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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2월28일 목요일 2 (제146호) 기 획 우선 다음 기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아래 기록은 927년 11 월김부의행위를밝히고있다. 전왕의시체를서쪽대청에모시고, 여러신하들과 함께 통곡하였다. 시 호를올려경애라하고,남산해목령에장사지냈다. (븮三國史記븯신라본기1 2경순왕원년11월조) 그 해 11월에 신라 서울로 쳐들어갔다. 중략 … 왕위(王位)에 오르자 전 왕(前王)의 시체를 서당(西堂)에 안치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했다. 이 때우리태조(太祖)는사신(使臣)을보내서조상했다.(븮三國遺事븯 권2기 이2김부대왕조) 김부는 경애왕의 주검을 서당(西堂)에 배치한 채 군신과 더 불어 통곡했다고 한다. 김부는 다 알다시피 견훤의 손에 의해 경애왕뒤를이어권지국사에옹립된자다. 당시 견훤은 궁궐 내에 있었고 또 그 기간은 보름이었음이 아래 최은함과 관련한 기록에서 확인된다. 보름 안에 김부가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이는 경애왕의 장례조 차 치르기 이전, 그가 이미 차기 계위자로 굳어졌고 즉위했음 을 보인다. 궐위 闕位 기간이 없는 신속한 왕위계승은 사전 각 본이 짜여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또 견훤에 의해 옹립 된 그가 견훤을 눈앞에 두고, 견훤에게 죽임당한 왕을 위해 통 곡한모순은견훤과의사전협의없인불가능하다. 견훤은 또한 군사들을 풀어 공공의 재물이나 사사로운 재물 을 거의 모두 약탈하고, 대궐에 들어 앉아 측근들로 하여금 왕 을찾게하였다.(븮三國史記븯신라본기12경애왕4년11월조) 견훤은군사를놓아공사간의재물을약탈하고왕궁에들어가거처했다. (븮三國遺事븯권2기이2김부대왕조) 신라 말년 천성(天成) 연간(926∼929)에 정보(正甫) 최은함(崔殷함)이 나이 많도록아들이 없었다.(븣중략븣)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이 서 울을 침범해 와서 성 안이 크게 어지러웠다. 은함은 그 아이를 안고 이 절 에와서말하였다.뷺이웃 군사가갑자기쳐들어와서일이 급합니다.(중략) 우리 부 자(父子)가 다시 만 나게 해 주십시오.뷻 슬피 세 번 울 면서 세 번 아뢰 고 난 후에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관음상(觀音像)의 예좌(猊座) 밑에 감추 고못 잊어하면서떠나갔다. 반달을지나적병이 물러간뒤에와서아이를 찾았다.(븮三國遺事븯권3 삼소관음중생사) 견훤은 경애왕을 누구보다 싫어하여 죽인 인물이다.또 경애 왕의 주검이 안치됐다는 서당(西堂)은 궁궐의 부속 건물로서 서쪽에 있던 전각이었을 것이다.당시 견훤은 왕궁에 거처했음 이 확인된다. 서당은 견훤이 거처한 궁궐의 부속 건물로서 동 일 권역이다.그렇다면 김부는 견훤의 눈앞에서 경애왕을 조상 (弔喪)했다는 것이 된다.견훤이 죽인 경애왕을 위해 조상했다 는 김부는 아래에서 확인되듯, 다른 한편으로 견훤을 아비라 불렀다. 지존이 신 왕으로 서 몸 을 굽혀 족하 에게 아들子 이 라고 하 게 하 였으니, (븮왕건이 견훤에게보낸편지븯中)(븮三國史記븯권50열전10견훤조) 신라왕에 걸맞지 않을 다중 인격에 가까운 김부의 이런 면모 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과연 이러한 해괴한 모순이 실행에 옮겨질수있었던까닭과목적은무엇이었을까. 