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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로 접어들면서 일본 경찰의 폭압적인 시위 진압이 진행되자 비폭력을 주장하였던 만세 시위도 그 양-"J--을 달리하기 시작하였다. 3일 1,000여 명이 참가한 영등포의 시위에는 본격 적인 일본 경찰의 발포가 있었고, 10일 시흥면에서는 군중들이 모여 연장 집에 불을 지르기 도하였다. 또한 시흥지역의 3 ·1만세운동에서 별도의 시위주도조직이 결성된 흔적은 찾아볼 수 없 다. 시위주도자가 분명히 드러나는 여러 차례의 시위 가운데 주동자들이 사전에 모의하고 시위를 준비하는 경우는 절반 정도이지만 이 경우에도 단발적인 주도 · 모의에 그치는 것이 었고 타 시위주동자 상호간에 연락관계는드러나지 않는다. 이처럼 시위가 연결되지 못하고 단발적인 시위로 끝난 것은 시흥지역에 독립운동단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여겨진 다. 또한시흥에는보통학교 이외에 중등 이상의 학교가 없었고교회냐천도교계통의 종단 조직도활성화되어 있지 않았으므로조직성을띤시위주도는어려웠을젓이다. 만세시위운동의 폭력성도 시흥지역에서 나타나는 특정이다. 예컨대 1919년 4월 4일 시흥 군 군자면 거모리 시위는 집회를 알리는 비밀통문에서는 경찰관주재소와 군자면 사무소 방 화를 시위의 목적으로 명시하였다. 이에따라 영등포에서 무장군인들이 파견되기도 하였고 3월 28일 인근 노옹사리 (현 광명시) 주재소앞 시위에서 시위군중이 돌과 몽둥이로 무장했 던 것을 비롯하여 3월 30일 비석거리 시위에서는 군중틀이 경찰관주재소와 면사무소 방화 를 주장했으나 주도자의 만류로 무산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폭력시위에 일본 경찰은 무자 비한 발포로 대응하였다. 다음으로 시위의 폭력화와 관련된 주동자의 성격이다. 군중이 경찰관주재소와 면사무소에 방화할 것을 요구했는데 주동자 중 일부가 이에 반대하여 설득한 경우는 3월 30일의 수암면 수암리 비렵동 시위였다. 즉 군중이 폭력시위를 주장하는데 군중의 선두에 섰던 유익수가 “독렵이 되면 관공서는 국가의 재산이 된다”는 논리로 시위대를 설득하고 있다. 이와 반대 의 경우도 있었다. 4월 4일 군자연 거모리 시위에서는 주동자가 비밀통문을 띄울 때부터 경 찰관주재소 및 면사무소 습격을 시위의 목표로 제시하였다. 단발적인 시위에 그쳤으면서도 주동자들의 사전 준비가 철저하게 진행된 시위가 대부분이었다는 점 또한 지적되어야 할 것 이다. 시위의 사전준비를 위해 사용된 통문과 격문, 통고 등은 시위의 계획을 알려는 효과적 인 전달수단이었다. 시위를 주도할 별도의 조직체가 구성되어 있지 않은 단계에서 이와 같 이 사전통고를 할 수 있는 것은 주민 간 두터운 연대감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인데, 만세시위 가횡적 연대 없이 마을(里) 단위로추진된사정과도관련이 있다. 이는또한시흥지역에서 공공연하게 시위계획을 알릴 수 있을정도로독립에 대한 열망이 주민들사이에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음을말해주는 것이다. 안산 3 · 1운동에서 나타나는 운동 양상의 일반적 특정은 각계 각층의 민중들이 그 위치와 | 안산지억의 독립끊동 I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