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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4월30일 화요일 12 (제148호) 기획 <지난호에이어>다 음은 1920년 9월 25일 자 <매일신보>의 “손 병희 외 47인 공소불 수리 사건 제4일의 공 소공판 22일 오전 중 공판계속속기박동완 신문 자존자립(自存 自立)의 정신(精神)” 기사중일부이다. 문: 합병에 대한 반 대와 독립에 대한 감 상을물으매 답: 피고는 대답하되 오늘날 조선민족은 자존 (自存)자립(自立)의 정신이 있고 조선독립에 대 하여 시기만 기다리고 십 년 사이를 경과하여 온 결과로이와같이된것이니다시말할것없지요. 문: 그러면 양방이 모두 절대로 반대요 절대로 희망이란말이지? 답:그렇소. 박동완은조선민족에게자존자립(自存自立)의정 신이 있기에 조선민족은 독립할 수 있는데 십 년이란 세월이흐른것에대하여안타까움을강하게드러내 고 있다.즉 일제에 의한 조선의 망국 자체를 인정할 수없다는말이다.독립을선언함으로자주민이되었 다고당당하게표현하고있다.독립은일제의허락을 받아야할것이아니라조선민족이선언하면되는것 이라고분명히말하고있다.세계각국에청원서를보 내는것은단지조선이독립을선언했다는것을알리 는통고에지나지않는다고표명하였다.그리고조선 민족이조선의정치를하는것이민족자결이라고밝 히고있다.또한최후의1인까지최후의1각까지분기 할그만한각오가없어서는안된다고말함으로써강 력한 독립의지를 표현하였다.그는 독립선언서가 과 격하지 않다고 보았으며, “금후에도 또 독립운동을 할것인가”라는검사의신문에“물론그렇다”라고주 저함없이대답하였다.그는기독교인으로폭력이아 니라비폭력으로,복수가아니라사랑으로독립을쟁 취해야한다는 생각을 확고히 품고 있었다.박동완의 이러한 불굴의 절대독립정신은 이후에도 변하지 않 았으며 비폭력적 독립운동을 비타협적으로 변함없 이전개해나갔다.박동완은 1919년 3월 1일 오후 2 시경 손병희를 비롯한 다른 민족대표와 함께 태 화관 지점에서 일경에 체포되었다. 출판법 및 보 안법 위반으로 2년형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으 며 1921년 11월 4일 서울 마포 공덕동 경성감옥에 서 만 기 출 소 하 였 다 . 출 소 후 그 는 수 감 중 에 얻 은 일제에 의한 고문후유증으로 평생을 병마에 시달 렸다. 박동완의 부인 현미리암 은 3·1독립운 동 당 시 심 히 병약하여 장녀 박한엽이 살림 을 도 맡 아 하 였 다 . 어 머 니 대신 살림을 도맡게 된 그녀는 당연히 아버지 수 발도 직접 하게 되었는데 3.1독립운동 당일의 진 술을다음과같이하였다. 아버지는 성격이 워낙 깔끔한 분이라 외출할 때면 항상 손수건을 지니고 다니셨지. 그날 아침에도 어느 날과 다름없이 손수건을 챙겨드렸어. 그런데 밖으로 나가셨던아버지가잠시후다시들어오셔서손수건을 달라고 하시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랬지. "아버지, 방 금나가실때드렸는데요.안주머니한번살펴보세요" 하고...그랬는데안주머니는살펴보지도않고 한 장 더 달라고 그러시는 거야. 그래 무심히 오늘은 손수건이 한장더필요하신가보다생각하고마침세탁해놓은 게 있어서 한 장 더 드렸거든.그랬더니만내얼굴과누 워계신어머니얼굴을한동안묵묵히바라보시다가아 무런말씀도없이그냥나가버리시는거야.2년동안옥 고를 치르고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께 시간이 어느 정 도 지난후에 내가 "그때,왜 나가셨다가 다시 집에돌 아오셨나요?"하고물어봤지.그랬더니그제서말씀하 시는 거야."네 얼굴 보는 게 마지막이 될지도 몰라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그랬다"하고...아버지가 워낙 말씀 이 없으신 줄은 알았지만 그 때 더 절실히깨달았지. 박동완은거사를앞두고집을나섰다가손수건을 핑계대고다시 들어 와서딸과 아내의 얼굴을한 번 더 바라보았다. 