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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 松隱先生의 아들 四兄第中 막내아들로 태어 나셨다. 伯R는 憂堂 {뿌rç는 忍堂 꿨R는 맴堂이니 모두 自身을 警폈하는 뭇이요 公을 鋼堂이라함은 곧中國宋나라때 周魔i쫓의 願鋼의 뭇을 딴것이다. 學文은 先親의 命으로 園隱鄭先生의 門下에서 修學하였고 鄭先生은 곧先親 松隱先生의 道義로 맺은 벗으로서 實狀은 우리 東돼性理學의 宗師이시다. 안으로는 父兄의 가르침 이 있고 밖으로는 師門의 化導가 있으며 또 吉治 隱 下春堂 春亨과 함게 놀았는데 吉公이 일찌기말하기를 벗이란 그 德、을 벗 하는 것어니 公은 나의스승이요 나의벗이 아니다 하였으며 春堂은 體詩에서 이르기를 忠烈한 松꽃의 집에 淵源있는 四友줬이라 하였고 李l짧隱 李韓줬 韓信짧 成獨갑이 모두 講學하여 서로둡는 벗이 였다. 孝에 있어서 어버이를 섬기되 반드시 말소리를 부드럽게 얼굴 벚은 화하 게 하여 마음을 기쁘게 해드릴려고 힘썼으며 喪을 당하여서는 哀痛함이 禮制에 지나치니 남들이 그 孝誠에 感服하였다. 벼슬은 戶薦正郞을 거쳐 更費參判에 體職되였으나 이는 先親松隱先生 의 先天後天은 父子異時라는 가르침에 따라 벼슬을 한것이다. 戶費正郞에 있을때 流章을 올려 權貴을 彈刻하다가 미웅을 사서 數年間 調居生活을 하면서도 道義를 講明하고 經書를 冊究하기를 게을리 하지 많았다. 또 調居生活中 心懷를 옳은 詩에서 “꿈에 번연허 임금님 오셨더니 깨여보 니 강기숨에 누웠네 "ê下가 되여 벼슬의 높고 낮음을 말하지 말라 타고난 天뺨이야 누군들 임 그리는 마음 없을소냐 하였더니 그때 사람들이 칭송 하여 말하기를 抱六文이 退官해있으면서 임금을 걱정하던 일에 비유 했다. 또 鎭心 橫官篇을 지어 아직 벼슬하지 못한 이는 비록 근심하나 마음은 - 21- f법堂先生 行績 公의 譯는 聽、이요 字는 쩔줬이며 姓은 朴R인데 옛 新羅王子 密城大君의 後孫으로서 貴獅은 密城이시다. 高麗朝에 들어와 譯 彦字가 待中으로 密城君이 라 世醫하여 封號를 받았 고 譯 孝닮은 中國朝廷에서 벼슬을하여 平章事를 지냈고 本國으로 돌아와 高麗朝에서 門下待中 都平議事의벼슬을 지냈으며 論號를 文寶이라 하였다. 譯 公弼은 大將軍 都檢事이고 譯 育慶은 大將軍 兵部上書이다. 譯 大和는 大將軍 更部t書인데 公에게 高祖父이시고 曾祖는 譯 幹인데 文科及第하여 員t相을 지냈고 論號는 良孝이다. 祖父는 譯가 永均인데 三宰를 지냈으며 銀山 府院君에 追封되고 論號 는 文憲이다. 考의 譯는 翊인데 高麗 悲廳朝에 文科에 올라 맨豊部待郞棄 中書令되고 鄭團隱 李故隱吉治穩등 여러 賢A들과 道義로 사귀어 性理學을 띔明하더니 高麗 國運이 다하자 l펙f業의靖節을 지켜 李朝의 太祖大王이 다섯번 불러서도 나가 지 않았고 (五徵不起) 꽉挑不옮의 節意를지커다가 세상을 떠나자 左議政에 體職하고 論號를 忠蘭이라하니 이분이 松隱先生이시다. 鎭南의 {置生들이 密陽의 德南書院 淸道의 龍!폐書院 }규城의 新漢書院에 社享 하였다. 特히 2000年 9 月 우리나라에서 朝離時代 훨畵훌가 發見된것 은 松隱、先生이 처음있는 일로 學界에 비상한 관심을 꿀었다. :9!t貞敬夫A은 星山裵~인데 릅t相 賢補의 따님이 시다. 先生은 高麗 꿨廳王 쫓E年 (西紀1353年) 6月 24日 子時에 密陽市 府北面 級浦里 짧U第에서 麗末忠많이시며 八憶의 한분이시고 柱門洞 72Ä의 한분 -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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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당선생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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