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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12월31일 월요일 7 (제144호) 기 획 인량리의 팔종가는1300년 대흥백씨 견(堅,승평부사)이 영 해지역의 토호세족인 영해박씨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 章事) 강양백(江陽伯) 박 함 공(公)의 여식과 혼인하면서 인 량리에 정착하게 되었고, 이후 영양남씨 남수(南須) 公이 백 견(白堅)의 후손인 인(璘)의 사위가 되면서 인량리에 정착하 였고, 안동권씨 권책(權策)이 단종의 외 육촌으로 친족이 멸 할 당시 13세로 죽음을 면하고 1456년 영해에 부처되었다가 단양신씨댁으로장가들면서인량에거주하게되었다. 함양박씨 휘 종산(從山)은 1480년 단양박씨 휘 성간(成侃) 의 사위가 되어 인량리에 거주하였고, 재령이씨 이애 公이 14 97년 숙부 중현이 영해부사로 부임할 때 함께 와서 진성백씨 원정의 사위가 되어 인량에 정착하였고,무안박씨 휘 지몽(之 蒙) 公이 1498년 종숙부가 영덕현령으로 부임할 때 따라와 함 경도사로 순절한 영해박씨 종문(宗文) 공의 따님과 혼인하여 인량에 거주하게 되었고, 야성정씨 정진 公이 무안박씨 입향 조(휘 지몽)의 증손녀에게 장가들어 인량리에 살게 되었으나 현재에는 후손들이 이주하고 없다. 영천이씨 이사민 公은 재 령이씨 입향조(휘 애)의 손녀와 혼인하면서 인량리에 거주하 게 되었다. 이밖에도 웅성주씨는 세거 번창하고 수안김씨, 단 양신씨는타면으로거처를옮겼다. 인량리는 선비들의 번성함이 영해부(寧海府)에서도 최고 이다. 비록 땅은 척박하여 비록 풍요롭지는 않으나 학문이 있 는인재가배출되고벼슬길에나선인사(人事)가끊이지않았 으며,풍속이순후(淳厚)하고예의와겸양(謙讓)이있어문예 (文藝)에 힘써 지금에 이른다. 주(註)- 입향 연차순으로 나열하였으 며,영해부지,영덕사료집문헌을근거로 하였음. 함양박씨 인량리 입향조의 휘(諱)는 종산(從山)으로 자는 대경(大卿), 호(號)는 원모재(遠慕齋)이고, 어모장군 부사직 (禦侮將軍 副司直)은 직함(職銜)이다. 본관은 함양(咸陽)으 로상서공휘선(尙書公諱善)은상조(上祖)이다. 그 후 4대가 연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상서(禮部尙書) 이고 휘신유(臣 찮)는문과 금자광록대부문하성사(金紫興祿 大夫 門下省事) 상주국 판삼사(上柱國 判三司)이며 호남적 (湖南賊) 이연년(李延年,고려 최우정권 시기 민란 주동자)을 토벌한 공으로 응천군(凝川君)에 봉(封)해지고 시호(諡號) 는충질(忠質)이다. 응천군의 아들 6형제 중 둘째인 휘 지빈(之彬)은 문과에 올 라 조청대부 위위윤치사(朝淸大夫 衛尉尹致仕)이고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문원공의 아들 휘 장(莊)은 문과 군부총랑 (軍簿摠郞)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이고,아들 충좌(忠佐)의 시호는 문제(文齊), 號는 치암(恥菴)으로 고려 충숙왕때 주자 학(朱子學)이 우리나라에 전파될 때 익재 이제현과 같이 상당 군 백이정 선생의 문인이 되었으며, 시문 여러 편이 동문선에 올려있고예천금곡서원과남해난곡서원에배향되었다. 치암공의 아들 휘 전(琠)은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지신사(知 申事)로 함양군(咸陽君)에 봉해졌다. 함양군의 아들 휘 문재 (文梓)는 문과 봉익대부 지밀직부사(知密直府事)이고, 그 아 들원택(元澤)은문과개성부원이며원모재공의증조가된다. 