자신과 가족의 불행을 예감하였음 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정심을 잃지 않고 태연하게 행동했던 그의 모습 속에서 과묵한 그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동시에 3·1독립운동 거사 후 죽음을 각오한 그의 비장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박동완의 가족은 가장이 감옥에 들어간 후 얼 마 안 되어 경성부 누하동 214번지에서 1920년 5 월 종로구 체부동 121번지로 이사를 하였다.출옥 후 6개월 정도 지나서,1922년 4월 29일 이전 어느 날 박동완은 <기독신보>에 복귀하였다.재입사한 <기독신보>에서 그는 1922년 5월경부터 약 2년여 동안편집인으로근무하였다.그가기독신보사의법 적인 한국인 편집인으로 이름을 올리게 된 시점이1 922년12월20일이었다.그러나그는약6개월전부터 (1922년 5월 무렵부터) 이미 전임 주필 최상현의 사 임으로 인해 편집인의 역할을 맡아하였다. 그러던 중,국내유일한민족자본출판사였던조선기독교창 문사에서 발간된 잡지 <신생명>이 어려움에 빠지자 그는1924년5월<기독신보>편집인을사임하고1924 년 7월부터 <신생명>의 주간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자신의 글과 편집을 통해 조선민족에게 자존자립의 정신을 기독교에 기반하여 고취시키고 조선적 교회 의설립을주창하는등일제를자극하였다.결국잡지 <신생명>은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끊임없 는 간섭과 재정적인 이유로 인해 다음 해인 1925년 4 월 3일 폐간되었다.잡지 <신생명>의 폐간 이후 그는 10년동안절필하였으며,이후그는일체의언론활동 을접고사회활동을통한민족운동에만전념하였다. “기미년운동과 조선의 48인, 최근 소식”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박동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소 개하고 있다. “기독신보 주필로 계시다 1924년 7 월 창문사에서 발간하는 신생명 주간을 맡아 하 여왔는데 모든 것이 뜻과 같지 아니 되어 붓을 버 리시고 약 일 개월 전부터 동소문 안 경성공업사 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라는 내용과 함께 “바른 팔을 일 년 넘게 앓았다” 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바른팔이 아픈 관계 로 문필활동도 자유롭게 하지 못했으며, 이러한 육신의 고통과 이직으로 인한 심리적 압박 속에 서도 “결혼한 맏딸이 금슬 좋게 잘 살아서 기쁘 다”는 기사내용으로 미루어 보건데 무엇보다 가 정의행복을최고로여기는선량한가장이었다. 박동완은당시유복한가정환경에서자라한학과 최신학문을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었기에 좋은 직 업과안정적삶을영위할 수 있었다.그러나 그는 3· 1독립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함으로써 본인뿐 아 니라가족들모두힘든삶을살게되었다.그가소유 한 부동산이 경매로 매각되는 불운을 겪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삶을 살았지만 항상 희망을 버 리지않고비타협적민족운동가의외길을걸었다. 3·1독립운동 이전부터 소속하였던 YMCA를 시작으로다양한사회단체에참여한그는조선물산 장려회,무명회 등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그는 흥 업구락부의 창설멤버로 활약하였으며 흥업구락부 를 통하여 기독교연구회에서도 활동하였다. 그의 사회활동을통한민족운동중에백미(白眉)는무엇 보다 신간회(新幹會)라 할 수 있다. 신간회는 당시 국내독립운동을 주도하였던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 주의 양대 계열과 그 외 모든 정파가 연합하여 형성 된단일민족협동전선이었다.