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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성(安城) 사람이다. 1919년 4월 1·2일에 걸쳐 안성군 원곡면(元谷面)·양성면(陽城面) 일대에서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이근수(李根洙)·이덕순(李德順)·최은식(崔殷植)·이희용(李熙龍) 등이 계획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4월 1일 오후 8시경 외가천리(外加川里)에 있던 원곡면 사무소 앞에서 1천여 명의 독립만세 시위군중들과 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와 횃불을 들고 일본인 면장을 끌어내어 양성면 동항리로 행진하였다. 도중에 원곡면과 양성면의 경계로 하는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을 비롯한 주동자들이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연설을 하고, 양성면과 원곡면내의 경찰 주재소·면사무소·우편소등을 파괴하고 일본인 거주자를 축출시키기로 결의하였다. 그런데 이날 밤 9시 30분경 양성면민들로 구성된 수백명의 만세시위대가 경찰 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9시 50분경 해산하여 돌아가던 길에 원곡면에서 행진하여 오던 만세시위대와 합세하여 오후 10시경 다시 주재소로 쇄도하였다. 이 때 그는 짚이 없어서 주재소를 방화시키기가 어려움을 알고, 주재소에서 5리나 떨어진 곳에 가서 짚을 가져다가 홍근배(洪根培)와 함께 처음으로 건물과 기물에 방화하여 다른 군중들로 하여금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사기가 오른 만세시위 군중과 계속적으로 양성 우편소와 일본인 외리여수(外里與手)가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 융수지(隆秀知)의 집을 습격하고, 양성면 사무소의 건물과 기물을 파손하였다. 4월 2일 새벽 4시까지 양성면 일대에서 시위를 계속하다 원곡면으로 되돌아 와서, 군중들과 함께 면사무소로 달려가 서류와 집기류를 불태워 버리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10년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경성형무소에서 7년째 복역하던 중, 형무소 내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몰래 계획하려다가 발각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옥중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