조부 구(矩)는 호는 동천(東川)이고 문과 예조참의 좌군도 총제이며 예조판서를 증직받았다. 효행으로 정려(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16호)가 내려지고 삼년거려일부도가(三年居慮 一不到家)8자를 사액받았다. 아버지(皇考) 휘 충신(忠信)은 벼슬은 사직(司直)이며 어 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인데 공(公)은 경북 성주군 오도 지(吾道旨)리에서 1449년 태어났다. 어릴 때 재주와 지혜가 남달랐으며 덕성이 인후(仁厚)하여 남과 다투지 아니하고 기쁨과 성냄을 얼굴에 나타내지 아니 하며효도와우애를근본으로하며신선(信善)을수신의병부 로 삼아 친척과 친구에게까지 돈후영흡(敦厚潁洽)하고 비복 (婢僕)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자연감화하도록 하였으며 먼산 해질때까지정자에서공부에전념하고또한농상(農桑)에힘 써 가정을 유지시켰다. 이 때 백형(휘 鐵山)이 진보현감으로 부임했을 때 따라와 책실(冊室)에 있던중 관해(관해(觀海) 차 영해에 왔다가 경관이 아름답고 인심이 후덕하며 자손들 이 살만한 곳이라 여겨 이사와서 살게 된곳이 지금의 원모재 터인 인량리 420번지이다. 대지 700여 평에 □자형(字形) 기 와집과 부속건물을 지으니 때는 성종11년(1480년)이고 이 곳 이인량 8종가(宗家)중한곳이며5대손소호공(小湖公)의태 지이기도하다. 공께서 항상 고향을 그리워하여 인량과 성주의 4백리 길을 멀다 않고 조부와 아버지의 묘소와 기일에는 매년 참배하였 으 며 , 병 환 으 로 갈 수 없 을 때 는 상 을 차려놓고 목욕재계하고 남쪽을 향하여 분향재배 하였으며, 벽상에는 원모재(遠慕齋) 3자(三字)를 써서 걸어놓고 평생토록 선조에 사모하는 마음 으로 살다가 중종 16년(1521)에 졸하니 향년 67세이다. 배 (配)대흥백씨는 일찍 죽어자손이없고후배(後配)단양박씨 (丹陽朴氏)성간(成侃)의따님이다. 함양박씨 인량리 입향은 지금 으로부터 538년 전이다. 입향 이 후 지금에 이르는 동안 석학거유 를 배출하면서 나라가 어려울 때 는 분연히 일어나고,내적으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 애를 돈독히 하는 등 충효열사가 면면히 계승하고 천 여호의 후손 들이 경향각지에 산재하여 선조 의 얼 을 되 살 리 고 있 다 . 원모재공은 부인 단양박씨와 의 사이에 아들 경보(景輔)를 낳 았다. 1485년에 태어났으며, 자 (字)는 자필(子弼), 효행으로써 통정대부에 추증된 사실이 단양 읍지(丹陽邑誌)에 실려 있다. 3남1녀를 두었으니 장남 순년(舜年)의 관(官)은 별시위(別 侍衛), 차남 순명(舜命)은 조졸하였고, 삼남 순수(舜壽)는 부 모상에 6년간 여묘하였으며, 창신교위 용양위 좌부장(彰信校 尉 龍 웹衛 左部將)이고, 따님은 무안박씨 영해 입향조 휘 지 몽의손자참봉붕(鵬)에게출가하였다. 별시위공(휘 순년)은 5남2녀를 두었으니 장남 정서(呈瑞) 의 字는 서지(瑞之), 호(號)는 익은(翊隱)으로 창신교위(彰 信校尉)이다, 다음은 인서(麟瑞)인데 정릉(靖陵, 중종의 능) 참봉이고, 다음은 기서(麒瑞)인데 장사랑 기자전(箕子殿) 참 봉, 다음은 구서(龜瑞)이고, 다음은 봉서(鳳瑞)이다. 딸은 정 세안(鄭世安)과황범(黃範)에게출가하였다. 익은공(휘 呈瑞)의 장남 문걸(文傑)의 字는 여기(如器),號 는 경한재(景寒齋)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병절교위와 훈련원 봉사를 지냈다. 