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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11월30일 금요일 2 (제143호) 기 획 문성왕의 태자는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죽었다. 문성왕의 뒤를 이을 인물로는,또 다른 아들 김안을 거론할 수 있다.그럼 에도 문성왕의 아들 김안은 아비의 왕좌를 잇지 못했다. 이후 김안은어떻게되었을까? 이찬 김안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븮三國史記븯 신라본기11헌 안왕즉위년조) 김안은 헌안왕이 즉위하자 이찬으로 상대등에 올랐다. 이후 김안의 행적은 찾을 수 없다. 단 경문왕 2년에 이찬 김정이 상 대등이 된 기록이 있다. 이에서 헌안왕 치세 전반(全般)과 경 문왕원년까진김안이상대등에있었다는추측이가능해진다. 여기서 다시 의문이 생긴다. 헌안왕은 아들 없이 죽었고, 당 시 김안은 상대등의 지위에 있었다. 그런데 헌안왕 사후 왜 김 안은 즉위하지 못한 것일까? 원래부터 왕위는 아비 문성왕에 게있었다가유지로종조부헌안왕에게물려진것이다. 그 종조부 헌안왕은 불행히도 아들이 없다.그렇다면 왕위는 다시 문성왕의 아들 김안에게 반환됐어야 하지 않을까? 헌안 왕은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그에 대한 단서 가기록에서찾아진다. 4년 가을 9월, 왕이 임해전에 여러 신하들을 모았다. 왕족 응 렴이 열다섯의 나이로 이 자리에 참석하였다. 왕이 그의 생각 을 알고자 하여 갑자기 “네가 상당 기간 사방을 유력하며 견학 한 바 있는데, 착한 사람을 본 일이 없었던가?”라고 물었다.그 는 “제가 일찍이 세 사람을 보았는데,그들은 착한 행동을 한다 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어떤 행위인가?”라 고 물었다. 그는 “한 사람은 높은 가문의 자제로서, 다른 사람 과 교제함에 있어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남의 아래에 처하였 으며, 한 사람은 재물이 많아 사치스러운 의복을 입을 만한데 도 언제나 베옷을 입는 것으로 자족하였으며, 한 사람은 세도 와 영화를 누리면서, 한 번도 남에게 세도를 부리지 않았습니 다. 제가 본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잠자코 있다가 왕후에게 귓속말로 “내가 사람을 많 이 겪었지만 응렴 같은 자는 없었다.”라고 말하고,사위를 삼을 생각으로 응렴을 돌아보고 말했다. “그대는 자중 자애하라. 내 게 딸이 있으니 사위를 삼도록 하겠다.”왕은 다시 술을 가져오 게 하여 함께 마시면서 조용히 말했다. “내가 딸이 둘 있는데, 형은 금년에 스물이요,동생은 열아홉인데 그대의 마음에 드는 대로 장가를 들라!” 응렴이 사양할 수 없어 일어나 절을 하며 감사의 뜻을 표하고, 곧 집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이 사실을 말 했다. 그의 부모는 “듣건대 왕의 두 딸의 얼굴은 형이 동생만 못하다고 하니, 만약 부득이 장가를 가야 한다면, 동생에게 장 가를 드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응렴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다가,흥륜사 중에게 물었다.그 중은 “형 에게 장가를 들면 세 가지 이익이 있을 것이요, 동생에게 장가 를 들면 반대로 세 가지 손해를 볼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응 렴이 곧 “제가 감히 마음 대로 결정을 못하겠사오니, 다만 왕 의 명령에 따르겠나이다.”라고 아뢰니, 이에 왕이 맏딸을 시집 보냈다.(븮三國史記븯신라본기11헌안왕4년9월조) 왕의 이름은 응렴(膺廉)이니 나이 18세에 국선(國仙)이 되 었다. 약관(弱冠)에 이르자 헌안대왕(憲安大王)은 그를 불러 궁중에서 잔치를 베풀고 물었다. 뷺낭(郎)은 국선이 되어 사방 을 돌아다니면서 놀았으니 무슨 이상한 일을 본 것이 있는가.