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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105 재 사강 시장 앞 벌판에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일본인들이 다수 진출하여 토지를 소유하고 농사를 지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 지역은 송산면지역에서 가장 넒은 농토를 가지고 있는 지역이다. 또한 송산면지역의 토지 소유 형태는 1920년 4월 당시 일제에 의하여 탄압 받았던 이재 농가 204호를 소유지 면적 순으로 배열한 <표2-1-1>을 통해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들 중 가장 소유지가 많은 농가는 사강리 옆에 있는 봉가리 안모의 17,945평이었다. 송산면에서는 6천평(30 두락)이상이 10호, 3천평(15두락) 이상이 18호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 이하의 영세농이었다. <표2-2-1> 송산면 罹災 농가 204호의 소유지 면적별 일람표 평 동 20000평 미만 15000평 미만 12000평 미만 6000평 미만 3,000평 미만 1,500평 미만 900평 미만 무소유 봉가 1 3 4 5 6 5 22 삼존 1 2 3 2 3 4 24 사강 3 10 10 3 12 44 육일 1 3 4 4 18 해문 1 1 5 계 2 0 8 18 20 17 26 113 *1 마지기(두락)은 150-300평임. * 「수원군 송산면 지방에 있어서의 소요사건 복명서」, 1919년 4월 25일 참조, 박성수, 『독립운동사연구』, 창작과 비평 사, 1980, 321 재인용. 즉 <표2-2-1>에서 보는 바와 같이 113호에 이르는 50%이상이 토지를 소유 하고 있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 점은 후일 이 지역 농민들이 적극적으로 만세운 동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동학 및 해안 의병의 영향 동학농민전쟁은 1894년 1월 -3월 고부민란 단계, 3월-5월 제1차 동학농민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