 3월 9일 신문을 통하여 만세소식에 접한 후 조선은 원래 독립국이었으므로 당연히 독립이 되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홍면옥은 당시 35 세의 장년으로 활발한 활동가였던 것 같다. 그는 일찍이 1914년 9월 25일 경성 지방법원에서 횡령죄로 징역을 산적이 있었으며, 1917년에는 인천지청에서 도 박죄로 태형 30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가 어떠한 이유로 도박 및 횡령죄에 처하 여졌는지에 대하여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식민지지배에서 저항적인 인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서당에서 한문을 2-3년 공부한 인물이었으므로 한문을 해독할 수 있는 지식인이었다. 한편 홍면옥의 동생 홍준옥 역시 당시 신문을 보 고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될 때부터 알고 있었다고 한다. 홍면옥은 만세운동을 추진하기로 하였던 것 같다. 그가 일제측의 심문에서 “금년 음력 2월 초순경에 서울의 매일신보를 읽고 조선 각지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는 것을 알았다. 또 그 무렵에 송산면 사무소 게시판에 이러한 좋은 기회에 만 세를 부르는 것은 독립을 구하는 것으로 만세를 부르는 사람은 조선인민이다. 만세를 부르지 않는 마을에는 방화한다는 의미의 광고가 익명으로 붙여져 있는 6) 홍면은 1919년 체포된 후 1920년 징역 15년을 언도받고 12년에 처해진 후 10년을 살다 출옥하였다. 해방이후 건국 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수원시, 『수원 근현대사 증언 자료집』 Ⅰ, 김시중 면담, 2001, 77-78) 또한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하다 월 북하여 1949년경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아들 홍진후 증언) 7) 당시 장안면장이었던 김현묵도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수일 후 <매일신보>를 통해 알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