따라서신간회의창립 은 한국 근현대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박 동완은 신간회 창립 시 재무부 총무간사를 맡아 회 의 실무를 관장하며 신간회 조직이 전국적으로 확 산되는데 일조하였다. 그는 대표적인 기독교계 비 타협 민족주의자로 홍명희,안재홍,신석우 등과 함 께 ‘완전독립’, ‘절대독립’을 추구하였다. 그는 조국 의 독립과 세상의 변혁을 자신의 사명으로 알고 적 극적으로사회와끊임없이소통하고연합하였다. 한편, 경제적 자립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물산 장려회” 발기총회가 1923년 1월 20일 서울에서 열 렸 는 데 이 때 그 는 창립준비위원으로 선출되어 이틀에 걸쳐 800명의 회원을 모집하는 등 초창기 에 매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그는 무명회(無名 會)라는 조선인 기자로 조직된 단체에서 간사로 도 활약하였다. 1925년 조선중앙YMCA 연합회 에서는 농촌사업을 착수하기 위해 농촌부를 신설 하였는데 박동완은 농촌부 위원으로 활동하였으 며, 1926년 2월 28일 조선중앙YMCA 회관에서 신흥우의 주도하에 기독교연구회가 조직되어 훗 날 전국적인 YMCA 사업으로 구체화 되었을 때 7인의중앙위원가운데한명에선정되었다. 이 무렵 만주에서는 이주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만주군벌 당국의 핍박이 심해지고 있었는데 이는 만주에서한국독립운동가를제거하기위한일제당 국의 간계에 의한 결과였다. 절박한 위기에 빠진 만 주동포들의소식을접하게된국내에서는1927년12 월 9일 신간회가 중심이 되어 ‘재만동포옹호동맹’을 창립하였다. 박동완은 윤치호와 더불어 중앙상무위 원을 맡는 등 깊게 관여하였다. 그는 1928년 1월 17일 만주특파원으로서 이도원과 함께 약 3주간에 걸쳐 봉천등에살고있는재만동포를방문하여조사한후 2월7일귀경하였다.만주에서돌아온지4개월후그 해 6월 ‘조선교육협회’의 정기총회에 참석하였던 그 는 평의원에 선출되어 야학교재의 편찬이나 정기강 연회실시등의사업내용을결의하기도하였다. 이무렵의박동완은언론활동을전혀하지않고사 회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함으로써 민족운동에 전력 을기울였다.그는사회단체에소속되어활발한활동 을펼치다가돌연히망명의길을떠났다.망명지는독 립운동의 전초기지 역할을 주도하였던 미국의 하와 이였다.박동완은어디를가나고문후유증으로인한 고통에서자유로울수없었다.고문으로인한흉터가 얼굴뿐만 아니라 몸 여러 곳에 남겨져 있었다. 그의 흉터가 어떠한지를 유추해 볼 수 있는 글이 그가 하 와이로 망명간 이후 국내에서 1932년 발간된 잡지 <별건곤>에 나와 있다. 글의 내용은 “그는 수족이나 얼굴,기타 여러 곳에 너무도 상처가 많고 또한 현재 에 멀리 미주(米洲)에 가서 있으니 나 같은 의사로는 속히검사하기어렵다.미래천국의전문의사에게촉 탁하라고 그만두자” 라고 되어 있다. 그를 자유롭게 놓아두지 않았던 것은 고문 후유증뿐만이 아니었다. 박동완은 1923년 11월에 개최된 기독교 동아총회에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중국 복주에 다녀왔으며 “복 주행”이란제목의기행문을<기독신보>에총11회에 걸쳐연재하였다.일제경찰의지속적인감시로인한 수치심이 그가 남긴 기행문 “복주행”제11신에 구체 적으로표현되어있다.같은시기에작성된일제관헌 의 감시 기록(1923년 11월 8일에 조선총독부 경무국 에 의해 작성된 박동완에 관한 감시보고서)에는 박 동완이 38세 <기독신보> 편집인으로 보고되어 있으 며,“구체적인 불온한언동이나오지않음에도 그동 정은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 로 보아 그는 일제 경찰의 주된 감시 대상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이렇듯 여행도 마음 놓고 다니 지못하는신분이었기에운신하는데있어서여러가 지제약이따랐다.