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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은 경주로서 최치원(崔致遠)의 후예이다. 1833년 12월 5일 경기도 포천군 내북면 가채리(抱川郡 內北面 嘉·里)에서 대(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資質)이 뛰어나서 초명(初名)을 기남(奇男)이라 하였다. 가세가 가난하여 4세 때 단양(丹陽)으로 옮긴 것을 비롯하여 여러 지방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1846년 14세 때 부친의 명에 따라 화서 이항노(華西 李恒老)의 문인이 되었는데 면암이라는 호는 화서에게서 받은 것이다. 23세 때 명경과(明經科)에서 갑과(甲科)로 급제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재임 중 면암은 꾸준히 부정부패와 구국항일 투쟁을 전개하여 끊임없이 탄압을 받았다. 그의 정치사상은 화서 계열의 위정척사(衛正斥邪)이었으며, 공맹(孔孟)의 왕도정치(王道政治) 구현을 이상으로 하였다. 면암은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로서, 이는 1868년의 시폐4조(時弊四條)의 상소와 1873년의 오조상소(五條上疏)에 잘 나타나 있다. 그 결과 대원군(大院君)을 하야(下野) 시킬 수 있었으나, 그 역시 유배당하여 제주도와 흑산도에서 귀양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후로는 관직에 오르지 않았지만 1895년 명성황후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상소를 통한 항일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미 1875년 개항(開港)에 반대하여 이른바 "지부복궐 척화의소(持斧伏闕 斥和議疏)"를 상소한 바 있지만 1906년까지 30편의 상소를 올려 시종일관(始終一貫) 위정척사 사상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개항에 대한 면암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는 1875년 상소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한번 화친을 맺는 날 저 적(賊)의 욕심은 물화(物貨)를 교역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저들의 물화는 사치 기완(奇玩)하고 수공생산품(手工生産品)이어서 그 양이 무궁한 데 반하여 우리의 문화는 모두 백성의 목숨이 달려 있는 토지생산품으로 그 양이 유한합니다. 따라서··· 교역을 한다면 우리의 심성(心性)과 풍속은 패퇴할 뿐만 아니라 그 양은 틀림없이 일년에도 수만에 달할 것이니······ 이에 따라 나라 또한 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이와 같은 그의 사상은 말년에까지 그대로 관철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사상이 굴절될 우려가 있는 관직생활을 끝까지 거부하고 있으며 심지어 면암의 상소에 의해 결정적으로 실각의 계기가 마련되었던 대원군이 1894년 재집권하게 되었을 때, 개항에 대하여 같은 견해를 표명한 면암을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제수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1895년 6월 상소를 올려서 일본의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개화의 모순을 지적하였는데 이 때문에 감금되기도 하였다. 1896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정부에서는 그들에게 영향력이 큰 면암을 선유대원(宣諭大員)으로 임명하였으나, 면암은 응하지 않았다. 1898년 의정부 찬정(議政府 贊政) 궁내부 특진관(宮內部 特進官)에 임명되었으나, 수무비 명대의(修武備 明大義) 등의 시무책 12조를 들어서 상소하였을 뿐 응하지 않았다. 1904년 노일전쟁(露日戰爭)이 일어나자 고종이 다시 의정부 찬정, 궁내부 특진관으로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해 12월 날로 기울어 가는 국운(國運)을 좌시할 수 없어 고종을 알현하고 오조수차(五條袖箚)를 상주(上奏)하였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2차례나 감금된 상태에서 드디어 을사조약이 늑결되었다. 