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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에서 현실적으로 이장의 역할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3월 하순 이후 경기도 지방 의 운동이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하고 급속히 확산되었던 것은 이와 같이 운동아 리(里) 단 위로 조직화되고, 이에 이징L들이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통 일적인지도부없이운동이각동리마다자연발생적으로전개된지빙댄동의원동력이되었다. 경기도는 경성부를 둘러싸고 있는 외곽지대라는 경제적 입지와 개항장인 인천과 고양군 · 시흥군 · 수원군 · 개성군 등의 상공엽 발달 등으로 인해 그 주민 구성에 있었서 중소 상인이 나 자영업자, 노동자 등이 상당수에 달하였다. 이와 같이 경기도 지방의 3 · 1운동은 민족대 표와의 연계가미약한상태에서 각계 각층의 경기도민의 참여로주도되었고, 이러한과정에 서 경기도지방 3 · 1운동은경기도내 전역의 항일독립운동으로확산되었다. 저14절 안산지역의 삼일 만셰 시위 일제강점기에 안산지역 중 군자지역과 수암지역이 속해있던 시흥군은 경기도 가운데에서 도 서울과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일쩍부터 시위가 시작되었다. 3월 7일 시흥군 영등포에서 보통학교 학생이 만세시위 후 동맹휴학을 결의한 이래 4월 말까지 20여 회에 걸 쳐 연인원 1만여 명의 참여 아래 전개되어 경기도내에서 가장 많은 시위 횟수를 기록하였 다. 물론시흥군의경우도처음에는청년학생이시위를주도해나갔으나점차농촌지역으 로 파급되면서 농민이 그 주역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이곳의 시위 주동자들도 어떤 특정한 지도 사상이나 정치결사체에 의하여 체계적으로 지도된 운동이 아니고 각 계층의 민중이 스 스로의 사상과 투쟁 방법을 통하여 일으킨 만세운동이었다. (1) 수암면(秀岩面) 비석거리 시위 수암면에는 1919년 3월 30일 오전 10시 구안산치소(舊安山治所)로 면사무소와 경찰주재 소, 보통학교, 향교 등이 집중되어 있는 비석거리 [牌立洞] 에 18개 리에서 2,000여 명의 군 중이 모였다. 1916년 현재 수암면의 인구는 1 592호 8 120명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가운 데 남자가 4,112명이었다.61) 남자인구 가운데 노인과 아동들을 제외한다면 2,000여명의 군 61) 林虎滅, r뱀險5年 安111의 후業生챔팩』 (東京敎띔00究會, 1932) 9쪽 [얀산향토사연구소 영인본, 2001] 32 I 언구조사보고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