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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령이 공포된 후 ‘이천수창의소’의 성럽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의병진이 조직되는 과정 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김하락(金河洛) · 조성학(趙性學) · 구연영(具然英) • 김태 원(金泰元) · 신용희(申龍熙) 등인데 이들은 거의( 累義)에 나서기 이전 모두 서울에 머물러 있었다‘ 이들은 단발령 소식을 듣고 다음날 12월 31일 이천으로 이동하여 의병 활동에 착수 하였다- 김하락 일행은 이천에 도착하자 우선 방춘식을 방문하여 의병 활동에 대한 협조를 부탁하 였고, 방춘식은 이들의 요청에 적극 협조하였다. 이천에서 병사 를 모으는데 있어 방춘식의 역할은 절대적이 었다. 방춘식은 포군 100여 명을 선발하여 지원하였고, 김하락을 위시한 다 섯 사람은 이들을 분담, 인솔하여 의병 모집에 착수하였다. 구연영은 양근(楊根) · 지평 (1'1£ 平)으로, 조성학은 광주( 廣州)로, 김태원은 안성( 安城)으로, 신용희는 음죽(陰竹)으로 각각 출발하였고, 김하락은 이현( 첼l뼈)에 남아 총지휘관의 역할을 담담하였다. 이천 지역 관포군 들의 지원에 힘엽어 의병 모집은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구연영은 양근 • 지평에서 300여 명 을, 조성학은 광주산성의 별패진 포군 300여 명을, 신용회는 음죽 · 죽산(竹山)에서 화포군 300여 명을 모집해 왔고, 검태원은 얀성에 듬어가 이미 거의( 짧義)해 있던 민승천(閔承天) 과 합세하기로 약속하였다. 김하락 일행은 의병 모집에 나서자 곧 900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 외에도 이천에서의 의병봉기 소식이 인근에 전해지자 상당한 거리에 있던 안산(安山)지역 의 백성은 물론 용인(龍仁) · 얀성 · 시흥(始興) · 수원(水 原) 등지에서 자발적으로 호응해 이천으로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천수창의소’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는데, 이천수 창의소는 조직구성원으로 볼 때 경기도 연합의병진의 성격을 갖고있다. 이 무렵 이미 광주 의병장 심진원(심영택), 이천 의병장 박주영, 양근 의병장 이석용은 각각 포군 등 1,6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한산성을 점령하고 있었다. 이들은 남한산성이 관군에게 포위되어 위급한 상황에 몰리자, 이천수창의소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천 의병들은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2월 28일 남한산성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1896년 3월 22일 남한산성의 갑작스런 함락으로 모든 계획은 중단되고 말았다. 남한산성이 무너진 데는 식량공급 차단으로 인한 식량부족과 그로 인한 병사들의 동요, 의병장들 간의 대럽과 일부 의병장의 관군과의 결탁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1896년 2월 개항장이었던 인천을 중심으로 안산, 과천, 수원 등지에서도 4천 여명의 항의 시위가 있었다.4) 이 소식에 접한 일본공사관에서는 안산지역의 정세를 조사보 4) 事變E 없 E附近/、別二꺼짧/模樣十iJ '} :,.깨-nt十八日當港?去/ν그 f七里크 '}十 二里以內/地十!V/i:山 · 果JI!· 水原 等 /地二f暴徒四千餘名擬료:,.官倚?破壞ν勞t펌縣十 '} I- /報當앞理뿔;達ν· IJm留民/、安意햄業:,.居ν |、 그E事件/鳥/ F 陰歷正月二當lν二依 ljfllj況一般二휩*不振十 lj [京짧道 安山 果}|| , 水原 등지의 짧兵 峰起報告] 電受第-0八號 발송 자tJll 森原領事館휩務代뭔ll (ll져治二-1- Jt..年二月二十二日 午前九時五五分) | 안산지억의 독립끊풍 I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