이것이그가하와이망명길을선택 한이유일수있다.박동완은하와이를동경하고있었 으며, 그에게 있어서 하와이가 전혀 낯선 곳은 아니 었다.동포들이 살고 있는 곳이기에 제2의 고국이 될 수있었던것이다.고문의후유증으로만성통증에시 달렸던 그에게는 추운지역인 만주보다는 따뜻한 기 후의하와이가낙원으로여겨졌을법하다. 박동완은 1928년 8월 25일 목회자로 초청되어 미 국하와이를향해떠났다.그로부터약45일이지난1 0월 8일에 배편으로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당시에 다수 동지들의 송별을 받으며 경성역에서 출발했다 는 기사가 1928년 8월 27일자 <동아일보>에 나와 있 는 것으로 보아 그는 일제의 눈을 피해 몰래 떠났던 것이아니라정당하게합법적인절차를밟아떠났던 것임을알수있다.그의하와이이주는어느날갑자 기 충동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가기를 소망해 왔던 결과였다. 그에게 있어서 하와이는 머 나먼 ‘미국의 한 영지’라기 보다 ‘조선의 일부’로 인 식될 만큼 친근한 지역이었다. 그가 하와이로 떠나 기5년전하와이동포학생이고국에방문한적이있 었다.그같은계획이실행되기전에발간된1923년6 월 13일자 <기독신보> 사설 “재하와이 우리 학생의 고국방문에 대하여”에는 그의 이러한 심정이 잘 나 타나 있다. 사설에서 그는 하와이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의고통과처지에가슴아파하며도움을주고 싶어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하와이는 머나먼 이국 이 아닌 동포가 살고 있는 조국의 연장선상에 있었 다.재만동포의실상을조사할목적으로만주지역을 방문했을때느꼈던연민의정을똑같이하와이교포 에게도 느꼈던 것이다. 이랬던 그에게 마침내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1919년에 세워졌으나 9년 넘게 전 임목사 없이 시간제 목사가 시무하고 있던 하와이 와히아와한인기독교회(WahiawaKoreanChristia nChurch)에초대담임목사로부임하게된것이다. 박동완은부임한지일년정도지나서와히아와교 회 부설 한글학교를 하와이에서 가장 큰 국어학교로 발전시켰다. 『와이하와 한인교회 역사 1919-1987년』 의저자인바바라는다음과같이기술하고있다.그는 한글학교를 통하여 한국의 역사와 문화 등을 가르치 며 교포 2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다. 실제로 그의교육을받은와히아와교회부설한글학교출신 들은 대학 진학률이 높았으며 사회 각계각층의 지도 자가많이배출되었다.그는부임하자마자근처부락 들을 직접 방문하여 전도에 전념하였다.1929년최초 의 성가대를 조직하였으며 매주 새로운 얼굴이 교회 에등록하였다.이러던중부임한지만2년이지난어 느날뇌경색에걸리게되었다.이는열악한환경에서 목사월급도없이끼니도거른채오직목회에만전념 하였던그의건강에대한적신호였다.이러한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교회에서 성도들과 함께 고국에 보낼 독립운동자금을마련하였다.그의재직기간전반을 통하여항상교인들의십일조중일부는한인선교회 에보내져한국의미자립교회에후원금으로쓰였다. 당시 와히아와 교회 교인들은 주로 파인애플과 사탕 수수농장에서일해서,낮은임금을받아어렵게살았 기에 그들의 헌금은 예산에 못 미쳐 들어 올 때가 많 았다.이런경우목사월급은후순위로밀려나고는하 였다.이러한자기희생의결과고문후유증으로원 래 안 좋았던 그의 건강은 날로 악화되었다. 건강 이 안 좋았던 그는 휴양 차 1931년 6월 4일하와이 학생 모국방문단을 이끌고 잠시 귀국하였다.귀국하 자마자 YMCA(조선기독청년회)에서 “재하와이 동 포의 근황”이란 연제로 목요강좌에서 연설하였다. 목요강좌 뿐만 아니라 “재하와이 조선인의 신앙생 활”이란 주제로 일요강화도 맡아 하였다. 