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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一獨立運動殉國志士추모비(삼일독립운동순국지사추모비). 과거 탐방시의 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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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경술(1910년)국치로 일제에게 강점되고 국권은 침탈을 당하니 이에 항거하여 의병과 열사들이 일어나 구국운동에 나섰다. 이에 일제는 무단정치로 탄압하고 가혹한 식민지지배정책으로 수탈을 일삼으며 온갖 박해를 가하니 수난과 인고의 10년세월이였노라. 때에 미국 윌슨대통령이 민족가결주의를 부르짖으매 마침내 우리민족의 분노도 터져 기미(1919년) 3월 1일 자주독립을 만방에 선언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으니 함성은 천지를 진동하며 방방곡곡에 파급되고 거족적인 민족독립운동으로 승화하여 요원의 불길처럼 전개되어갔도다. 수원(화성)지방에서도 격렬하게 시위를 전개하여 기세를 떨쳤으며 이 고장은 3월 31일 발안장에서의 시위를 시발로 때를 같이하여 4월 2일 우정 장안면의 민중이 봉기하여 쌍봉산 산정에서 봉화를 올리고 노도와 같이 연일 시위를 전개하니 일제는 이를 제압하며 보복의 총검을 휘둘러 지방의 지도적인 세력과 유지를 제거 말살하려고 혈안이되어 4월 6일부터 검거를 시작으로 삼괴지방을 휩쓸며 방화와 양민을 살상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나니라. 4월 13일 일제는 육군보병제20사단소속 병력을 급파하여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발안장의 수배를 맡아 주둔하였고 오후에 발안주재소장 사사카(佐板)이 헌벙 10여명을 이끌고 연방(然昉)공을 제거 말살코자 엄습하여 태원(泰元)공이 연방공의 앞을 가로막고 엄호하니 총을 난사하여 살해하고 또한 연방공을 살해한 후에 아흔아홉간 종가에 방화하니 화염은 3일 주야 충천하였고 가보와 문헌은 소진되였나니 통탄을 금할수 없노라. 이는 우정 장안면사무소와 화수리 주재소 파괴, 방화, 시위가 있은지 10일후요 제암리 교회방화와 학살사건 2일전에 희생된 참상이니라. 연방(자 중랑)송은 해풍김씨 24세손이며 조선조 초기부터 삼괴지역에서 세거한 호반의 후예이고 쌍도파 18세종손으로 지덕을 겸비한 장신의 후손으로 약관에 출임하여 시종원시어에 이르렀고 망국의 통한을 품고 관직에서 물러나 항시우국지심이 불타고 국권회복의 일념으로 선도적인 위치에서 민족의 자주와 자존심을 드높이었을뿐만 아니라 지방 민중을 계도하고 중인의 추앙을 받았으니 향년이 39요 태원(자 재근)공은 해풍김씨 22세손이며 문시파 13세손으로 일찍이 쌍도파종가의 집사로 항상 연방공과 거동을 같이 하였으니 향년이 58이니라. 순국지사들이 구국운동의 지도세력과 유지로서 무참하게 희생될지 74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명리를 밝히고 기록을 남기지 못하였으니 실로 면목이 없노라. 광복의 그날도 어언 반세기 만시지탄 이나마 이제 지난날 순국하신 두분을 비롯한 제영령들의 숭고한 뜻과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넋을 위로하고자 해풍김문에서 정성을 모아 비를 세워 추모하고 기념하나니 영령들이시여 명복지중에 고이 잠드소서. 여기 당시 삼괴지역에서 피해참상을 남기나니 일제의 수비서류 제745호(1919년 4월 23일부) 조선헌병사령관 조선총독부 경무총장 兒鴨惚次郞의 보고서에 우정면 8개부락에서 가옥소실 35호, 사망 7명, 부상 1명, 재판회부 11명(화산리 소실1호, 사망 2명), 장안면 6개부락에서 가옥 소실 50호, 사망 6명, 부상 5명, 재판회부 19명으로 기록되어 있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