뷻 뷺신(臣)은 아름다운 행실이 있는 자 셋을 보았습니다.뷻 뷺그 말 을 나에게 들려주게.뷻뷺남의 윗자리에 있을 만한 사람이면서도 겸손하여 남의 밑에 있는 사람이 그 하나요, 세력 있고 부자이 면서도 옷차림을 검소하게 한 사람이 그 둘이요, 본래부터 귀 (貴)하고 세력이 있으면서도 그 위력을 부리지 않는 사람이 그 셋 입 니 다 .뷻 왕 은 그 말 을 듣 고 낭 이 어 질 다 는 것 을 알 고 자 기 도 모르게 눈물을 떨어뜨리면서 말했다. 뷺나에게 두 딸이 있는데 낭의 시중을 들게 하리라.뷻 낭이 자리를 피하여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물러가 부모에게 고했다. 부모는 놀라고 기뻐하여 그 자제(子弟)들을 모아 놓고 의논하기를,뷺왕의 맏공주(公主)는 모양이 몹시 초라하고 둘째 공주는 매우 아름답다 하니 그를 아내로 삼으면 다행이겠다.뷻하였다. 낭의 무리들 중에 우두머 리로 있는 범교사(範敎師)가 이 말을 듣고 낭의 집에 가서 낭 에게 물었다. 뷺대왕께서 공주를 공의 아내로 주고자 한다니 사 실인가?뷻 뷺그렇습니다.뷻 뷺어느 공주에게 장가들려는가?뷻 뷺부 모께서둘째공주가좋겠다고하십니다.뷻범교사는말했다. 뷺낭이 만일 둘째 공주에게 장가를 든다면 나는 반드시 낭의 면전에서 죽을 것이고, 맏 공주에게 장가간다면 반드시 세 가 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경계해서 하도록 하라.뷻 뷺그 말씀대 로 하겠습니다.뷻그 뒤에 왕이 날을 가려 낭에게 사자를 보내어 말했다. 뷺두 딸 중에서 공의 뜻대로 결정하도록 하라.뷻 사자가 돌아와서 낭의 의사를 왕에게 보고했다. 뷺맏 공주를 받들겠다 고 합 니 다 .뷻 그런 지 3개월이 지나 왕은 병이 위독했다.여러 신하들을 불 러 놓고 말한다.뷺내게는 사내자식이 없으니 죽은 뒤의 일은 마 땅히 맏딸의 남편 응렴(膺廉)이 이어야 할 것이다.뷻 이튿날 왕 이 죽으니 낭이 유언을 받들어 왕위에 올랐다. 이에 범교사는 왕에게 나아가 말했다.뷺제가 아뢴 세 가지 아름다운 일이 이제 모두 이루어졌습니다.맏 공주에게 장가를 드셨기 때문에 이제 왕위에 오른 것이 그 하나요, 예전에 흠모하시던 둘째 공주에 게 이 제 쉽 게 장 가 드 실 수 있 게 되 신 것 이 그 둘 이 요 , 맏 공 주 에 게 장가를 드셨기 때문에 왕과 부인이 매우 기뻐하신 것이 그 셋입니다.뷻 왕은 그 말을 듣고 고맙게 여겨서 대덕(大德)이란 벼슬을 주고 금(金)130냥을 하사했다. (븮三國遺事븯 권2기이248대 경문왕조) 위에서 헌안왕은 군신들을 모아 궁중(임해전)에서 잔치를 열었다. 당시는 헌안왕 4년이니 서기로는 860년이다. 때는 음 력 9월이었다. 음력 9월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860년 10월 22일 에서 11월 20일 사이다. 당시 이찬 김안은 상대등으로 핵심 세 력이기도했다. 당시는 한해 농사와 탈곡이 끝났을 때다. 헌안왕이 베푼 잔 치는 추수의 풍요를 기념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한데 문면대 로라면 단순히 그 차원을 넘어 헌안왕이 처음부터 부마를 선 택, 차기 왕위 계승자를 물색하려 한 자리였지 않겠는가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헌안왕이 굳이 관인(官人)이 아닌 젊은 응렴을 참석시킨 것이 그렇다. 응렴의 경우 국선이 었다는 것 외에는 관위는 보이지 않는다. 헌안왕이 눈물을 흘 렸던 점,불과 석 달 뒤에 위독했다는 점 등을 종합하면 헌안왕 이당시병중이었을개연성이크다. 아들도 없는 데다 18살, 17살에 이른 딸들의 배우자조차 정 하지 못했고, 자신의 신병까지 깊다 보니 상황은 절박했을 것 이다. 따라서 이 잔치는 역시 자신의 뒤를 준비하는 성격이 짙 어 보인다. 뿐더러 시기적으로도 당시 잔치는 이례적 경우였 다. 858년 5월에서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흉년이 들었고, 이듬해봄부터는굶주린백성의행렬이이어졌다. 헌안왕은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면서 굳이 응렴을 참예(參詣)시키고 질문을 던졌던 셈인데, 이야말로 일상적인 대면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이라 봐야 하지 않을까. 