계속하여 정동제일교회에서 행해지는 일요강화에도 참석하 여 “인생생활의 3요소”란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이 주필로 있었던 <기독신보>에 “하와이는락원이란다”라는제목의글을1931년6월 17일부터 1931년 9월 2일까지 총 12회에 걸쳐 연재하 였다.박동완은 이 글에서 하와이에 대해 위치,지질, 지세,정치조직,인구,산업,역사,문화,종교,풍습등 생활 상태와 하와이에 살고 있는 조선인과 조선인 단 체에 관해 자세히 기술하였으며, 마지막으로 2회에 걸쳐결론을썼다.그는결론의마무리에하와이에살 고있는한인2세들이한글모르는것을안타깝게여 기며 “조선 사람의 피를 가지고 조선말을 알지 못하 다면그에더부끄러운일이어디있으랴”하면서한 글교육의 시급성을 알리고 후원해 줄 것을 <기독신 보>독자들에게당부하였다.귀국한지3개월되던날 그해9월4일경성에서하와이로떠났다. 하와이로돌아간그는목회와병행하면서1934년7 월<한인기독교보>를편집겸발행인으로서재창간 하였다.이로써 고국에서 <신생명>의 주간을 끝으로 절필하였던그는10년간의절필생활을청산하고<한 인기독교보>의지면을통해조선민족에게희망을고 취시키는자신의글을발표하였다.이무렵박동완은 한인기독교회 중앙이사로 활동하였는데 1935년 1월 중앙이사국장에취임하여이승만등당시민족지도 자들과 함께 한인기독교회를 이끌었다.그는 1938년 하와이‘한인기독교회선교부이사원’명단에제1부 이사장으로 나와 있는데 당시 선교부장은 이승만이 맡고있었다.이로보아박동완과이승만은한인기독 교회선교부에서활발한활동을펼쳤음을알수있다. 한편,당시하와이한인사회는동지회와국민회로나 뉘어갈등이심했다.그리스도의화합과평화를강조 하였던 그는 1938년 8월 오랜 대립관계에 있던 국민 회와 동지회가 합동으로 제28주년 국치기념대회를 거행하는데있어서주(主)연사로나섰다. 동지회에서국민회와의통합을위하여열심히활 동하던박동완은1940년와히아와교회담임목사에 서카우아이(Kauai)미감리교목사로전출되었다. 와히아와교회교인들은초대담임목사와의이별을 아쉬워하며금시계를비롯하여가방과각종기념품 을 전달하며 전별회를 열어주었다. 그러나 그는 카 우아이 감리교회에 부임한 지 세 달도 못되어 시시 때때로 그를 괴롭혔던 종기로 인해 병원에 입원하 였다. 입원한 지 두 달 만에 퇴원하였다. 퇴원 후 그 는 한인교포로 구성된 각 단체 연합 임시대표회에 서 위원장을 맡는 등 활발한 활동을 다시금 전개해 나갔다.당시 각 단체 연합 임시 대표회의에 참석한 한인단체와참석자명단은1941년2월15일자<태평 양주보>의소식란에기술되어있다.각단체연합임 시대표회는 기독교,불교,천주교,천도교를 총망라 한 초교파 단체였으며, 동지회와 국민회를 비롯하 여 독립단과 여러 부인단체까지 아우르는 연합단체 였다.이처럼 교파와 노선과 남녀의 구분 없이 연합 단체를 구성하여 전체 한인 사회의 화합을 위해 의 욕적인 활동을 펼치던 박동완은 그로부터 1주일 뒤 뜻밖에도 1941년 2월 23일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 였다. 그의 장례는 3월 1일 교민 700여명이 모여 사 회장으로 치러졌다. 3·1기념 준비위원회의 주도로 이루어진그의장례식은사회장으로거행되었을만 큼 그는 하와이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하 와이 교민 사회는 진심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 다.그의죽음앞에수백남녀동포가경의를표했다 는 사실은 하와이 한인 사회에서의 그의 위치를 대 변하여 주는 것이다. <태평양주보>는 2주에 걸쳐 박 동완의 서거 소식을 접한 하와이 교민들의 애도의 글을 추모특집으로 실었다.1941년3월 8일자<태평 양주보>에실린글을소개하면아래와같다. 박동완선생서거에추도.통재애재로다 선생께서 운명 시에 공사 간에 심절하신 유언도 못하시고 별세하심을 통절애절하나이다. 창파고도 중에신음고통으로고적하신때에만족한간호적위 안을 제공하지 못한 것은 죄송 천만이외다.만세 하 옵소서.성체인자신도망각하시고십자가의참형을 감수하심이여.억조창생을구속하심이로다.처자와 생명을 불관하시고 사형선고를 자취하시는 선언서 에친필로서명하심이여.국가의독립과민족해방을 위하여 심절하심이로라. 위대하다. 선생의 용감적 희생심이여.