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page

홍순칠공적비 하고 시위군중이 따라 독립만세를 화창(和唱)하여 주재 소, 면사무소, 보통학교(普通學校)와 공자묘(孔子蘭)를 돌며 시위를 펴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이 해 5월 27 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소요로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여 7월 31일 경성복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6월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2년에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그는 거주지역인 와리(표里 : 현 안산시 단원구 와동)의 농민들에게 “조선이 독립하면 국유지는 소작인의 소유가 된다”라며 농민들을 설득하여 참여하도록 하였다‘ 당시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의 중심과제였던 국유지 창출과정에 서 농민들이 제일큰피해자였으며 이에 따라독립이 이루어지면토지분배라고하는 농민적 이해에 기초한 독립국가 건설을 어렴풋이나마 기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얀산시 단원구 와동 체육공원에 유족들이 세운 기념비가 서았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971),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국가보훈 처, 1993), 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경기도, 1995). 윤동욱 尹東旭 1891 ∼ 1968 독립유공자. 본관은 파평 (城平). 자는 경재(敬載). 호는 학은 (聽隱). 안산군 초산면 괴곡리(현 시흥시 산현동)에서 출생했다. 1919년 3월 수암면에 주민들이 모여 독립 만세 운동을 펼칠 때 최선두에 서서 주도하였다. 그는 유익수(柳益秀), 김병권(金秉 權), 홍순칠(洪淳七), 이봉문(李奉文)등과 함께 수암 비석거리 앞에서 2천여명의 군 중을 이꿀고 행진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이 일로 태형 90대를 받았다. 1995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묘는시흥시 산현동골월에 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자료집(국가보훈처, 1971), 시흥군지(시흥군, 1988), 경기도항일독렵 운동사(경기도, 1995). 44 I 언구조사보고서 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