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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치카 최 재 형 (1860~1920) 페치카 최 재 형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04 최재형의 생애 주요 사건 1907년 1908년 1909년 1910년 1911년 1916년 1919년 1920년 정미 7조 약 한국군 해산 고종 강제 퇴위 헤이그 밀사 파견 동양척식주식회사 안중근 하얼빈 의거 한일병합, 주권상실 중국 신해혁명 3・1운동 고종 승하 1869년 1870년 1871년 1878년 1884년 1895년 1904년 1906년 1860년 표트르 세메노 비치 초이 신미양요 글로벌 청년 갑신정변 을미사변 러일전쟁 통감부 설치 8월15일 9세 10세 11세 17세 24세 35세 44세 46세 출생 한인 최초 러시아 정교회 학교 입학 러시아 연해주 지신허로 이주 (조부, 부친, 형 내외)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와 3년간 상사원과 통사 생활 얀치혜~멍고개 도로공사 통역 얀치혜 남도소 도헌, 한인마을 소학교 건립 러일전쟁 참전 일본으로 가서 박영효를 만남 함경북도 경원군 부친 최홍백(노비), 모친(기생) 형수의 구박과 굶주림으로 가출 (포시에트 항구 러시아 상선 선장에게 발견, 견습선원으로 6년간 두 번의 세계일주를 통해 어학, 문학, 상식 공부) 1월 대동공보사장 취임(대동공보 에서 이토격살 논의) 대동공보에서 미하일로프 변호사에게 안중근의 변호를 맡김 러시아 당국에 체포 (첫째 사위의 도움으로 풀려남) 대한국민의회 외교부장, 상해임시정부 재무총장 우스리스크 자택에서 4월 4일 체포, 4월 7일 순국 간도관리사 이범윤과 의병모집 및 독립자금 모금 독립단체 <동의회 조직> 총장 최재형 부총장 이범윤, 이위종 대한의군참모중장 안중근 대양보 사장, 권업회 총재 (일제에서 최재형 제거를 위한 음모론을 제기) 이제, 랑코리아와 K문화독립군이 시베리아의 거인, 최재형 선생을 현재로 불러냅니다. 함경도 노비의 아들로 태어난 러시아의 고려인 디아스포라로 그는 기생 어머니를 둔 천민 출신이다. 어린 나이에 러시아로 이주한 뒤 러시아 선장부부의 도움으로 신분차별을 극복하고 각고의 고생 끝에 자수성가하여 군수산업으로 큰 돈을 벌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가치 있는 삶을 실천한 사회공헌 지도자로서 그는 독립운동, 특히 무장투쟁의 정신적 지주이자 자금원으로 활약하였고, 특히 안중근의 후원자이며 하얼빈 의거의 실질적 배후로 전 재산을 바친 동의회 총재, 항일독립운동가이었다. 대동공보, 권업신문으로 민족 언론을 창달하고 민족혼을 일깨운 애국언론인이었으며 고려인을 위하여 마을마다 30여개의 학교를 세우며 재러한인사회를 화합시키고 미래의 꿈나무를 키워낸 교육계몽가이다. 그가 펼친 교육사업 또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이 되었고 고려인들은 그를 따뜻한 난로 <페치카>라 불렀다. 러시아 독립운동가의 대부로 상해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 추대되었으며, 러일전쟁 후 4월 참변 때 가족을 위해 투항한 후 가족과 동료를 살리기 위해 죽음을 택한 휴머니스트, 이송도중 탈출하다 순국하였고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의 항일독립운동의 대부 역할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공산화와 이데올로기의 그늘에 가려져 그의 삶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다가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러시아 정부가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추모하는 러시아 항일영웅 그가 최재형이다 한국의 카네기, 이 시대의 롤모델 <페치카 최재형> 러시아의 추위보다 나라를 잃은 나의 심장 이 더 차갑다. 두 개의 이름, 표트르 세메노비츠 초이 그리고 최재형! 그러나 조국을 위해 불타는 하나의 심 장을 가졌던 흙수저 영웅이었다.따뜻한 난로 <페치카>로 불린 휴머니스트, 흙수저 영웅 최재형에게서 그 해답을 찾아봅니다. 이념갈등, 황금만능주의, 일등주의 그리고 신분차별로 분열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그 해답을.......! 49세 50세 51세 56세 59세 60세 47세 48세 10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