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page

2) 대부도 주변의 ‘수적 (水械)’ 항쟁 안산 지방에서는 해안 지역, 특히 대부도를 중심으로 한 섬 지역에서 지리적인 특수성을 이용하여 이른바 ‘수적(水戰)’이라칭하는의병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 지역이 활동거점 이 된 것은 서울과 가까울 뿐만 아니라 남부 지방에서 생산된 쌀이 올라오는 길목이기도 하 였고, 인천향을통하여 각종물자들이 일본으로빠져냐가는길목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항일 투쟁의 좋은조건을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08년 3월부터 경기 각 지 역 에서 의병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는 가운데 수원군에서 남양군 을 잇는 경기도 남서부 해안지대를 중심으로 ‘수적’의 항일항쟁이 계속되었다. 수적은 1900년 무렵 중부 이남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활빈당 투쟁 과정에서 나타났던 민중항 쟁의 한 양상이었다.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은 인천 앞바다인 영종도와 남양만 앞바 다에 있는 대부도 · 영흥도를 근거지로 섬들을 옮겨다니거나 때로는 해안에 상륙하여 토별 대와 항쟁하기도 하였다. 신경춘(申敬春)은 1907년 9윌 10여 명의 부하를 이꿀고 남양군 연얀 화령도(華靈島)와 대 부도(大뿔島)에서 활동하였다. 1907년 10월 11일 남양군에서 무기를 휴대한 의병이 수원 방면의 초장면(草長面)을 습격하여 우편취급소를 공격하였고 1908년 1월 4일과 8일 이틀 동안 의병 15명이 우편물을 운반하던 우편체송인을 공격하였다. 일제의 민중 수탈가구의 하나인 우편취급소가의병들의 집중공격 대상이 되는가운데 2월 21일 남양군음덕리(陰 德里)를 습격한 의병 6명은 남양수비대에서 파견한 토벌대 7명과 교전하여 1명이 사살되고 1명이 생포되는 피해를 엽고 물러났다. 영종도 · 용류도(흉합값島) · 무의도(無衣島) 등의 각 섬에는수적 70여 명이 두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왕래하면서 지나가는상선들을수색, 일본 으로 마독이 유출되는 것과 지주들의 도조(體租) 수송을 저지하였다. 의병과 수적의 활동이 강화되자 일제는 남양군과 수원군 남부 해안에 출몰하는 수적이 대 부도(大후島) 등을 근거로 하는 것 같다고 파악하고, 대부도와 영흥도(靈興島) · 풍도(뼈島) 를중심으로의명을정찰하고그근거지를토별할목적으로 3월 16일부터 19일까지 토별전 을 벌였다. 일제는 제9중대, 제12중대로 토별대를 편성하여, 수원 수비대장 시모무라(下村) 대대장이 장교 이하 33명을 인솔하여 3월 17일 대부도 · 영흥도 · 풍도를 수색하기 시작하 였다. 그러나 토별대는 “경기도의 남부 연해 지방을 약탈하는 폭도의 근거지라는 소문이 있 었으나 수색한 결과 때때로 소수의 폭도가 통과한 바 있는 외에 하등 근거지로 인정될만한 형적” 을 발견하지 못하여 별다른 성과없이 19일 되돌아갔다. 5월에 들어서도 수적은 더욱 활발하게 움직였다. 6일 남양군 영흥도에 수적 수십 명이 들 이닥쳐 각 면징l을 불러모아 군수전 5천 냥을 마련하라고 명령하고는 다른 곳으로 출발하였 I 안산지역의 독립끊흉 I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