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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3 · 1독립운동의 도화션에 불을 지른 것은 활동이 자유로운 국외 지도자들이었다. 마주의 경우 이승만 • 안창호 • 정한경 등을 중심으로 대한인국민회 · 흥사단 등이 조직되어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있던 중, 1918년 1월에 민족자결론이 발표되자 정한경은 미국 각 신문 에 이를 환영하는 글을 연재하였고, 국민회를 세계약소국동맹에 가엽시키고 자신이 직접 파 리 강화회의에 참석하여 한국독립을 호소하려고 여권절차를 밟고 있었다(1918. 12월 초). 또 이승만 • 안창호도 대한인국민회총회 명의로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독럽을 청원하 는 건의서를 보냈으며, 샌프란시스코 거주 교포들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여 이승 만 · 정한경 · 민찬호 등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하려고 했다. 이같은 움직임을 미리 탐지한 일본이 이를 방해함으로써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서재펄이 그 자금으로 영문잡지를 간 행하여 한국독립을 세계에 호소하였다. 중국에 망명하고 있던 민족지도자들도 상해에서 발 간된 영자신문을 통하여 민족자결론과 파리 강화회의 개최에 관한 사실을 알고 신한청년당 에서 검규식을 1919년 2월 1일에 한민족 대표로 파리에 파견하는 한편 장덕수를 일본에, 여 운형을 노령에, 션우헥 · 검철 · 서병호 • 김순애를 국내에 각각 파견하여 각계 지도층 인사 들과 접촉, 거족적 운동을 계획케 하였다. 독립의 기회를 기다리며 가장 뜨거운 독립운동을 추진하던 만주 일대의 독립운동가들은 1919년 1월 이전에, 국내외의 유명한 민족지도자 39인이 망라된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함으 로써 일본과의 최후의 혈전까지 다짐하였다. 또 노령에서는 이동휘 · 원세훈 등이 수십 만의 거류 동포를 규합하여 국민회의를 조직하여 독립 쟁취를 위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국외 독립운동 추진 중 국내 3· 1운동 거사에 가장 강한 충격을 준 것은 일본에서의 2· 8 독렵선 언이다. 세계 정세변화에 민감했던 재일 유학생들은 『재팬 애드버타이저』지를 통해 재미 동 포들의 독립운동 활동상을 알게 되었다. 이에 크게 자극되어 조국의 독렵문제를 비멀리에 토의하고, 1919년 1월 6일에 조선유학생학우회 주최 웅변대회에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 른 한국독립을 일본내각과 각국의 대사 · 공사에게 청원할 것을 결의하고 실행위원으로 최 팔용 · 송계백 · 전영택 · 서춘 · 검도연 · 백관수 · 윤창석 · 아종근 · 김상덕 · 최근우 등 10 명을 선출하였다. 그뒤 전영택이 사임하고 이광수 • 김철수를 추가하였다. 실행위원들은 일 본 경찰의 눈을 피해가면서 비밀회합을 거듭하여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일본내의 요 로와 각국 대사 • 공사 • 조선총독 및 일본 언론기관에 보낼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 · 독립선 언서 · 결의문을국문 · 일문 · 영문으로작성하였다. 준비 과정에서 실행위원들은 최팔용 · 나용균으로 하여금 자금을 모집하게 하고 백관수 · 아광수에게는 선언서를 기초하게 하였다. 또 송계백과 최근우를 국내에 파견하여 최련 · 송 진우 · 최남선 · 현상윤응을만나독립 포착의 절호의 기회임을 알려 준비케 하고운동자금 을 모금해 오게 하였다. 당시 여자유학생들은 여자친목회를중심으로자금을모금해 주었다. | 안산지역의 독립끊동 I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