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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록 하였다_s> 얀산에 파견된 일본순사는 시바누마(효핍一則)와 야자와(失況各三郞)두명 으로 이들의 보고서에 의하면 안산지역에서는 “주민들이 안산관아(安山官衛)를 습격하고, 관리 (官更)들의 주택 8채를 공격하여 파괴시키는 등 소란을 일으켰다”한다. 이를 제지하는 과정에서 순검들이 부상당하였고 또한 안산군수 안욱상(安볼相)은 이미 도주해 버린 뒤였 기 때문에 모였던 군중은 얀산관아에서 조금 떨어진 산대(山뽑)장터 (지금의 션부동 서얀산 인터체인지 근처)에 모여 여러 가지 일들을 논의하다가 24일 인천관찰사에게 여러 가지 일 들을 청원할 것을 결의하고 일단 해산하였다 한다.6) 이로보아 산대장터에서 커다란 집회가 이루어졌고여기에서 많은의견들이 오간것으로보인다.따라서 이때 안산지역에서도만만 공동회, 또는 오늘날의 춧불집회 같은자유토론회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당시 의명은 갑오개혁, 을마사변, 단발령에 반대하여 있어났고 따라 서 의병 봉기는 ‘위정척사(衛正투冊)의 주자학적 문화 이념 및 갑오(甲午) · 을미(ζ未)개 혁에 반대한복고주의 정치 이념’ 에 근거한것이다.정부는혼란한시국을수습하기 위해 친 일내각의 요인들을 ‘역당(遠黨)’ 또는 ‘국적(國戰)’으로 단죄하고 단발령을 철폐동}는 한편, 의병해산을 권고하는 조칙을 내렸다. 이와 더불어 갑오년 이래의 경제파탄과 민생고의 극심 함을 고려하여 그동안 적체된 각종 미수 · 미납의 공세(員鏡)를 일체 탕감한다는 조처도 취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처들은 의병 봉기의 대의명분을 없애버렸으며 그들을 해산시키기 에 적합한 것이었다. 그 결과 1896년 3월 이후 의병활동은 점차 쇠퇴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회유정책을 거부한 유인석과 민용호 부대는 만주지방으로 아동하였다. 이시기의 의병은 비 록 ‘근왕창의’라는왕조중심적이며 위정척사론적인사상적 한계성을탈피하지는못하였으 나, 청일전쟁 중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일본에 대항하여 싸운 동학농민전쟁에 뒤이어 본격적 인항일의병이라는점에서 의의를갖는다. (2) 얀산지역의 지식인과 학교의 셜렵 계몽운동 1905년 일제의 강제적 인 을사조약 체결로 국권회복운동이 전개되 었다. 여기에는 각계 각 5) 安山地方暴짧/情況{貞察/짧/ 去/ν二十二日當館크 ') 찌좋二名 ?派ν=十四 日歸館復命:Alν所二 크 ν/、同地方/暴徒/、官 휩 · 官f{;7破행;,,,狼藉켜필/ %/νt本月二十四日 ?期ν仁川府觀蔡使二何事?져請願:Alν/議?決;,,,-先退散;.-11-1ν由二 T B下異狀十;,,, I- ‘--------‘----- .••• XtJll附近及E安山附近/人民中斷髮令二服-C"t ') ν者且갖?期νtJll/附近/地;大集 會?짧ν大二國事?議H二JI!府觀察使;請願:Alν企77 1J 「X京{=間郵便護衛兵/言二크 ν/、九뼈山附近二f夜間時셔뼈聲 ?間7 그 I- 7 'J F추去g下當港人心/、至f平穩-j-;i,/ 2 -t-77..昨今/、地方B IJ웠物船/入律'£:7') 旁商況;E稍@俠復/%? 現/、;,,,짖/ν껴~OY [京幾道安山의 義兵情況報告] (문서번호電受第一二五號, 발송얼 明治二十九年二月二十九日 午前九時 며十五分) 6) 「朝蘇固京城事쫓後二於"TiνtJll港情況;開ν在同港領事짧事務代理값原守-크 ')報告/件」 (日本國立公文書館 所藏, 明 治29年3月18日, 公文*擁 明治二十九年 • 第十卷). 10 I 연구조사보고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