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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낼훼l 우리 꽤랩은민됐신oJ 혈한| 우리 고장 화성은 민족정신이 투철한 곳입니다. 우리 조상들은r 외세의 침략 에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으시고 항쟁하셨습니다. 예로부터 화성시의 중심지역은 남양이었습니다. 이 곳은 고려 충선왕 2년(1310년)부터 남OJ-부로 편제된 뒤 남양 으로 불렸습니다 또한 조선시대 세명의 정승(김상로, 정태화, 이정구)을 배출하 였다하여 ‘삼괴지역’이라고도 불리어 왔습니다. 지리적으로는 경기또 서남단에 위 치한 한반모의 또 다른 반도이며 문화수준과 교육열이 월퉁히 높은 곳입니다. 마 을마다 서당이 있어 책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초가가 옹기좁기 모여 있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평화스러운 고장이었습니다. 서해바다를 끼고 있는 우리 고장은 6개의 포구가 있어 어업이 발달하여 선박들 이 남양만을 통해 드나들며 물물교환이 활발했던 곳이었습니다. 또한 바닷바람 을 맞이하「는 넓은 평야가 많아 농업의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염전이 넓게 분포하여 전국에서도 소금의 생산지로 매우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살기 좋은 우리 고장은 역사 속에 외세의 침략도 많이 받았던 곳입니다. 조 선시대 임진왜란 전후에는 왜구가 남양만을 통하여 노략질을 심하게 했고, 청일 전쟁이 발생했을 때는 청나라 군과 일본군의 각축장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잦은 침략 속에 일제강점기에는 많은 피해를 입었고 전통적으로 어느 지역보다 항일 정신이 강했던 곳이었습니다. 남양 대부도 영흥도 풍도를 안고 있는데 그 인 근에는 한말 수적활동과 활빈당의 근거지가 있었으며 의병 활동이 활발하게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