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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양재중건 기 (團陽寶重建記) 밀성박씨(密城朴!f;)는 신라(新羅)와 고려 (高麗) 이래로 온 나란를 통 털어 드라난 성씨(姓民)가 되었다. 고려 말 조선 초(麗末購初)에 이르러 송은선생 (松隱先生) 충숙공(忠、關公) 같은 이는 문장(文章)과 풍절(風節)로서 한 시대 의 본보기가 되었는데, 그 아들인 우당(憂堂)- 인당(忍堂)- 아당(맴堂)- 졸당 (쐐堂) 네 형제가 마지 지란(호蘭)과 옥수(玉樹)처럼 광채가 뒤섞이어 서로 바지었다. 이로부터 오백년(五百年)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그 자손의 수(數) 가 번성하여 거의 한 지방에 두루 퍼지었다. 우성(佑成)은 밀성(密城)의 향인(獅Á)으로서 교유(交遊)하는 사람으로 박씨 (朴民)가 많았는데 갑신년(甲申: 2004) 겨울에 졸당공파대종화장(쐐堂公派大 宗會長) 종현(鍾現)과 그 종인(宗Á) 등줄(登때)이 고양(高陽)의 우거(萬탬)로 우성(佑成)을 찾아오}서 말하기를 “우리 졸당선조(샘堂先祖)의 산소가 합천(俠 川)의 몽기(鳳基)에 았어, 해마다 서리가 내리면 원근(遠近)의 자손들이 모두 와서 향화(香火)를 받드는데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산소 아래에 있는 재 살(顆室)을 봉양재(鳳陽寶)라 하는데. 실지로 자손들이 재사를 지내고 성묘 ( /:힘꿇)를 할 때 제숙(齊宿)의 장소로 삼고 있습니다. 왕년에 중재(重驚) 심꽁­ (金公) 황(院)이 지은 가문을 그 헌마(幹閒)에 달았으나, 세월이 또한 오래되 어 재사(뿜舍)가 허물어지 무너짐에, 종현이 그 의논을 주도하고 여라 일가 뜯이 뜻을 모아 건물을 철거했습니다. 그 옛터를 개척하여 넓히고 그 재목을 새로 구입하여 경영(經營)하고 축조(藥造)하기를 한해가 걸렸는데 새 건물이 날아갈 듯 산뜻합니다. 이에 우리 선생익 글을 얻어 그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그 와관(外觀)을 꾸미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연방실기(聯芳實記)j 라는 한 잭자를 내어 보이면서 말하기를 “설기(實記)는 상·하(上下) 두 편이 있는데 그 하편(下篇)은 우리 졸당꽁악 - 시문(詩文) 몇 편과 그 부록(附錄) 문자로 되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우성 (佑成)이 그 대강익 줄거리를 훌어보고 돌려주며 이르기를 “전에도 봉양(鳳 陽)이라 한 것은 봉산(鳳山)의 재실이 별도로 있어서이고, 삼기(三破)의 대평 (大平)에 있는 것 또한 졸당공 묘소의 재실에 소속된 것이다. 곽면우(郭i免字) 징군(徵君: 徵士의 존칭)익 기문(記文)에 상션l허 그 경위(經繹)가 서술되어 졸당공의 덕익(德、嚴)의 추술(追述)에 정성을 다하였고, 중재(重寶) 김공(金公) 악 기문에도 또한 그 스승의 말씀을 더욱 보완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선조의 아름다움을 기라고 찬양함에 거의 유감이 없는데, 다시 무엇으로 얽어 중언 부언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 37- 屬‘陽寶重建듬己 密城之朴 自羅麗以來 寫通國著姓 至麗末蘇初 有若松隱、先生많、 뽑公文章風節 嚴表一代 而其子憂忍、Q亞쐐四堂 