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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2월28일 목요일 4 (제146호) 기 획 문정공파의 파조는 고려사 편수에 참여하고 형조와 이조판서를 역임한 휘 원정(元貞)으로 자(字)는지성(之成),호(號)는만은(晩隱)이다. 1414년에 태어났는데 재주가 뛰어나고 학문이 정교하고 치밀하여 도덕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으 며, 형제간에 우애가 깊고 효성이 뛰어나 선고 (先考)이신연흥군(휘고)께서두차례나외지로 귀향을 갔을 때 형 문헌공(휘 원형)과 함께 따라 가 조석으로 곁에서 모시며 맛있는 음식으로 봉 양하니 그곳 사람들이 그 효성을 칭송하지 않은 이가없었다. 23세 때인 세종 18년 아버지 연흥군께서 돌아 가시니 형과 더불어 시묘 3년을 하면서 슬픔에 지쳐몸을상하기도하였다. 1441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과 수차 요직을 거쳐 청관(홍문관의 벼슬) 현직을 지내고 춘추 관 기사관을 겸직하시어 왕명을 받들어 고려사 를 편수하면서 가문이 쇠함을 탄식하시어 시를 지어 자손에게 경계하였다.그 시에 이르되 븮우리 조상은신라의진골로연성부를식향으로하사받 았노라./삼한에 이름난 갑족으로서 대대로 벼슬 하여 가문이 빛났노라./ 그러다가 문운(門運)이 뒤집히니운수런가./그러나운수의부침(浮沈)이 어찌일상사랴./여러자손은모름지기학업에힘 써충효가문광공을이를지어다.븯 여기에 문광공(文匡公)은 문정공의 5대조로 휘는 전지(全之)로 외교(外交)와 정치이론에 밝 아 원(元)나라에까지 명성을 떨치고 충선왕(忠 宣王)이 복위(復位)하자 연흥군(延興君)에 봉해 지고 시호는 문광(文匡)으로 18세에 과거에 급 제하여 문하주서에 이르러, 1279년 원나라에서 고관대작들의 자녀들을 뽑아 입시하였는데 거기 에 뽑혀 중국의 이름난 선비들과 사귀면서 고금 의 사건과 산천(山川)·풍토(風土)등을 토론하며 익혔다. 원나라 황제가 정동중서성(征東中書省) 조마유학교수(照磨儒學敎授)를 제수하였다. 고 려에 돌아와서는 주요요직을 두루 거쳐 중대광 첨의찬성사 우문관 대제학 감춘추관사 판선을 역임하고, 삼중대광 수첨의정승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상호군에제수하였으나사양했다. 문정공은 1464년(세조10) 겨울에 사은사로 중 국에 가 사은사로서 체통을 아주 훌륭히 하여 황 제로부터 상하홀과 포도연벼루, 영무배 술잔을 하사받고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며, 본국에 돌아 와서는 세자 우빈객으로 승진시키고 형조판서에 제수하였다가 다시 이조판서로 전보하여 정헌대 부의벼슬을더하였다. 형 문헌공(휘 원형)이 숭록대부(종1품)의정부 우찬성으로 승진하시어 예조판서를 겸직(후에 영의정에 제수)하였으니 형제가 죽산(竹山) 박 문(朴門)의기개를크게높였다. 1466년(세조11)갑자기 병에 걸리니 백씨인 문 헌공께서 친히 약재를 맛보면서 정성껏 치료하 였으나마침내구원되지못하고세상을뜨셨다. 문헌공께서는 가슴을 치며 통곡하시어 말씀하 시기를 “하늘은 어찌하여 나의 어진 아우를 이 다지도 빨리 빼앗아 간단 말인가.이제 우리 가문 도 장차 쇠약 하겠구나” 하였다. 또 문장과 재덕 을 높이 인정하여 “내가 미칠 바가 아니다” 하였 다. 문정공은 3대의 조정을 걸쳐 섬기면서 청백하 고 근신하며 스스로의 분수를 잘 지켰다. 그리고 한번 중국에 사신으로 가 이름을 떨쳤다. 겉으로 는 비록 엄격하고 씩씩하였으나 마음씨는 실로 너그럽고 활달하시어 흠모하는 사람이 많았다. 항상 충효와 청백으로써 자손을 훈계하시어 당 세의법가(法家)라고들하였다한다. 문정공은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다.장남 휘 승 양(承陽)은 통훈대부 함평현감을 역임하였고, 차남 휘 안수(安壽)는 선전관, 셋째 휘 안복(安 福)은 좌랑(佐郞)이다. 장남 승양의 아들 한곤(漢昆)은 현감, 장손자 배근(培根)은 문과 첨지, 차손자 양근(養根)은 원종공신으로 어모장군충무위부사직을 역임했 다. 아들 린( 멩)은 1513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 관 수찬에 있을 때 을사사화를 당하여 경성으로 부터 광주로 내려왔는데 광주 임곡에서 여생을 즐겼다. 