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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이 각리 (各里)의 인원을 조사하고 또한 만세를 부르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읍내로 부터 가서 만세를 부르라”고 격려하였고, 군중들도 읍내로 가려고 애쓰고 있었으므로 유익수도 태극기를 휘두르며 군중을 지휘하여 읍내로 가서 수암면 읍내에 있는 수암경찰관주재소 · 수암면사무소 · 안산보통학교 및 공자묘(孔子願 : 안산향교) 앞으로 행진하였다. 와리(효里)에 사는 홍순칠(洪淳七)은 3월 30일 유익렬(柳益烈)의 하인 임학신(林學信)에 게서 “그날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니 수암리 비석거리로 모이라”는 취지의 통지를 받고서 동 리 허치선(許致善) 집에 모여 그 집에서 30언을 인솔하고서 수암면 남쪽 밭까지 인솔하여 갔다. 그 곳에는 이미 1천 2, 3백 명이 모여 있었고, 이곳에서 와리지역의 대지주였던 홍순 칠은 후일 불참자를 문책하기 위해 참석인원을 조사하였다. 이때 유익수가 션두에 서서 읍 내쪽으로 가니 군중도 눈사태가 난 듯이 행진하므로 홍순칠도 군중을 따라서 수암면 읍내에 있는 수암경찰관주재소 · 수암면사무소 · 얀산보통학교 및 공자묘(孔子!朝 : 안산향교) 앞으 로 가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재판정에서 홍순칠은 “나는 원래 조선독립을 희망하는 사 람인데 독럽을 기도하려면 많은 사람이 모여서 시위운동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29 일 국유지 소작인 수 명에게 대하여 그 날 각라(各里)에 돌린 격문 내용을 알리고 “조선이 독렵하면국유지는소작인의 소유지가되니 이 때 만세를부르는것이 득책이다”고권고하 여 소작언을 격려하였다. 산현랴의 윤동욱(尹東旭)은 볼 일이 있어서 수암면 화정리에 갔다가 능곡리 농민으로부터 “비렵동에서 만세를 부른다”는 것을 듣고 자신이 만세를 부르면 조선독립에 도움이 될 것이 라 판단하고 비석거리로 갔다. 그곳에는 약 1천 명 정도의 군중이 모여 있었다. 그 때 순사가 “해산하라! 그러지 않고 읍내로 갈 때는 발포할 지도 모른다”고 하였으므로 모인 군중들이 한때 분규를 일으켰으나, 결국 모두가 읍내 쪽으호 진출하고 있었다. 이에 윤동욱은 선두에 서서 군중의 기세를 돋구면서 읍내의 주재소 · 보통학교 · 면사무소 등의 앞에 이르러 대한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는 공렵보통학교 앞에서 순사 임건호(任健鎬)에게 “당신도 조선언이 니 만세를 부르라”고 권하였다. 관리가 만세를 부르면 시위운동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독립 운동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하고 순사에게 “만세를 부르라”고 강 요하였으나 순사는불응하였다. 화정리의 김병권(金秉權)은 3월 30일 화정리에 이민 30명 가량이 모여 있어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만세를 부르기 위하여 비럽동으로 간다”고 하여, 그들과 함께 비석거리로 갔더 니, 약 1천명 정도 모여 있었다. 위 군중 속에 순사의 해산명령에 불복하고 태극기를 떠받들 고 선두에서 행진하는 X까 있어서 이들과 같이 읍내로 행진하여 주재소 · 보통학교 · 연사 무소 · 공자묘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였다. 수암라(秀岩里)의 이봉문(李奉文)은 자기 마을 앞에서 진행된 만세시위에 솔선하여 참여 34 I 언구조사보고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