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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조이고 정조조의 참판공 휘 언현공이 5대조이다. 고의 조부인 휘 익환공이 은진현감으로 재직하다가 퇴직함으로서 그 자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공은 유시에 총명이 과인하고 기상이 활달민첩하여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청년기인 25세에 국권이 일제에 강점당하니 울분의 세월이었다. 공은 의협심이 강하고 정의로워 부정한 행위는 용납하지 않고 절차탁마로 시정을 관철하였다. 공의 취처는 세종대왕의 제4남인 임영대군의 후예인 논산지방의 대학자 강헌 전주후인 사희공의 장녀와 연 20에 혼인하였다. 혼인 후에는 공과 친우들이 강헌선생의 문하에서 사서, 삼경을 공부하였다. 각설하고! 공의 증언에 의하면 1919년 3월 1일은 공의 연령이 34세로 사회활동이 가장 활발한 시기로써 3.1독립운동이 전국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가자 공도 동리의 이근석 공을 위시하여 선후배 지인들과 뜻을 모아 논산시장일에 궐기하기로 결의하고 태극기를 한지에 그리고 여러 물품을 준비하여 3월 중순 이후 5일 시장 새벽 인시(오전 4시)에 옆집에서 옆집으로 연락하여 공회당에 모여 간단한 점검 후에 우기소로길로 토끼재, 남산리, 등화동을 경유하여 논산 우시장에 여러 지역의 부락민과 합세하여 진시(오전 9시)부터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불렀다. 논산지역은 4구역에서 실시하였다. 일경이 승마하고 달려오는 소리가 나면 잠시 피했다가 사라지면 또 부르고 불렀다. 해가 서산에 기울어지면 각자 흩어져 어둠이 짙은 저녁에 귀가하였다. 나는 큰 애국자에는 미치지 못하나 주무격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가지 기이한 일은 소생이 1969년에 파월하여 근무시에 70년 6월 어느날 숙소에서 중식 후에 잠깐 졸고 있었는데 통영갓을 쓰시고 현몽하기를 웬 낮잠이냐고 꾸중하시면서 소생의 목언저리를 잡고 일으키어 그 힘에 의거 벌떡 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