휘 승양의 5대손(린의 손자) 휘 경(璟, 1 559~1633)은 사계 김장생 선생 문하에서 동생 휘 종(琮)과 학문을 연마하고 우애가 돈독하여 족 숙인 좌상 휘 홍구(弘구)와 영추 기자헌(領樞 奇 自獻)이 관직에 나아갈 것을 권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울분을 참지 못 하여함재(涵齋)기효증(奇孝曾)과같이각고을 에서 의곡을 모아 장성 의병청으로 가서 전략을 세워 의견을 진술하니 여러 의사들이 공을 기효 증의 종사관으로 추천하였다. 그리고 의곡 수 천 석을 죽음을 무릎 쓰고 바다를 통하여 의주 행재 소까지 운반하여 군량을 공급하였다. 이에 선조 는 그 충절을 장하게 여겨 평시서직장(平時署直 腸)의 벼슬을 제수 하는 등 군량미 모곡(耗穀)에 많은 공적을 남긴 당시의 충신이다. 이후 조정에 서 다시 불러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이에 걸 맞는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강호에서 살기를 원하는 퇴로(退老)의 뜻을 굽 히 지 않았다. 이에 이를 가상히 여긴 선조임금은 그에게 죽림처사(竹林處士)라는 아호(雅號)와 함께 궤장( 누杖븡안석과 지팡이)을 내려 그 지절 을포상하였다. 광주 임곡에 퇴거하여 성성재(惺惺齋)와 가학 정을 짓고 거쳐하며 시례(詩禮)를 즐기며 특히 송죽의 절개를 사랑하며 세상근심을 잊고 지내 면서시를지어제손(諸孫)들을교도하였다. 죽림처사 휘 경(璟)의 아들 용회(휘 用晦)와 손자 진빈(휘 晉彬) 또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에 종군 또는 거병하여 혁혁한 공을 세워 충의의 가문으로전해지고있다. 죽림처사공의 아우인 종(琮)의 호는 단구자 (丹丘子)인데 문장과 필법이 뛰어나 1615년에 사마시에 오르고, 1627년 정묘호란에 사계 김 선 생과 같이 거의(擧義)하였으며, 1636년 병자호 란에 도내 동지들과 창의하여 참전(參戰)하였 다. 공의 손자 진빈(晋彬)의 호는 포허자(抱虛 子)인데 종조 단구공(丹丘公)을 따라 의병을 일 으켰다는 사실이 양호거의록(兩湖擧義錄)과 호 남창의록에기재되어전해진다. 문정공의 장남 휘 승양은 광주지역 후손들이 낙남조로 모시고 있다. 함평현감을 역임하고 묘 소가 인동 고목동으로 기록되어 함평현감을 지 낸 관계로 전라도와 인연을 맺게 된 것으로 추정 되며, 현재 묘소는 실전되어 종가의 뒤편에 설단 향사하고있다. 후손들이 전라도에 정착하게 된 확실한 문헌 근거인 족보 기록에 의하면 문정공의 증손(휘 배 근)때부터라고 추정되는데,문정공의 손자인 휘 한곤의 면주(面註)에 ‘함평 현감재임시에 경향 을 왕래하던 중 나주 박산이 좋은 터임을 알고 장 자 배근을 주거케 하고 차자 양근은 원임곡에 거 주케 하였다.’라는 기록이 이를 입증하고 있어 입 향520여년이다. 원종공신으로 어모장군충무위 부사직에 오른 양근(養根)의 아들 린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 관 수찬 재직시 을사사화로 인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임곡에서후학을양성하며여생을즐겼다. 증손휘 배근은문과를급제하여첨지(僉知)를 역임하였는데 당시 재력과 권력이 혁혁하여 박 장자(朴壯者)라 칭하고 박산(博山)을 박산(朴 山)이라칭하였다는기록도남는다. 아들 둘(맹윤, 중윤)을 두었는데 이중 장남 맹 윤의 후손들은 광주 광산구 박호동(현 송산교 부 근)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다 9대에 이르러 전북 고창 흥덕을 거쳐 성송면 판정리로 이거하며 고 창파로세거지를이루고있다. 문정공의 증손 휘 양근의 후손들은 광주 광산 구 임곡동에 큰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500여년 이어온종가가그연혁을대변해주고있다. 휘 양근의 5대손 휘 진빈은 종손파로 임곡에 선빈은 무후, 상빈은 고창 흥덕, 기빈은 광주 임 곡, 자빈은 임곡, 화순동복, 감찰공 후손들은 임 곡 천동, 하남지역으로 각각 세거지를 옮겨 집성 촌을이루고있다. 임곡에는 현재 죽림처사 휘 경이 세운 가학정 과종택,선조님의재사(齋舍)영모재가있다. 임곡 문중은 대대로 학문이 뛰어나고 충의(忠 毅)가 돋보인 문중으로 호남의 명문가 반열에 올 라 그 후손들은 선조의 음덕에 감사하며 종사에 더욱 열성으로 최근 조성된 합동묘원은 지역은 물론타지역의많은사람들의발길을잡는다. △현감공제단 현감공의 휘는 승양(承陽) 통훈대부 함평현감 을 역임하였다. 호남지역 후손들이 낙남조로 모 시고 있다. 