김부가 견훤과 결탁하여 포석정 사건을 실행했다면,그 혐의 를 벗기 위한 모종의 계획된 연출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런 맥 락에서 보면 정적 경애왕의 주검을 앞에 두고 김부가 군신들을 대동한 채 눈물을 흘린 일련의 행위는 자신의 치부를 은폐하기 위한, ‘악어의 눈물’이었던 셈이다.김부의 행위는 교묘한 선전 행위의 일단으로서, 일찍이 그의 아비 효종이 색공의 치부를 감추기위해지은을구휼한것과같은맥락에서이해된다. 김부의 이런 전력이야말로 뒷날 오천의 백성을 죽이면서까 지 왕건에게 귀부한 그의 행적을 설명할 근거가 된다.935년 김 부의 귀부에 반대하며 농성했던 영천 오천의 백성들은 왕건이 숨겨둔 군사에게 살해당했다. 백성의 살육을 보면서도 왕건에 게귀부하기위한김부의행렬은멈추지않았다. 장군곡藏軍谷: 군동쪽8里에있다.속담에전하기를, 고려太祖가나라 를통합할때오천吾川 사람들이 불복하므로 이곳에병사를숨겨두었다 가이를격파했다고한다.(븮신증동국여지승람븯제25권영천군) 김부는 역적 견훤의 후광을 등에 업고 신라의 임시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렇다면 서라벌 월성에서 보름 간 거처한 견훤과 김부는 어느 정도 밀접한 관계에 있었을까. 이를 잘 보여주는 자료가다음에있다. 지존이 신 왕으로 서 몸 을 굽혀 족하 에게 아들子 이 라고 하 게 하 였으니, (븮왕건이 견훤에게보낸편지븯中)(븮三國史記븯권50열전10견훤조) 군신의 질서가 없어지자 상하가 모두 근심에 잠겼으니, 임금을 보좌할 진정한 충신이 아니면 어찌 다시 사직을 편안히 하겠는가라고 생각하였 다.(븮왕건이 견훤에게보낸편지븯中)(븮三國史記븯권50열전10견훤조) 위 지존은 김부와 경애왕 중 누구일까. 이어진 구절에서 상 하가 다시 사직 안정에 부심했다는 점에서 위 지존은 김부가 확실하다. 위에 따르면 김부는 견훤을 아비로 불렀다고 한다. 김부의 사망은 978년이다(븮高麗史븯 卷2 世家2 景宗 3년조). 생 물학적 기준으로 볼 때 927년 당시 김부는 많아도 25세~30세 사이였다. 견훤의 당시 나이는 다음 사료를 통해 확인이 가능 하다. 견훤의 나이가 태조보다 10년 위라 하여 그를 높여 상보라고 불렀으며 하략…(븮三國史記븯권50열전10견훤조) 성(姓)은 왕씨(王氏)요 위는 건(建)이며 자字는 약천(若天)이다. 송악군 인(松獄君人)으로서 세조의 장자며 모는 위숙왕후(威肅王后) 한씨(韓氏) 이다. 당 건부(乾符) 4년 정유(丁酉) 정월(正月) 병술(丙戌)에 송악(松獄)의 남저(南第)에서탄생하니(븮고려사븯권1세가1태조) 왕건이877년출생이니견훤은867년생이다.927년당시견훤 은 예순의 나이였음이 확인된다.김부와 견훤 간의 의제적인 부 자 관계는 내응의 구체적 증거다. 논자들의 지적대로, 김부와 견훤은 내응의 공모자였고, 동시에 30년 터울의 반란세력이었 다.신라왕실의입자에서보면,그들은서로부자(父子)라칭하 면서각자의이익을도모한역신(逆臣)의 전형인 셈이 된다. 포석정 사건의 배후 음모자를 밝힐 또 다른 증거는 옥대라고 생각된다. 우선 옥대에 대한 설명부터 할 필요가 있다. 신라 역 사에서 유명한 옥대는 두 종류가 존재한다. 그에 관련된 기록 을뽑아보면다음과같다. 진평왕이 즉위한 원년(元年) 천사(天使)가 대궐 뜰에 내려와 왕에게 말 한다. 뷺상제(上帝)께서내게명하여이 옥대(玉帶)를전하라고하셨습니 다.뷻왕이 꿇어앉아친히이것을받으니하늘로 올라갔다.교사(郊社)나종 묘(宗廟)의큰제사때에는언제나이것을띠었다. 그 후에고려왕(高麗王) 이 신라를 치려하여 말했다. 뷺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서 침범하지 못한다고 하니 그게 무엇 무엇이냐.뷻 좌우가 대답한다. 뷺황룡사(皇龍寺) 의장육존상(丈六尊像)이 그 첫째요, 그 절에있는구층탑(九層塔)이 그 둘 째요, 진평왕(眞平王)의 천사옥대(天賜玉帶)가 그 셋째입니다.뷻 이 말을 듣고신라를공격할계획을중지하고찬(讚)하여말했다. 구름밖에하늘이 주신 긴 옥대(玉帶)는, 임금의 곤룡포(袞龍袍)에 알맞게 둘려 있네.