민족적정신상자유와적개심을고취함 에 광선이고 생명수로다. 선생의 신령은 천부께서 환수하심이여.선생의일생에미진하신광복대사를 성주전에호적으로애원하게하심이로다.선생께서 심령상으로협조하신은택이여.불원장래에광복대 사를완성한후한양성장춘단에서천추만세토록선 생의 심령을 추모하오리다. 복원 선생은 낙원에서 안심영존하옵소서. -애도인정은서 당시<태평양주보>에실린추모의글을통하여몇 가지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다.박동완은 갑자기 유 언도못하고운명하였다.하와이교민들은그가가족 이나죽음도염두에두지않고독립선언서에서명한 것을 민족적 정신상(精神像)으로 여겼다.또한 그의 철저한 애족심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으며 갑작스런 죽음에대해애통해하였다.그리고살아계실때잘해 드리지못한것에대해미안한마음을표현하였다.그 래서인지교민들은장례식직후임치해두었던돈과 장례식을치르고남은돈을합하여본국에있는박동 완의가족에게송금하여주었다.당시하와이교민들 의삶이결코풍족한편이아니었음에도불구하고남 은장례비용에임치되었던돈을합하여본국에있는 유족에게 보냈던 것을 보면 한국인의 인정을 알 수 있다.또한 박동완이 살아생전에 하와이 교민들에게 신망을 잃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1941 년 2월 23일 서거 당시 그의 나이는 만55세로 애석하 게도광복을4년앞둔시점이었다. 1941년4월에유골이우편물취급으로무언의환국 을하였는데,당시국내에서는신문에전혀보도되지 않았으며부고조차낼수없었다.망우리공동묘지에 3·1독립운동 당시 동지였으며 이후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을 역임한 함태영 목사의 집례로 안장되었다. 1966년6월서울시동작동에있는국립서울현충원애 국지사묘역에이장되었다.1962년3·1절경축식에서 건국공로훈장대통령장이추서되었다. ‘근곡 박동완의 생애와 기독교 민족운동’을 다 음과같이요약할수있다. 첫째,그의생애에있어정체성의시발점은기독 언론인에 있었다.창간 당시부터한글위주의 글을 표방한 <기독신보>에 있어서 한글,한문과 영어에 능통한 박동완이주필의 역할을감당했다.그는글 로 조선민족의 독립을 외칠 수 없었기에 3·1독립 운동 당시 민족대표로 참여하여 언론으로 못한 것 을 행동으로 표현하였다. 따라서 그는 ‘행동하는 기독교언론인의표상(表象)’이라볼수있다. 둘째, 그의 민족운동은 3·1독립운동 당시 독립선 언서에 언론인으로는 유일하게 민족대표로 서명함 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수사와 재판과 정에서 조선민족대표답게 조선의 절대독립과 비폭 력·무저항 정신을 당당하게 밝혔다. 일제의 고문과 협박은 그의 기개를 꺾지 못하였다.그는 3·1독립운 동에 주도적·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제안을 받아 서가 아니라 그가 먼저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의 참여의사를밝힘으로민족대표에선정되었다. 셋째, 박동완은 철저한 기독교인이었으며 철저 한 민족주의자였다. 박동완은 1885년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오던 해에 태어났다. 어찌 보면 ‘한국 선교둥이’라고 볼 수 있다.유학자 집안 출신으로. 유학(儒學)교육과 근대교육을 받았기에 동도서 기(東道西器: 동양에서 서구문명에 맞서 동양의 정신, 즉 대개 유교적 지배질서와 윤리를 유지한 채 서양의 발달된 문명,즉 기계와 기술 등을 도입 하여 나라를 부강케 한다는 의미)와 같은 이중적 사고를 가지기 쉬웠지만 무엇보다 기독교 복음 (福音)을 절대적 우위에 두었다. 그는 확고한 기 독교신앙을바탕으로민족운동을전개하였다. 넷째,그는‘기독교측의대표적인비타협적민족 주의자’이자 철저한 원리주의자였으며 그의 원칙 은 철저히 고수되었다.그는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 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지만 폭력적 방법을 지양 하였다. 