무과에 급제한 동생 충걸(忠傑), 영걸(英傑) 과 함께 임진왜란에 의병을 일으켜 화왕산성에 달려간 사실 이 망우당 곽재우의 창의록에 전해지는데 충걸, 영걸은 아쉽 게도전사하였다. 정릉 참봉공(휘 麟瑞)의 아들 장남 의걸(義傑)은 무과에 급 제하여 훈련원 봉사, 차남 창걸(昌傑)은 선무랑으로 후예들 은울진군온정면신림으로이거하여집성촌을이룬다. 기자전참봉(휘 麒瑞)의 아들 시걸(時傑)은 무과에 급제하 였고, 손자 인길(仁吉)은 군자감 봉사, 증손 지화(知和)는 선 교랑행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이다. 기자전 참봉의 아우 귀서(龜瑞)의 아들 신걸(信傑)은 무과 에효행으로단양읍지에전해지고,차남의휘는주( 퍅)이다. 창신교위 좌부장(휘 舜壽)은 4남 3녀를 두었으니 장남 언용 (彦龍)은 호군(護軍), 손자 희안(希顔)의 호는 경운재(景雲 齋) 통사랑 군자감봉사이고 임진왜란에 화왕산성에 들어가 회맹(會盟)한 사실이 망우당 창의록에 전해지고, 둘째 손자 희민(希閔)은 호(號)가 삼괴정(三槐亭)이고 벼슬은 판사(判 事)이다, 봉사공의 맏아들 현(炫)은 장사랑 사재감 참봉, 차 남은 정( 텝), 삼남 진( 塋)은 참봉이고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 다. 아버지가 잉어를 생각하자 바위와 물 사이에 구하러 갔는 데 수달이 잉어를 놓고 제사를 지내는 곳에까지 다다랐다. 이 에 여러 수달들에게 잉어를 달라고 요청하니 수달들이 큰 잉 어를 던져주었다. 돌아와서 이를 가지고 봉양하니 아버지의 병이나아사람들이수달바위라부른다.아버지가돌아가시자 여묘(廬墓)하였으며, 홀로된 어머니를 지극한 정성으로 모셨 다. 특히 그의 처 백씨도 역시 지극한 효성으로 봉양하였으므 로 ‘효자 효부“라 하였다. 그의 아들 서규(瑞奎)는 무과에 급 제하여어모장군행황주진관병마절제사이다. 호군공의 차남 희민(希閔)의 號는 삼괴정(三槐亭)으로 판 사감정(判事監正), 손자 형(瑩)의 號는 녹양정(綠楊亭)으로 하담(荷坍) 김시양(金時讓)의 문인이며 효행으로써 저명(著 名)하였다. 순후하고 엄중하며 믿음이 있었으며, 부모를 지극 한 효성으로 모셨다. 장례를 치름에 상의를 다하였음으로 고 을 사람들이 칭송을 하였으며, 사림(士林)이 천거하여 복호 를받았다.이사실이읍지에실려있다. 차남 사룡(士龍)은 친상(親喪)을 당하여 여묘(廬墓)하는 등 지극한 효행이 단양읍지에 전해진다. 삼남 세룡(世龍)의 자(字)는 중운(仲雲), 호는 체헌( 휵軒)으로 통정대부에 가자 되었고,유일재(惟一齋)김언기(金彦璣)선생의 문인이다.사 남 계룡(季龍)의 자는 계운(季雲)號는 인고(仁皐)승사랑 참 봉으로이들4형제의효행은남다르다.아버지가큰뱀에물려 거의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醫師가 말하기를 “깨문 뱀을 잡아 찧어 바르면 차도가 있을 것이다.”라 하였다. 이를 들은 즉시 사방을 뒤지는데 고니가 홀연이 뱀을 물고와 이상한 나 뭇잎과 같이 떨어뜨려 주었다. 이에 뱀을 찧어 바르고 나뭇잎 을 붙이니 마침내 신기한 효험을 보게 되니 사람들이 모두 극 진한효성에천신(天神)이감동한것이라하였다. 교위공의 맏딸은 김제군수시 임란에 사절(死節)한 증 참판 정담(鄭湛)에게 출가하고, 둘째 딸은 주부 남인록(南仁祿), 셋째딸은참봉정승황(鄭承黃)에게출가하였다. 임진왜란 때 부모님의 상을 당하여 묘를 지킴에 하루라도 벗어난 적이 없었는데 왜적 수백 명이 여막을 둘러싸고 호통 을 치며 말하기를 “너는 어찌하여 도망하여 피하지 않는가?” 라고 하였다.대답하기를 “갑자기 어버이 상을 당하였지만 봉 분을 버리고 목숨을 도모하고자 하여도 하늘이 큰 밝음으로 내려다보고 있어 반드시 목숨을 연장시켜 줄 이치가 없다.”