묘소가 인동 고목동 한실사(寒實寺) 아래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전하고 있으나 미 상으로 실전되어 1992년(壬申)에 종가의 뒤편에 설단향사하고있다. △가학정(駕鶴亭) 임곡 앞산(용진산) 북쪽 산허리에 자리한 ‘신 선이 학을 타고 노닌다.’는 뜻의 가학정은 선조 임금이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피난할 때에 벼슬 도 없이 자신의 옆을 지키며 보필한 죽림처사공 휘 경(璟)의 공을 치하하여 벼슬을 내리려 하였 으나 한사코 사양하자 대신 죽림처사(竹林處士) 라는 시호와 지팡이를 내리고 나라의 돈으로 지 어준정자이다. 황룡강 맑은 물이 정자 밑을 흐르고,오르는 양 쪽 길목에는 노송(老松)을 비롯한 많은 나무가 우거져 푸른 숲을 이루며, 곳곳에 층암절벽이 솟 아 있어 마치 소금강(小金剛)을 보는 듯한 풍경 이다. 정자에서 앞을 내려보고 있자면 세월과 세 상이 바람을 타고 떠다니는 듯한 느낌이 저절로 들어 가학정이라 한 것 같다. 400여년의 오랜 풍 상을 겪어 온 정자는 2007년 폭우로 허무하게 무 너져 버려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는 중에 201 2년 5월 광산구에서 남아 있는 사진 등을 참고하 여비슷하게재건하였다. △종택(宗宅) 최초 건립 시기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죽림처사 공께서 가학정을 짓고 긴 끈을 이용하여 종가에 서 음식을 운반하였다는 설이 있고, 입향조께서 심은 회화나무(수령 500년)가 있어 건립시기를 짐작 할 수 있다.현재의 건물은 200여 년 전에 중 건되었다 △영모재 영모재는 1612년(壬子) 문정공의 7세손 단구 자공(丹邱子公, 휘 琮)께서 후학을 양성하기 위 해 지은 정사(精舍)이다. 그러나 1781년 불행하 게도 타인 소유로 되어 50여년이 경과된 1830년 에 16세 종손 종규(宗奎),판광공 后 래규(來奎), 기빈(起彬)公 후(后) 유규(佑奎)께서 적극적인 활동과 종원들의 협조를 얻어 문중에서 매수하 여 환원케 되었다. 그러나 1912년부터 8년간을 일제강점으로 병참(兵站) 및 주재소(駐在所)로 사용되어 왔으나 일본의 무단정치가 완화됨에 다시 문중으로 반환되었다. 그러나 재실로 사용 하기에는 신성하지 못하고 노후화 되어 6칸 ㉠자 (字) 집을 철거하고 4칸으로 1921년 중건하였으 나 1970년 12월 불의의 화재를 당하여 원래 모양 을 보존하기 위하여 소실 부분만을 보수하여 사 용하다 2015년 건물 일부를 개보수하고 담장을 설치하여 지금에 이른다. /자료제공 박형엽 회장 /글 정리·사진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뱚집성촌탐방 광주광역시광산구임곡동(죽산박씨 문정공后) 광주광산구임곡동전경. 임곡종중묘원- 500여년전임곡에입향하여후손들은호남지역임곡을중심으로 고창, 화순등에산재하여묘소관리의문제가 대두되고, 좁은국토면적에‘죽은사람이 산사람의땅 을차지해서는안 된다.’는뜻에서자연회귀의섭리에따라잔디묘원을조성하였다.이 묘원은2017년착공하여2018년완공되었 으며현재400여기의유해가안장되었다. 임곡동은 호남의 대동맥이고 영산강의 지류인 황룡강과 광산의 명산인 용진 산, 백우산 등 천혜의 아름다운 생태자 연환경이 살아 숨 쉬고 있는 아껴둔 보 물 같은 고장이다.역사적으로는 고봉 기대승선생과윤상원열사를배출한인 재의 고장이며, 이중에서도 죽산박씨 후손들의 충의정신이 빛나는 마을이기 도하다. 죽산박씨 후손이 임곡에 정착하게 된 것은 1580년 경으로 문정공의 손자인 휘한곤의면주(面註)에‘함평현감재임 시에 경향을 왕래하던 중 나주 박산이 좋은 터임을 알고 장자 배근을 주거케 하고 차자 양근은 원임곡에 거주케 하 였다.’라는 기록이 전해지고, 가학정을 비롯한종택,호남창의록등이뒷받침해 주고있다. 뱚죽산박씨문정공파임곡문중약사 문정공 유품(포도연, 상하홀, 앵무배).포도연은 유명한 중 국의 단계석으로 만들었다. 크기가 약20㎠×15㎠로서 투 껑과 본체로 이루어졌고 뚜껑에는 포도의 모양이 양각되 어 있다. 이 벼루는 급할 때 입김에 의해서도 묵즙이 생성 되어 축문 한 장을 쓸 수도 있다고 하나 이는 벼루의 뛰어 난 기능을말하는듯하다. 뱚임곡입향과세거지변천 박형엽회장이 잘가꾸어진종중묘원을설명하고있다. 뱚주요유적 가학정. 2012년재건된가학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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