如호蘭玉樹 交輝 而互映 自技以降 歷五百載 其麗是審 幾遍-省、 佑成 以密城獅 人 所與交 多朴a 歲甲申장 쐐堂公派大宗會長鍾現 與其宗人 登면 끓佑成3二高陽萬盧 日我쐐堂先祖衣題之藏 在俠川之鳳基 每歲짧落 遠近子孫 I或來奉香火 推護 瑩下有驚日鳳陽 實폈子 孫흉흉補齊宿之所 往年 重蘭金公뽑 記其植훗 歲且久 驚舍類rc 鍾現主議 諸宗合意 澈而去之 紀其址而廣之 購其材而新之 營 集閔歲 陳字쫓즐然훗 tt者 欲得홈子之文 以識其實而f多其觀 因 出示聯芳實記-ffiJ 日實記有上下兩編 其下編 좋흠돼할·公낀詩 文幾篇及其附錄文字m 佑成閔I視其大魔而復之 日前乎鳳陽而딩Ij 춰 rm山之顆 在三U많大平 亦屬샘堂公之幕爾 郭佈字徵君之記 5¥ 왔其經韓-而追述f出堂公之德、構 備至 重濟金公之記 又因其師Zζ 꾀띠t曾益之 其於稱、揚先徵 캠無遺應찾 又何架聲之寫 兩人슴節 而對 B짧붕또重建훗 宜5]IJ有記 子無l電麗 因略述其間架日齊凡五 間 中寫堂二間 而東西寫室 東)間而西二間也 짧之前 딩IJ~R東 西濟各三間 東驚扁日追思、 西驚扁日情話 就其南X作門舍三間 扁日來慶 짧規模租備 所謂혐完웨美者也 佑成 짧推今 日 {삼尙大; 變 唯物是뿔 古之賢聖 所以維持人紀而技樹世敎者 學不免폼廢 有識之士 끓妹憂數 乃今朴f(J-門 有見於報本追遠之道 슴心넓 力 思所以뿔祖而敎宗 以作-方之模階 何其露、랐 흡人 有鳳嗚 朝陽之語 今技鳳陽之扁 其或寫來世之瑞徵也耶 是寫記 歲ζ西二千五年大暑節 大韓民國學術院會員成均館大學校名뿔敎授退홉學없f究院長 民族文化推進會長文學博士廳)‘|‘|李佑成 記 -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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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양재 중건기(鳳陽齋 重建記) 밀성박씨(密城朴氏)는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이래로 온 나라를 통 털어 드러난 성씨(姓氏)가 되었다. 고려 말 조선 초(麗末鮮初)에 이르러 송은선생(松隱先生) 충숙공(忠肅公) 같은 이는 문장(文章)과 풍절(風節)로서 한 시대의 본보기가 되었는데, 그 아들인 우당(憂堂), 인당(忍堂), 아당(啞堂), 졸당(拙堂) 네 형제가 마치 지란(芝蘭)과 옥수(玉樹)처럼 광채가 뒤섞이어 서로 비치었다. 이로부터 오백년(五百年)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그 자손의 수(數)가 번성하여 거의 한 지방에 두루 퍼지었다. 우성(佑成)은 밀성(密城)의 향인(鄕人)으로서 교유(交遊)하는 사람으로 박씨(朴氏)가 많았는데, 갑신년(甲申: 2004) 겨울에 졸당공파대종회장(拙堂公派大宗會長) 종현(鍾現)과 그 종인(宗人) 등줄(登茁)이 고양(高陽)의 우거(寓居)로 우성(佑成)을 찾아와서 말하기를 "우리 졸당선조(拙堂先祖)의 산소가 합천(陜川)의 봉기(鳳基)에 있어, 해마다 서리가 내리면 원근(遠近)의 자손들이 모두 와서 향화(香火)를 받드는데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산소 아래에 있는 재실(齋室)을 봉양재(鳳陽齋)라 하는데, 실지로 자손들이 제사를 지내고 성묘(省墓)를 할 때 제숙(齊宿)의 장소로 삼고 있습니다. 왕년에 중재(重齋) 김공(金公) 황(榥)이 지은 기문을 그 헌미(幹楣)에 달았으나, 세월이 또한 오래되어 재사(齋舍)가 허물어져 무너짐에, 종현이 그 의논을 주도하고 여러 일가들이 뜻을 모아 건물을 철거했습니다. 그 옛터를 개척하여 넓히고 그 재목을 새로 구입하여 경영(經營)하고 축조(築造)하기를 한해가 걸렸는데 새 건물이 날아갈 듯 산뜻합니다. 