이에 항의하여 민영환(閔泳煥)이 자결하자, 면암은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을미 사변 때의 역적이 실로 만고의 대역적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만, 이 을사 5적들은 죄가 오히려 아비나 임금을 죽인 것보다도 더 심한 것입니다. 지금 이런 대역적들을 오히려 용납하여 일시라도 천지 사이에 그대로 살아 있게 할 것이겠습니까. 저 5적들이 비록 외세에 의지하여 군부(君父)를 협박하는 것이나 역시 폐하의 신하인데, 어찌 차마 이 역적들과 더불어 같은 하늘을 이고 아직도 처벌을 내리지 않나이까···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신의 죽어 가는 말이라고 하여 귀에 흘려 버리지 마시고, 속히 국적을 토멸하는 동시에 허위 조약을 거부하라는 신의 요청을 단행하여 국가의 멸망을 돌이켜 다시 보전할 수 있게 하소서. 신은 통곡하여 숨이 끊길 듯함을 어쩔 수 없어 죽음을 무릅쓰고 삼가 이만 아룁니다." 이상의 상소를 통한 평화적 항일구국운동으로 소기의 성과를 올리지 못하자, 무력투쟁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 때 면암은 74세의 고령이었다. 1906년 2월 면암은 가묘(家廟)에 하직을 고하고 호남으로 떠나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하였다. 처음에 상경하여 일을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일인들의 방해로 상경하지 못하였다. 다시 판서 이용원(判書 李容元)·판서 김학진(金鶴鎭)·관찰사 이도재(觀察使 李道宰)·판서 이성렬(李聖烈)·참판 이남규(參判 李南珪)·곽종석(郭鍾錫)·전 우(田愚)에게 편지를 보내어 함께 국난을 타개할 것을 호소하였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이에 면암은 문하생 최제학(崔濟學)을 전 낙안군수(樂安郡守) 임병찬(林炳瓚)과 연락케하여 전라도에서 거의(擧義)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의 의병활동은 태인(泰仁)과 순창(淳昌)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은거지인 포천을 탈출하여 태인에 이른 것이 1906년 3월 24일, 거유 면암의 부름에 호응한 인물은 이정규(李正奎)·김 준(金準, 泰元)·조재학(曺在學)·이양호(李養浩) 등이었다. 기우만(奇宇萬)과도 만나 거사를 상의하기도 하고 각지에 격문을 보내어 궐기를 촉구하였다. 그리고 문인들을 중심으로 동맹록(同盟錄)을 만들게 하니 4월 10일 현재 113명에 이르렀다. 4월 13일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 궐기를 위한 강회(講會)를 열어 당일에 80명의 호응을 얻고 각지의 포군들을 모집하여 무기를 준비하였다. 창의(倡義)에 앞서 민영규(閔泳奎)를 통하여 기병소(起兵疏)를 올려 그 목적을 천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대오를 갖추고 4월 13일 태인읍으로 들어가니 군수 손병호(孫秉浩)는 소문을 듣고 도망하여 쉽사리 태인을 접수하고 군사들로 하여금 수비케 하였다. 이 때 일본영사관에는 16개항의 죄목을 들어 규탄하는 글을 보냈다. 이튿날(14일) 정읍(井邑)으로 진군하니 군수 송종면(宋鍾冕)이 의병을 맞이하였으며, 이곳에서 다시 무장을 강화하고 의병 소모(義兵 召募)의 방을 붙여 100여 명의 장정이 증원되었다. 군사들을 거느리고 내장사(內藏寺)에 유진(留陣)하니 이 소식을 들은 인근의 많은 포수들이 호응하여 의진은 300여 명으로 늘어났다. 15일 구암사(龜巖寺)를 거쳐 16일 순창읍으로 들어갔다. 17일 곡성(谷城)읍으로 진주하였다가 18일 중진원(中津院)을 지나 남원(南原)으로 진군하려는 데 남원은 이미 방비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길을 돌려 순창으로 회군하였다. 그러는 동안 의병부대는 6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 때 전주의 관찰사 한진창(韓鎭昌)과 순창 군수 이건용(李建鎔)이 일병을 거느리고 습격해 왔다. 19일 새벽 면암은 임병찬에게 명하여 접전케 하였으나 길이 어긋나 교전은 없었다. 얼마 후 순창 군수가 면암을 찾아왔다. 