라 하며 얼굴색 하나 변함이 없었다. 왜적들은 서로 돌아보며 말 하기를 “어찌 차마 이와 같은 효자를 해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박 효자거려(朴 孝子居廬)하는 곳이라 동문(東門) 바 위에 크게 써 붙이고 물러갔다. 김정구(金鼎九) 부사도 또한 동리 입구에 븮박씨4효(朴氏四孝)븯라 썼으며, 우복 정경세가 부사로 있을 때 언룡(彦龍)을 훈도로 추대하면서 말하기를 “우리의도는충효를그바탕으로한다”라하였다. 통정대부 휘 세룡의 희맹(希孟)은 통정대부 용양위 부호군 이고, 손자 휘 신지(身之)의 字는 이경(履卿) 號는 소호(小 湖)·택옹(澤翁)이다. 평소에도 지극정성으로 부모봉양을 하 였으며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십리길을 멀다 않고 초하루와 보름에 묘소에 참배하였으며, 아버지 돌아가시고 3년동안 한 번도집에오지않고여묘살이를하였다.나이30에진사에급 제하였으나 연첩상고를 당하여 문과에는 40이 넘어 숙종 1년 에병과2등(전체12등)으로급제하였다. 여려 직을 거쳐 사헌부감찰,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숙종5년 에 보령현감으로 있던 중 정국(政局)의 파동으로 8년동안 귀 가하였다가 숙종15년에 부름을 받아 형조, 예조정랑 춘추관 기주관, 서산군수 성균관사예, 통례원 상례, 사도시정을 거쳐 울산도호부사로 재직하면서 녹봉을 한 푼도 집에 가져오지 않고굶어죽게된부민(府民)을구휼하였으며학교를일으키 고 산업을 장려하였다. 숙종 19년에 정국의 혼란에 사직을하 고 집으로 돌아올 때 벼루 한 개와 집필묵 이외는 사양하고 가 져오지 않았다. 그 후 울산부민들이 뜻을 모아 동(銅)으로 거 사 비 (去 思 碑 )를 세 웠 으 나 왜 정 때 비 ( 碑 )를 수 탈 해 갔 다 . 사 후 영해 사림(士林)이 천거하여 불천위로 받들게 되었고, 교 지 33매와 문집 4권2책이 소호 종택에 보관되어 전해지며 후 손들이인량리소호종가를세거하고있다. △박사일(朴師一,1703~1771) 자(字)는 행만(行萬), 녹양정공(휘 영)의 현손이며 계월당 공(휘 래장)의 아들이다. 처음 태어났을 때 까마귀가 모이는 이적이 있었으며, 생부(휘 來明)의 상을 당함에 빈소의 밖에 서서 말하는 스님이 있었는데, “나를 따라 오라”고 하기에 따 라가니 평해 율현(栗峴)의 꼭대기에 이르러 손가락으로 가리 키며 말하기를 “이 산은 효자가 아니면 인연을 허락하지 않고 보이지않는다.”라고하였다.마침내그곳에다장례를치렀다. 양아버지가 기이한 질병이 있었으므로 대변을 맛보고 하늘 에 축원을 드렸는데 꿈속에서 신기한 액제를 얻어 마침내 병 을 고쳤다. 상을 당하여서는 슬픔으로 지나치게 야위었으며, 삼년여묘하였다. △박래만(朴來萬,1721~1774) 字는 군복(君福), 소호공(휘 신지)의 증손이며 휘 시간(時 幹)의 아들이다. 부친의 병환에 물고기를 잡아 봉앙하였는데 겨울에도 얼음을 깨니 잉어가 뛰어나와 고와 드렸더니 차도 가 있었으며, 운명할 즈음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주입시 켰더니 되살아났다.운명하신 후 여묘 3년을 살았으므로 주위 사람들로부터효자란칭찬을받았다. △박두경(朴斗慶,1759~1847) 자(字)는 사찬(士粲) 호는 우은재(愚隱齋)이다. 통덕랑공 (휘 용징)의 증손이며, 휘 회일(會一)의 둘째아들이다. 부친 이 병환이 깊어 백약이 무효라 운명할 지경이 두경이 왼편 넷 째 손가락을 잘랐으며, 얼마후 또 병환이 재발하여 둘째 손가 락을 끊어 아버지 병을 석달이나 연장히게한 출천지효다. 