(븮三國 遺事븯권1기이 천사옥대) 이듬해임오(壬午) 5월초하루(다른책에는천수(天授)원년이라했으나 잘못)에 해관(海官) 파진찬(波珍飡) 박숙청(朴夙淸)이 아뢰었다. 뷺동해 속 에 있는 작은 산 하 나가 물 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는데 물 결에 따 라 이 리 저리 왔다 갔다 합니다.뷻 왕이 이상히 여겨 일관(日官) 김춘질(金春質; 혹 은 춘일春日)을 명하여 점을 치게 했다. 뷺대왕의 아버님께서 지금 바다의 용(龍)이 되어삼한(三韓)을진호(鎭護)하고계십니다.또김유신공(金庾信 公)도 33천(三三天)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 세계에 내려와 대신(大臣)이 되었습니다. 이 두 성인(聖人)이 덕(德)을 함께 하여 이 성을 지킬 보물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만일 폐하께서 바닷가로 나가시면 반드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얻으실 것입니다.뷻 왕은 기뻐하여 그달 7일에 이견대 (利見臺)로 나가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살펴보도록 했다. 산 모양은 마치 거북의 머리처럼 생겼는데 산 위에 한 개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둘이었다가밤에는합해서하나가되었다. 사자(使者)가와서사실 대로 아뢰었다. 왕은감은사에서 묵는데 이튿날 점심 때 보니대나무가 합 쳐져서 하나가 되는데, 천지(天地)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치며 7일 동 안이나어두웠다. 그 달 16일에가니용 한 마리가검은옥대(玉帶)를받들 어 바쳤다. 왕은 용을 맞아 함께 앉아서 묻는다. 뷺이 산이 대나무와 함께 혹은 갈라지고 혹은 합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뷻 용이 대답한다. 뷺비유 해말씀드리자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물건은합쳐야소리가나는것이오니, 성 왕(聖王)께서는소리로 천하를다스리실징조입니다. 왕께서는이 대나무 를가지고피리를만들어부시면온 천하가화평해질것입니다. 이제대왕 의아버님께서는바닷속의큰용이 되셨고유신은다시천신(天神)이 되어 두성인이 마음을같이 하여이런값으로 칠수없는큰보물을보내시어나 로 하여금바치게한 것입니다.뷻 왕은놀라고기뻐하여오색(五色) 비단과 금(金)과 옥(玉)을주고는사자(使者)를시켜 대나무를베어가지고바다에 서나왔는데그때산과 용은갑자기모양을감추고보이지않았다.왕이 감 은사에서 묵고 17일에 지림사(祗林寺)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 고점심을먹었다. 태자(太子) 이공(理恭; 즉효소대왕孝昭大王)이 대궐을 지키고있다가이 소식을듣고말을달려와서하례하고는천천히살펴보고 아뢰었다. 뷺이 옥대(玉帶)의여러쪽은모두진짜용입니다.뷻 왕이 말한다. 뷺네가어찌그것을아느냐.뷻뷺이 쪽하나를떼어물에넣어보십시오.뷻이에 옥대의 왼편 둘째 쪽을 떼어서 시냇물에 넣으니 금시에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그 땅은 이내 못이 되었으니그 못을용연(龍淵)이라고불렀다. (븮三國遺事븯권2기이 만파식적) 진평왕이 진지왕을 거세하고 즉위한 직후 민심 수습을 위해 만든 별칭 천사옥대가 있는가하면, 또 신문왕이 즉위한 직후 문무왕과 김유신에게서 받았다고 하는 옥대도 있다. 둘 다 지 배권의 확립을 위해 고안된 것이다. 즉 새로 즉위한 신왕들의 정치적목적에서제작된것이었다. 그 중 김부와 관련하여 관심을 끄는 옥대는 천사옥대이다. 일연은 븮삼국유사븯를 집필하며 천사옥대와 관련, 그 첫머리에 김부와의관련을분명히밝히고있다. 