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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 의암손병희 :· 집에 모여 있는 제암리 ·고주리 교인들과 함께 남양교구로 나。F 가 시일식을 보았 습니다 이 곳에서는 남양교구가 멀리 있기 때문에 평상시는 전교실에 모여 시일 식을 거행하지만 월말은 전체교인이 교구에 모여 시일식을 보았습니다. 백낙렬 은 남양교구 금융원의 직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교인들에게서 받은 성미를 모 아 고주리 김흥렬과 함께 서울의 천도교중앙총부로 올려 보냈습니다. 이렇게 노력한 결과 남양교구 교인들의 신앙심은 물론 교세가 더욱 확장되어 1909년 8월과 1911년에는 전국의 천도교 교구 중 성미 실적이 제일 우수하여 중 앙총부로부터 1등 표창을 받았고, 1912년에는 수원과 함께 1, 2 등 표창을 받았습 니다. 그리고 1918년 손병희가 종령 (宗令)을 선포하여 천도교 중앙 대교당 건축 비를 모으라고 지시했을 때도 남양교구의 백낙렬과 교인들은 특별성미의 명목으 로 많은 전답과 기옥을 팔아서 중앙총부에 헌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