사 림이천거하여복호(復戶)를받았다. 주(註):복호(復戶)-조선시대충신(忠臣) 효자(孝子) 절부(節婦)에대해 조세,부역등을면제해주는제도. △박치수(朴致修,1801~1860) 자(字)는 행지(行之), 호는 수은(燧隱)으로 진사공(휘 성 규)의 후손으로 효자 사일(師一)의 현손이다. 뜻을 가지고 양 친을봉양하였으며,정성스런효성을특이하였다.상국(相國) 윤성대(尹聲大)가 봉수군의 역(役)을 없애주었으며,상국(相 國)정원용이 조정에 상주하여 정려를 하도록 하고자 하니 명 오(命吾)가 듣고는 굳세게 막고 저지하였으므로 향리에서는 “장하다”라고하였다. △박한운(朴漢運,1836~1868) 판사공(判事公, 휘 희민)의 주손(胄孫)이며 자(字)는 경위 (景葦), 호는 정수당(靜壽堂)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병 이 든 어 머 니 를 모 셨 는 데 북 두 칠 성 에 기 원 을 드 리 고 손 가 락 을 잘라 피를 먹여 목숨을 구하고 소생시켰다. 관으로부터 역 을 없앰이 있었으며 복호가 되었다.‘정수당 실기(靜壽堂實 記)’가있다. 원모재공이 성주에서 영해의 인량리에 세거지를 정하고 안 착한 이후 증손 9종반(曾孫 九宗班)이 각기 분파하여 신천, 인량, 우현, 수동, 도동 등에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문과급제 자 2명과 상당수의 무과급제자와 대대로 효자를 배출함으로 써 인량리 8종가 중에서도 명문가로 칭송을 받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3형제가 함께 조국을 위해 항일투쟁 에 헌신한 애국지사 박의연·의열·의훈 형제와 박대춘(帶春) 등이있다. 특히 원모재공의 5대손 소호공(휘 신지)의 청백함과 애민 정신은 후손들에게 그대로 이어진 듯 하다. 소호공의 11대 주 손 성식(成植) 선생은 소택정과 종택, 문집을 비롯한 각종 고 문서 등을 수호하며 인량리 8종가를 선도해나고 있으며,영덕 군의회 초대의장을 역임하였고, 현재 영해향교 전교로 지역 의 유풍 진작에도 앞장서고 있어 선조의 훌륭한 정신을 계승 발전해나고있는후손들의아름다운행실이더욱돋보인다. 뱚집성촌 탐방 경북영덕인량리함양박씨 인량리전경. 경북영덕군 창수면 인량리는 전통과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마을로 유명하다. 예부터 창수는 영해와 양양, 그리고 안동, 서울을 이어주는 길목으로 조 선시대영해의선비들이서울에과거를보러갈때 반드시거쳐가는곳이었으며,서울에서영해로새 로이부임하여오는관리들의통행길이었다. 또한 동해안에서 생산되는 해산물을 안동 등지의 내륙으로 운송해가던 통로였으며, 내륙지역의 문 화를 해안지역으로 가져오고 해안지역의 문화를 내륙지역으로 전달하여 주던 중요한 통로였으며, 인량리는그중심에있다.특히같은마을에8종가 (宗家)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유명세를 타기에 충 분하다.함양박씨인량리종가는성주에서1480년 이거해온이후충신효자가끊이지않아충효의가 문으로 불러지기도 한다. 이에 입향 약사와 충신 효 자 그 리 고 입 향 이 후 세 계 등을 알 아 본 다 . 뱚인량리팔종가 원모재전경(사진좌측은소호선생태실이다.) 원모재(遠慕齋) 뱚함양박씨인량리입향조원모재공약사 뱚입향이후세계(世系) 소호종택-왼쪽 건물은 소택정(小澤亭)으로 울산부사 휘 신지 공의 정자 이고, 가운데는 체헌재로 창신교위 좌부장(휘 舜壽)의 삼남 휘 세룡의 재 사이다. 애국지사 박의연·의열·의훈 삼 형제유적비 뱚맺음말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