천사옥대(天賜玉帶;청진4년정유(937)5월에정승(正承)김부(金傅)가 금으로 새기고 옥으로 장식한 허리띠 하나를 바쳤다. 길이는 10위(圍)요. 전과가62개나되었다.이것을진평왕의천사대(天賜帶)라고한다.고려태 조는이것을받아내고(內庫)에간직했다)(븮三國遺事븯권1기이 천사옥대) 이 천사옥대는 일찍이 고(구)려에까지 알려졌다. 또 고(구) 려의 남침을 막는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옥대 는 신라 3보의 하나, 또는 호국의 상징으로 알려졌다. 그런 만 큼 안팎의 관심을 끈 성물(聖物)임이 분명하다. 왕건도 이에 대해선남다른관심을표명했음이아래에서확인된다. 김율이 왕에게 “고려왕이 저에게 묻기를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 으니, 소위장륙불상과 9층탑과 성대(聖帶)가그것이라고들었다. 불상과 탑은 지금도 있는 줄 알거니와 성대가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구나.’하므 로,제가대답을할수없었습니다.”라고말하였다.왕이 이 말을듣고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성대란 어떠한 보물인가?” 그러나 이를 아는 자가 없었다. 이 때 황룡사에 중이 있었는데 나이 90세가 넘었다. 그가 말하였 다. “그 보배로운 허리띠는 진평대왕이 사용하던 것인데, 여러 대를 전해 내려오면서남쪽 창고에보관되어있다고들은 적이 있습니다.” 왕이 즉시 창고를 열어 찾게 하 였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 날 을 정하 여 치성을 드리고 제사를 지낸 뒤에야 그것이 발견되었다. 그 띠는 금과 옥으로 장식되었고 매우길어서보통사람은맬수가없었다.(븮三國史記븯 권12신라본기12경명 왕 5년 정월조) 20年 5月 癸丑에 金傅가 鐫金安玉排方腰帶를 바쳤는데 길이가 열 뼘이 요六十二꾕 로 되어있었다. 新羅가寶物로 秘藏하여오기를거의400年이 나되었으며,세상에서聖帝帶라傳稱하던것이다.王이이를받아元尹戈 萱에게 命하여 物藏에 保藏하게 하였다. 처음에 新羅의 使臣 金律이 왔을 때 王이 묻기를 뷺들으니 新羅에 三大 寶物이 있다는데 丈六金像과 九層塔 과聖帝帶라고하더라.三寶가없어지지않으면나라도亡하지않는다하 니 塔像은 아직 남아있거니와 聖帝가 지금도 아직 있느냐뷻하니 金律이 對 答하기를뷺臣은일찍이 聖帶를들어본 적이 없사옵니다.뷻라고하였다. 王 이 웃으며 말하기를 뷺卿은 貴臣이어늘 어찌하여 나라의 大寶를 모른단 말인가뷻라고 하니 律이 부끄러이 여기고 돌아와 그의 王에게 아뢰었다 (경명)왕이 群臣에게 下問하였으나 能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 때 皇龍 寺에나이 90이 넘은중이 있어말하기를뷺내가듣자오니聖帶는眞平大 王께서 着用하시던 것이라 하오며 歷代로 이를 傳하여 南庫에 保藏하여 두었다 하옵니다.뷻라고 하거늘 王이 王이 드디어 南庫를 열어보매 風雨가 갑자기 일어나고 대낮이 어두컴컴하여 볼 수가 없는지라 이에 날을 擇하 여 齋祭를 지낸 후에야 이를 볼 수 있었다. 國人은 眞平王이 聖骨의 王이 므로일컬어聖帝帶라하였다.(븮高麗史븯卷2世家2太祖220년5월) 위의 기록은 921년 김율이 왕건과 있었던 일을 신라왕에게 보고하는 대목이다. 김율이 왕건을 만난 것은 920년 10월의 일 로서, 견훤이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거쳐 진례로 쳐들 어왔을 때다. 당시 신라의 경명왕은 김율을 왕건에게 보내 구 원을 요청했었다.왕건은 이 때 청병사請兵使 김율에게 천사옥 대,이른바성제대혹은성대에관해강한관심을표한것이다. 경명왕이 천사옥대의 수소문에 나선 것은 이듬해 정월인데 아무도 소재를 밝히는 이가 없어 애를 태우던 중 황룡사 노승 의 제보로 옥대가 궁궐 남쪽 창고에 보관돼 있음을 알게 되었 다.