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page

한 뒤 이날 밤 시위 참여에 소극적이었던 구장 집에 다른 주민들과 같이 몰려가 항의하기도 하였다. 위에서 살펴볼 때 운동을 주도해 간 농민들은 대개 구래의 유교나 애국계몽운동의 세례를 받은 향촌사회내의 지식인 부류였다. 재판기록에는 농엽으로 표시되고, 유생들은 따로 표시 하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대개 그들이 농업을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업종사 자로 표시된 자들의 대부분은 어느 정도의 유교적 소양을 가진 계층들로 볼 수 았다. 이들은 1910년대 서당교육이나 교육계몽운동의 혜택을 받은 자들로 보인다. 이들은 비록 조직화되 어 있지 못했지만 일정 정도의 지식과 소양을 갖춘 호t촌사회의 지식층이었다고 보인다. 한 편 농촌에서는 운동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이장(里長)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들은 운 동에 적극 참여하여 마을의 동리민들을 동원하고 이를 위한 사전 연락을 하는데 중요한 역 할을하였다 이장들은 조선 각지의 시위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자기 동리에서도 동리민들을 규합하여 면사무소 앞에서 시위운동을 하기도 하고, 마을 단위의 운동을 촉발하였다. 이장은 전통적 으로면리제(面里制)의 전통하에서 마을단위 공동행동의 대표자로서 말단실무를관장하 거나 마을의 여론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2) 군자연(君子面) 지역의 시위 군자면사무소터 군자독립만세기념비 63) 團史編앓委員會, 1968, r~\ll~H웹立週회j史」2,263쪽 :AJ-곡리 ( 長갑里) 주민들이 3 월 29일 만세시위를 벌인데 63) 이어, 4월 4일 오전 11시 경 주재소부근에 약 1,000여 명이 집합하였다. 이미 3일 “거모경찰관주재소 및 군자 면사무소를 불질러 부줘버리 자”라는격문이 각동리에 배 포되었으며 이 첩지(貼紙)가 하루 전에 일본경찰에게 발 견되어 영등포로부터 순사 6 | 안산지억의 독럼끊륭 I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