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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99 진위(현재의 평택) 오늘날의 평택은 1914년 3월 1일 충청남도 평택군 전부와 경기도 수원군 일부 가 경기도 진위군에 병합되면서 만들어졌다. 이후 1938년 진위군이 평택군으로 개칭되었다. 박은식은 평택과 진위의 집회횟수와 집회인원수를 각각 7회 8백명, 8회 5천명이라 기록했다. 5) 또 이지원의 집계에 따르면, 5회 이상인데, 3월 11일 과 18일, 4월 1일 (2회) , 3일(수개처), 10일 등 한달간에 걸쳐 산발적으로 이어졌다. 당시 진위군에서는 병남·부용·고덕·오성·청북·송탄·서탄·북·현 덕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 먼저 3월 9일 현덕면 각 동리에서는 산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이에 인근 동리에서도 호응하였다. 3월 10일 청북면 토진리 뒷산 오봉산과 마루산 등지에서 만세를 불렀다. 오 성면에서도 평야지대는 물론 산간지대에까지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청북면에 서도 토진리 오봉산과 마루산에 신포 등지의 이민들이 집합하여 독립만세를 불 렀다. 3월 11일 아침 ‘만세를 부르자’는 격문이 평택정거장 앞에 게시되었다. 이 날 오후 5시 평택정거장 앞 사거리에 수천 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군문리 다리를 향해 행진하였다. 이 시위는 병남면 비전리에서 미곡상을 하던 이도상李 道相(30세) 이 주도하였다. 그는 서울 시위 소식을 듣고 시위에 참여하고자 3월 10 일 동생 이덕상에게 집안 일 모두를 맡겼다. 그리고 이튿날 평택면내로 들어가 장날 역전에 모인 군중들을 선도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게 했다. 이에 학생과 군 중들이 일제히 호응하여 큰 시위로 발전하였다. 소방대에서 이를 보고 종을 쳐 서 일본 경찰이 출동하였으며, 주도자 13~14명이 체포되었다. 5) 진위와 평택을 나누어 표기한 것 역시 1914년의 지방행정구역 개편 결과가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