한데 즉시 창고를 열어 찾게 했으나 발견할 수 없었고 날을 정하고 치성을 드린 후에야 옥대가 발견됐다고 한다. 이 상황 을더자세히부연한것이븮고려사븯의기록이다.창고를열자풍 우가 갑자기 일어나고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하여 볼 수가 없었 다. 이는 옥대를 박씨 왕권에게 양도하길 거부한 집단 반발을 뜻한 은유라 생각된다. 지배층 내의 반발을 가장 먼저 지적한 이는임용한이다. 이야기가 부드럽게 각색되어 있지만 그 부분을 제외하고 읽으면 왕건 은 신라에게 항복하려면 그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것이다. 경순왕과 신 라의 대신들이 그 소재를 몰랐다고 하는데, 왕건의 말마따나 그것은 거짓 말이다. 중략…왕이 남고에있다는것을확인하고도풍우가일어볼 수없 었다는것은지배층내부에서반발이 극심했다는것을암시한다. (임용한, 븮전쟁과 역사븯삼국편,혜안,2002,p.361) 물론 당시 신라왕이 경명왕이 아닌, 김부였던 것으로 잘못 해석한오류는보인다.아마도이는위옥대에관한븮고려사븯기 록이 태조 20년조에 실려 있는 까닭에 당시 신라왕을 연도로만 대응시켜김부로오해한결과였다. 아무튼 경명왕이 옥대를 찾는 과정에서,또 소재를 파악하고 나서도 적잖은 어려움에 직면했었다는 것은 진평왕과의 혈연 적 유대를 내세운 김씨 세력들의 강고한 저항과 반발을 보여준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실 경명왕대엔 허다한 반발과 저항사례가발견되고있다. 제54대 경명왕(景明王) 때인 정명(貞明) 5년 무인(戊寅; 918)에 사천왕 사(四天王寺) 벽화(壁畵) 속의 개가 울었다. 이 때문에 3일 동안 불경을 외 어 이를 물리쳤으나 반일(半日)이 지나자 그 개가 또 울었다. 7년 경진(庚 辰; 920) 2월에는 황룡사탑(皇龍寺塔) 그림자가 금모사지(今毛舍知)의 집 뜰 안에 한 달 동안이나 거꾸로 서서 비쳐 보였다. 또 10월에 사천왕사(四 天王寺)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으며, 벽화 속의 개가 뜰로 달려나왔다가 다시 벽의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이상 븮삼국유사븯권2 기이 경명왕) 2년봄 2월, 일길찬현승이 모반하다가처형되었다. (븮三國史記븯 신 라본기12경명왕2년2월조) 이들 불안을 낳은 소요의 배후에는 왕위를 빼앗긴 김씨 세 력,예컨대 효종 일가 등이 잠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에 대해서는신호철의지적이있다. 경명왕재위만 7년동안에도이러한 반발세력의도전은계속된것이 아 닌가 한다. 경명왕은 즉위하자 그의 동생인 위응(뒤의 경애왕)을 상대등에 임명함으로써김씨왕족의반발에대비케한 것으로 보인다.(신호철,븮후백 제견훤정권연구븯,일조각,1996,p.113) 물론 위 논자는 김씨 세력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아니면 어느 일문(一門)인지 밝히진 않았다.그렇다면 모든 김씨 세력 이경명왕에게저항했던것일까. 경명왕의 모계는 헌강왕 계통이다.또 여동생은 효공왕의 정 비이다. 이 점에서 모든 김씨가 저항했다는 것은 당시 사실과 거리가먼,편의적인발상이다. 이를 테면 김씨 세력 내에서도 구체적인 세력 획정이 다시 필요하다. 김씨 세력 가운데서도 왕권에 가장 적대적 태도를 취했을 세력의 설정이 필요하다. 이 경우 효종과 김부 일가가 거론될수밖에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견훤과 관련한 문제인데 옥대에 대한 왕 건의 발언과 관심, 신라 내 옥대 수색 과정에서의 드러난 혼미 한 사단 등은 견훤에게도 널리 알려졌을 가능성은 높다(당시 후삼국간 치밀한 정보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이런 맥락 에서 견훤이 서라벌 왕도를 침입했다면, 가장 먼저 옥대에 관 심을 두진 않았을까. 