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page

대부삼일운동기념비 (5) 안산지역 삼일운동의 성격 (里民) 10여 명과 함께 그 곳의 주막 권도일(權道 一) 집 앞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면서 조선독립만세를 같이 불렀 다. 이 시위의 주모자들은 징역 10월의 옥고를 치렀다. 오늘날 안산지역에 속한 구 시흥군과 수원군은 서울과 같은 생활권에 속하였던 지역 즉, 오늘날서울특별시에 편입된 지역에서는서울시내의 시위와거의 보조를맞추어 초기에 학 생들의 시위와상인들의 철시에 이어 주민들의 만세시위가동시다발적으로진행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시위 행렬이 약화되었는데 이는 서울 지역의 소요에 당황한 일본 경찰이 정보 수집을 철저히 하고 군청과의 연락을 긴밀히 하여 군중이 모이려 하면 항상 기 션을제압하여 경찰과군대를급파하여 집회를저지하였기 때문이다.농촌지역으로파급되 면서 나타나는 특정은 시위 참여에 동리 이장이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것이다. 수암면 비 석거리 시위나 군자면 거모리 시위의 경우에 보이듯 각 동리의 구장(이장)은 30∼40명씩의 동리 주민을 직접 인솔하거나 통문을 돌려 주민을 모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당시의 향촌 사회가 전통적인 면리제의 전통 하에 일정한 지식과 소양을 갖춘 이장이 말단 실무를 관장하며 마을의 여론을조절하는 역할을하였기 때문이다. 이장들은동리 유석자나청년들 과 협의하고 시위운동 계획을 동리 주민에게 알리거나 격문을 붙여 주민의 참여를 유도하였 다. 따라서 통일적인 지도 핵심이 없이도 각 동리마다 자연발생적£로 시위운동이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시위가 진행될수록 주체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는 농민들의 의식구조를 보면 수암면 비석거리 시위의 주동자의 한 사람인 홍순철은 “조선이 독립하면 국유지는 소 작인의 소유가 된다”라며 농민들을 설득하여 참여시키고 있다. 농민들은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의 중심과제였던 국유지 창출과정에서 제일 큰 피해자였으며 이에 따라 소작농으로 전 락한 열악한 처지에 대한 반발이 매우 컸읍을 말하여 준다. 이들은 독립이 이루어지연 토지 분배라고하는농민적 이해에기초한독립국가건설을어렴풋이나마기대하고있음을알수 있다. 또한 영세 상인들도 시위에 동조하는 뜻으로 일제히 철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부 행 상들은 다른 지역의 만세시위 소식을 전달해 주는 전달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웅 3 | 연구조사보고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