비폭력·무저항으로 일제에 철저히 항거하 였으며고문과감시가그의뜻을꺾을수없었고서 구문명에도 주눅 들지 않았다. 자존자립의 독립정 신과조선민족에대한자부심이그에게늘있었다. 다섯째,박동완은 정동제일교회 본처전도사로,목 회자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다.그는 전임목회자가 아 니라 파트타임 목회자였다. 기독언론인과 독립운동 가로활동하면서도그는목회자의역할을게을리하 지않았다.그의삶에서는항상이세가지역할이교 차되었다.그가목회자로서가장중요하게생각한것 은 ‘주일학교를 통한 교육목회’였다. 그는 한국 주일 학교의 시작인 정동제일교회에서 역사기록상 최초 의주일학교교장이었다.주목할점은1923년정동제 일교회에서 ‘국내 최초로 여름성경학교를 개최하여 전국적 확산에 기여’한 것이다. 하와이로 망명한 이 후에도 교육목회에 전념하여 1929년에는 그가 운영 하던 와히아와 한인기독교회 부설 한글학교를 하와 이에서가장큰한글학교로발전시켰다.농촌의작은 교회였지만 그의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하와이 사회 에서중요한위치를차지하였다.그는민족의독립을 위해 조선인과 조선인 2세의 교육을 가장 중요한 일 로여기고평생에걸쳐이를위해전심전력하였다. 여섯째, 박동완은 성서 중심의 기독교신앙을 바 탕으로냉철한비평의식을지녔으나자신과생각이 나 이념이 다른 사람과도 통합하고 소통하였다.3·1 독립운동을 통하여 종교가 다른 천도교, 불교 측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다. 신간회를 통해서도 그가 비판하였던 사회주의 인사들과 연합하였다. 그는 이데올로기가 다른 사람들과도 함께 소통하였다. 미주 한인단체의 양대 축이라 볼 수 있는 국민회와 동지회의통합을위하여하와이에서1938년에있었 던 경술국치기념 연합회에 주(主) 연사로 나섰다. 그는 분파적 행동보다는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연 합하는데 앞장섰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복음 이었고조선의독립과조선민족의화합이었다. 일곱째, 박동완의 민족주의적 기독교정신은 ‘정의, 사랑과화합’으로요약된다.그는정의에기반을둔삶 을살았다.조국의독립이라는원칙에서조금도물러서 지않았다.따라서그는비원칙과는철저히비타협적으 로살아간대표적인민족주의자로세상에각인되어있 었다.하지만이런원리주의자가복음과민족의독립을 위해서는자신의출신,이념,교파를고집하지않고사 랑의정신으로상대편과화합에앞장서는삶을살았다. 여덟째,그는명예,자리따위에연연하지않았다.자 신의모든것을잃을각오로3·1독립운동에참여하였고 하와이망명길에올랐다.그에게는자신의목숨과가족 조차아끼지않는결단력이있었다.어찌보면주목받을 수있는자리를훌훌박차고떠날수있는용기가그에 게는 있었다. 기독언론인, 독립운동가, 큰 교회의 목회 자라는 화려함을 멀리하고 소박한 목회와 독립운동에 전념하다가이세상을홀연히떠났다.그는죽기며칠전 까지도최선을다해그의사명을감당하였다. 일제강점기에박동완은기독교계의대표적인비타협 적민족주의자로널리알려져있었다.만약그가해방이 후까지생존하여귀국하였다면민족통일을위하여중도 우파성향을가지고좌우합작과같은중도의길을걸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위적 민족주의의 과제인 ‘민족통일’과 준비되지않은채맞이한다민족국가상황에있어그의 기독교적화합과포용정신을되새겨야할필요가있다. [이글은박재상,임미선공저,『근곡박동완의생애와 기독교 민족주의 연구』,(서울:정한책방,2019)에서 일 부발췌하여수정한것으로참고문헌은이책과동일합 니다.]/박성호명예기자(함양박씨구소명종친회) 3·1운동100주년특집 근곡 박동완의 생애와 기독교 민족운동(2 ) 선조 유지를찾아븣 박동완선생초상화 수형기록사진 박 동완목사시무식(1928),와히아와한인기독교회 3.하와이민족운동활동(1928-1941) 4.맺음말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