이에 우리 선생의 글을 얻어 그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그 외관(外觀)을 꾸미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연방실기(聯芳實記)』라는 한 책자를 내어 보이면서 말하기를 "실기(實記)는 상·하(上下) 두 편이 있는데 그 하편(下篇)은 우리 졸당공의 시문(詩文) 몇 편과 그 부록(附錄) 문자로 되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우성(佑成)이 그 대강의 줄거리를 훑어보고 돌려주며 이르기를 "전에도 봉양(鳳陽)이라 한 것은 봉산(鳳山)의 재실이 별도로 있어서이고, 삼기(三岐)의 대평(大平)에 있는 것 또한 졸당공 묘소의 재실에 소속된 것이다. 곽면우(郭俛宇) 징군(徵君: 徵士의 존칭)의 기문(記文)에 상세히 그 경위(經緯)가 서술되어 졸당공의 덕의(德義)의 추술(追述)에 정성을 다하였고, 중재(重齋) 김공(金公)의 기문에도 또한 그 스승의 말씀을 더욱 보완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선조의 아름다움을 기리고 찬양함에 거의 유감이 없는데, 다시 무엇으로 얽어 중언 부언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두 사람은 말을 합쳐 대답하기를 "재실이 이미 중건(重建)되어 마땅하 별도의 기문이 있어야 하거늘, 선생이 지어주신 글이 없어서야...."라고 하였다. 때문에 그 집의 짜임새를 대략 말하건대 재실은 무릇 5간으로 가운데에 2간은 당마루(堂廳)로 하였고, 동·서(東西)로는 방(房)을 두었는데 동쪽 방이 1간이요 서쪽 방이 2간이다. 재실 앞쪽에는 별도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건립하니 각각 3간인데 동재의 편액(扁額)은 추사당(追思堂)이라 하고 서재의 편액은 정화당(情話堂)이라 하였다. 나아가 그 남쪽에는 다시 문사(門舍) 3간을 짓고 편액을 내의문(來儀門)이라 하였다. 비록 규모는 간략하게 갖추었으나 이른바 '그런대로 완전하고 아름다운(苟完苟美)' 집이 된 것이다. 우성(佑成)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오늘날 세속(世俗)의 기호(嗜好)가 크게 변하여 오로지 물질(物質)만을 숭상한다. 옛 성현(聖賢)들이 인륜(人倫)의 기강(紀網)을 유지함으로써 세상의 가르침을 확고하게 세우고자 한 일이 모두 황폐함을 면하지 못해, 지각(知覺)이 있는 인사(人士)들이 자나 깨나 걱정하고 탄식을 한다. 이에 오늘 박씨 일문(一門)이 먼 조상을 추모하여 근본(根本)을 갚는 도리(道理)를 나타냄에 있어, 마음을 합하고 힘을 모을 수 있는 것은 생각건대 조상을 높이 받들어 친족 간에 도타운 화목(和睦)을 한 때문이지, 한 지방의 본보기로서 만들었다면 어찌 그것이 아름다울 수 있었겠는가. 옛 사람들이 '아침 해 뜨는 동산에서 봉이 울었다(鳳嗚朝陽)'고 한 말을 남겼는데, 이제 이 봉양(鳳陽)의 편액이 그것으로 혹 내세(來世)의 상서로운 징조가 되지 않겠는가. 이에 기문을 삼는다. 2005년 을유(乙酉) 대서절(大暑節)에 대한민국학술원회원(大韓民國學術院會員) 성균관대학교명예교수(成均館大學校名譽敎授) 퇴계학연구원장(退溪學硏究院長) 민속문화추진회장(民族文化推進會長) 문학박사(文學博士) 여주(驪州) 이우성(李佑成) 기(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