면암은 그의 목을 베이고자 하였으나 임병찬의 만류로 중지하고 선봉장으로 삼았다. 그간에도 사방에서 애국 청년들이 몰려와 군사의 수는 800여명으로 늘었으나 무장을 갖춘 사람은 200여 명에 불과하였다. 20일 새벽 관찰사 이도재(李道宰)가 의병을 해산하라는 황제의 칙지(勅旨)와 고시문을 보내왔다. 면암은 기병소(起兵疏)를 올렸으니 곧 황제의 비답(批答)을 받게 될 터인즉 일개 지방관찰사가 간여할 바가 아니라는 답장을 보냈다. 이 때 이미 옥과(玉果)와 금산(錦山)에 관군과 일병들이 출진하고 포위망을 형성하여 사면으로 공격하여 왔다. 면암은 그들을 맞아 싸우고자 하였는데 척후병의 보고에 의하여 그들이 일인이 아니라 전주·남원의 진위대로 구성된 관군임이 판명되었다. 당시 의병들이 당면하였던 난제(難題)는 관군과의 접전이었다. 의로운 의진의 행군을 막는 자는 모두 일인들의 앞잡이이므로 한국인이라 하더라도 일인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면암은 한국인이 한국인을 치는 것을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여 의진을 해산시키고자 하였다. 모두 흩어지고 22명이 남아서 면암을 호위하고 있었다. 관군의 공격은 집요하였다. 8시경 정시해(鄭時海)가 유탄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21일 새벽 면암과 호위 유생 12인이 남았고, 관군이 사면으로 포위해 들어왔다. 이때 이들은 경전(經典)을 돌아가며 외우고 있다가 체포되었다. 22일 광주 고문관 강도행차랑(綱島幸次郞)의 심문이 있었고, 23일 전주 진위대 김희진(金熙鎭)과 일병에 의하여 압송되었다. 면암과 임병찬은 가마에 타고 나머지 11인은 줄지어 묶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면암을 끝까지 따라간 유생들은 임병찬을 비롯하여, 고석진(高石鎭)·김기술(金箕述)·문달환(文達煥)·임현주(林顯周)·유종규(柳鍾奎)·조우식(趙愚植)·조영선(趙泳善)·최제학(崔濟學)·나기덕(羅基德)·이용길(李容吉)·유해용(柳海容)이었다. 서울에 있는 일군 사령부에 갇혀 6월 26일 형을 받게 되었다. 면암은 감금 3년, 임병찬은 감금 2년형을 받고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 7월 9일 대마도에 도착하니 이미 홍주(洪州)의진에서 체포된 80명중 9인이 유배되어 와 있었다. 정산(定山)의 이 식(李·), 예산(禮山)의 남경천(南敬天), 보령(保寧)의 유준근(柳濬根), 홍주(洪州)의 안항식(安恒植), 부여(扶餘)의 이상두(李相斗), 남포(藍浦)의 최중일(崔重日), 홍주(洪州)의 신보균(申輔均), 신현두(申鉉斗), 비인(庇仁)의 문석환(文奭煥) 등이었다. 여기에서 면암을 비롯한 11인은 시를 지어 우국지정과 불우한 처지를 달랬다. 면암은 이 시기에 수 십 편의 시를 남겼다. 기자(箕子)가 오실 적에 도(道)도 함께 따라와서 일본이나 서양이나 그 범위에 들었거늘 모르매라 조물주는 무슨 심사로 나더러 대마도를 보라 하는지 箕聖來時道己東 扶桑若木範圍中未知造物綠何事 使我終觀馬島風 일인 경비대장에게 심한 모욕을 받은 후 면암은 단식으로 자진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임병찬으로 하여금 황제께 올리는 유소(遺疏)를 받아쓰게 하였다. 일인들이 놀라 자신들은 경비 책임만 있을 뿐 음식은 한국 정부가 보낸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함께 유배된 의사들이 울면서 식사를 권하는 바람에 마침내 단식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74세의 노령으로 거친 의병생활과 감금 유배 그리고 단식 등으로 받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충격 때문에 득병한지 1개월만에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때가 1907년 1월 1일(음력 1906년 11월 17일)이었다. 면암의 유해가 부산에 도착하자 애국시민들은 철시(撤市)를 했고 남녀노소가 유해 앞에서 통곡을 했다. 상여가 마련되어 정산(定山) 본가로 운구하는 데 곳에 따라 노제(路祭)로 전송하고 울부짖는 민중들 때문에 하루에 10리밖에 운구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상주(尙州)에서 새재(鳥嶺)로 가는 길을 택할 수 없어서 김천(金泉)으로 나와 열차로 운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