신라 3보의 하나이자 왕건이 가장 탐내는 대상이 옥대였기에,견훤은 이를 선점하려 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이간다. 견훤은내심으로 나라를빼앗을생각을품고있으면서태조가먼저이에 성공하지않을까 두려워하였다. 이에따라그는군사를이끌고신라의 서 울에 들어가서 횡포한 행위를 하였던 것이다.(븮三國史記븯 권50 열전10 견 훤조) 견훤은 항상 왕건을 의식해 행동했다.왕건을 견제하기 위해 견훤이 선공을 했다는 구절에서 왕건이 눈독을 들이는 옥대를 견훤이 선점하려 시도했을 것은 무리한 상정이 아니다.견훤은 왕도에들어서자마자진보를몽땅싹쓸이한것이확인된다. 견훤은왕의아우효렴과 재상영경을포로로 잡고, 또한 국고에있는재 물과 귀중한 보배와군기, 자녀와백공가운데솜씨있는자를빼앗아데리 고돌아갔다.(븮三國史記븯권50열전10견훤조) 足下는 임금을 죽이고 궁궐을 불살랐으며, 재상과 관리들을 모조리 살 육하고, 사민士民을학살하였으며, 귀부인을잡아수레에같이 태우고, 진 귀한 보물을 빼앗아 짐으로 실어 갔다. (븮三國史記븯권50 열전10 견훤조 中 〈왕건이 견훤에게보낸편지〉) 그렇다면 궁궐 남쪽 창고에 보관된 옥대는 어떻게 되었을까. 921년 정월, 옥대를 둘러싼 사단에서 왕명에 거칠게 저항할 만 큼 강고했던 세력들의 존재를 앞서 살폈다.이를 유념한다면,6 년 뒤인 927년 11월,견훤이 왕도를 침습했을 당시 옥대의 행방 은궁금한일이아닐수없다. 위를 보면 견훤은 왕도를 장악한 다음 국고의 모든 진보珍寶 를 약탈했고, 보름여 궁궐에 거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견훤은 참언이나세간의믿음을굉장히중시한인물이었다. 견훤은 참서(讖書)에 “절영도(絶影島)의 명마(名馬)가 이르면 백제가 망 하리라.”고 하였다는 말을 듣고 이에 이르러 후회하고 사람을 시켜 그 말 을 돌려줄 것을 청하니 왕이 웃으며 이를 허락하였다. (븮고려사븯 권1세가 태조9년4월조) 위에서 말한 절영도의 명마는 총마라 불린 말이었다. 924년 7월 견훤은 조물성(문소)에서 왕건과 화의를 체결한 직후 이 총마를화호의징표로보냈었다. 그는태조에게총마(聰馬)를바치더니3년겨울 10월에는기병(騎兵)3천 을거느리고조물성(曹物城;지금의어딘지자세히알 수없음)까지오자태 조(太祖)도 역시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와서 싸웠으나 견훤의 군사가 날래 어승부(勝負)를결단할수가없었다.(븮삼국유사븯권2기이 후백제견훤) 견훤이 사자(使者)를 보내와 절영도(絶影島븡부산광역시 영도구(影島 區))의옥색말 한 필을바쳤다.(븮고려사븯권1세가태조7년8월조) 총마의 반환 요청에는 백제의 흥망과 연결된다는 참언이 작 용했다.견훤이참언을중시했음을보여주는일단이다. 옥대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천명과 결부되고 있다.진평왕이 53년 간 집권한 것과 왕의 집권 초기 천사옥대를 내세운 것은 결코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견훤은 반드시 총마의 반 환처럼, 옥대 확보에 사활을 걸었을 확률이 높다. 견훤이 신라 의 진보를 남김없이 약탈했다는 기록, 옥대가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는 기록 등을 조합할 때, 결국 옥대는 견훤의 수중에 들 어갔어야한다. 앞서 얘기한 대로 신라 3보는 두 곳에 보관돼 있다. 황룡사 경내(황룡사 9층탑, 장륙불상)와, 궁궐의 남고(천사옥대)다. 신라 왕도를 침입한 이후 견훤은 특히 궁궐에 머물렀다.위 3보 중 견훤이 가장 접근하기 쉬웠던 것이 천사옥대다.신라 3보 중 가장 가져가기 쉽고, 천명을 상징하는 옥대가 견훤의 관심 밖 에있었다고볼하등의여지는없다. 한데 견훤이 모든 진보를 남김없이 약탈했다는 기록은 있어 도 옥대에 관한 언급은 없다. 옥대는 과연 누구의 손에 들어간 것일까. 그에 관한 단서는 포석정 사건이 일어난 지 정확히 10 년뒤밝혀지고있다. 丁酉20年夏5月癸丑에金傅가鐫金安玉排方腰帶를바쳤는데길이가열 뼘이요六十二꾕 로되어있었다 新羅가寶物로秘藏하여오기를거의400年 이나되었으며,세상에서聖帝帶라傳稱하던것이다 (븮高麗史븯卷2世家2太 祖220년5월) 견훤은 신라의 진보를 약탈했다. 그런 만큼 일급의 진보珍寶 옥대는그의수중에있었어야한다.한데,위의내용을보면김부 의손아귀에있던옥대가937년왕건에게헌정되었다고한다. 김부가 왕건에게 귀부할 때 갖가지 재보를 바쳤을 것이건만 기록에선 아무 언급조차 없었다. 한데 유독 옥대에 대해서만 자세히특필하고있음은그만큼옥대의위상을잘보여준다. 여기서 커다란 의문이 발생한다. 견훤은 궁궐 안 진보를 모 두 약탈했었다고 기록은 밝혔다.그런데 어떻게 옥대가 김부의 수중에 있은 것일까.견훤이 천명을 상징하는 옥대만은 김부에 게 양도한 것일까. 앞서의 자료를 보면 견훤은 궁궐을 불사르 고 대신을 학살하고 사민을 도륙하며 궁녀는 잡아 수레에 싣고 보물은 빼앗아 짐으로 실어갔다. 견훤의 이런 행위로 봐서 옥 대를김부에게양도했다고보긴어렵다. 그렇다면 해답은 김부가 927년 11월 경애왕의 지배권이 붕 괴된 시점에 옥대를 빼돌렸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궁궐 내 남고南庫의 옥대는 경명왕대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결과, 927년 11월의 혼란이 아니면 김부가 쉽게 접근할 수 없다. 또 그가 견훤의 침습을 미리 알지 못했다면, 노략이 자행되기 이 전옥대를감출수도없었을것이다. 김부가 견훤과 결탁한 정황은 이 대목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김부는 왜 왕위 뿐 아니라 옥대까지 욕심을 낸 것일까. 이 점은 견훤의행위를보면뚜렷이짐작이간다. 견훤은왕을협박하여자살하게하고, 중략… 그의부하들로 하여금비 첩들을 강간하게 하였다. 그리고 왕의 아우뻘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임시 로 국사를맡게하였다. 이 사람이 경순왕이다.(븮三國史記븯권12신라본기1 2경애왕4년조) 김부의 정권은 견훤의 괴뢰정부로 안팎에 인식될 공산이 컸 다. 김부의 칭호가 ‘권지국사’인 점이 특히 그렇다. ‘권지’란 임 시로 권한을 위탁받아 처리하는 존재를 뜻한다.이점에서 김부 는 자신의 집권이 험난할지 모른다는 예상을 했을 것이고, 그 럴수록 옥대의 존재에 집착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 결과 김 부는 견훤과 내응했던 한편 옥대를 미리 빼돌려 천명의 상징을 확보하려했다고짐작된다. 옥대에 대한 김부의 집착은 왕건에게 귀부한 순간까지, 또 그 이후에도 계속된 것이 입증된다.왜냐하면 김부가 왕건에게 귀부한 것은 935년 12월 1일이다. 하지만, 김부가 왕건에게 옥 대를 바친 것은 937년 5월 2일로 밝혀진다. 귀부 이후 17개월 동안 김부는 옥대를 개인적으로 소장하였다는 말이 된다.김부 가 옥대에 기울인 관심과 집착을 위 시간은 그대로 입증해 주 고있는셈이다. 김부가 이처럼 옥대를 두고 오랜 기간 고심했으며 마지못해 가장 나중 왕건에게 줄 정도였다면 927년 포석정 사건 당시에 도옥대에대한김부의관심은마찬가지였다고판단된다. 경애왕(신라55대왕.재위924~927) 뱚역사비정(26) 뱛Ⅰ.김부와견훤의이상한행동들 박 순 교 뱛Ⅲ. 천 사 옥 대 뱛 Ⅳ.김부와옥대 뱚▶다음호에계속 뱛Ⅱ.김부와견훤의유대 목 차 Ⅰ.김부와견훤의이상한행동들 Ⅱ.김부와견훤의유대 Ⅲ.천사옥대 Ⅳ.김부와옥대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