당시 응렴 이 열다섯이었는지,약관이었는지 분명하진 않다.하여튼 응렴 을 부마로 미리 정해두고 최종적인 면담을 했다고 보는 게 온 당하다는느낌이든다. 응렴의 아비는 희강왕의 아들 아찬 계명이며,어미는 신무왕 의 딸 광화(광의)부인이다.이로 보면 응렴은 전왕의 손자이며 신무왕의 외손이니, 명실상부한 왕실의 종척이 아닐 수 없다. 헌안왕 자신이 신무왕의 이복동생인 점을 생각할 때,신무왕의 외손인 응렴의 존재를 헌안왕이 사전에 몰랐을 리 없다. 말하 자면 응렴의 참예 자체가 헌안왕의 사전 배려였을 가능성이 크 고,두사람의만남역시처음은아닐것이다. 여기서 다시 커다란 의문이 생긴다.헌안왕은 왜 김안에게는 딸을 시집보내 왕위를 물릴 생각을 가지지 않았던가? 위에서 헌안왕의 두 딸들이 모두 응렴에게 출가한 사실을 눈여겨 볼 필요가있다고본다.이는다음에서도확인된다. 3년 11월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영화부인의 아우를 둘째 왕 비로 삼았다. 그 후 왕이 흥륜사 중에게 물었다. “대사가 전에 말했던 세 가지 이익이란 무엇인가?” 중이 대답하였다. “형과 결혼하면 그것이 당시에 왕과 왕비의 뜻대로 되는 것이니, 왕 과 왕비가 기뻐하여 당신에 대한 사랑이 점점 깊어질 것이니, 이것이 첫째 이익입니다. 이로 인하여 왕위를 잇게 될 것이니, 이것이 둘째 이익입니다.그리고 결국은 처음부터 원하던 둘째 딸을 취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셋째 이익입니다.” 왕이 크게 웃었다. (븮三國史記븯신라본기11경문왕3년11월조) 그렇다면 이는 당시 왕실 내 적합한 결혼 배우자가 존재하지 않은 상황의 반영이 아닐까? 김춘추가 지소를 고령의 김유신 에게 시집보낸 경우가 있긴 하다. 한데 헌안왕은 그 전례를 따 르기보다 결혼 적령의 응렴을 택해 왕위를 물려주려 했던 듯 보인다.헌안왕은 처음부터 김안에게 딸을 시집보내는 것은 물 론왕위를물릴뜻조차아예없었다. 계보를 따지면 김안은 문성왕의 손자가 되고,응렴은 문성왕 의 외손자다. 김안과 응렴은 내외종간이다. 헌안왕은 상대등 김안과화랑응렴중응렴을택했다. 이런 맥락에서 응렴이 왕의 사위가 된 것은 응렴 자신의 총 지(聰智)이기보다 왕실의 종척과 헌안왕의 배려란 요소가 크 게 작용했다. 또 위 기록과는 달리 헌안왕의 사망 직전 응렴은 이미근시직을거쳐태자의위에있은것으로나타난다. 경문왕은 물가에서 무지개가 비추는 상서가 있어 중략… 이 름을 한림원에 날리고 따로 풍류를 떨쳤다. 조금 있다가 금초 (金貂)의 직을 받아 우리나라의 풍속을 말끔히 쇄신하니 신하 로 있으면서 덕을 심었으며 태자로 있으면서 마음을 윤택하게 하였다~중략…이에 태자로서 왕위를 받았으며븣. (최치원, 경주 숭복사비문) 861년 헌안왕이 죽자 응렴은 전왕의 사위이자 태자라는 조 건으로 즉위했다. 이후 김부 일가의 활동, 예컨대 김안의 자취 는경문왕치세15년을통틀어일절보이지않는다. 결국 김부 일가가 오랜 시간 왕위에서 밀려 나게 된 이유는 두 가지 이유였다.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은 문성왕과 왕위를 사위에게 물린 헌안왕이 가장 큰 이유였던 셈이다. 김 부의 고조 김안은 문성왕과 헌안왕 모두로부터 왕재(王才)가 아니라 판단된 인물이었다.그렇지 않다면 문성왕이 아들 김안 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았을 이유가 없으며, 헌안왕 역시 김 안을 제쳐두고 굳이 어린 응렴을 사위로 맞아 왕위를 물려 줄 하등의이유가없기때문이다. 김부 일가가 다시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경문왕의 아들 헌강 왕이 왕위에 오른 지 6년이 지나서였다. 즉 21년 만에 김부 일 가의흔적이나타난다. 헌강왕 6년 2월, 경애왕의 조부 예겸이 사직하자 김부의 증 조 민공이 이찬으로 시중이 되었다. 곧 시중의 위(位)를 놓고 경애왕의 조부와 김부의 증조 사이에 그 명암이 갈리고 있다. 김부 일가와 경애왕 일가의 엇갈린 운명은 이때부터 엮인다고 보인다. 6년 봄 2월,금성이 달을 범하였다.시중 예겸이 사직하자,이 찬민공이시중이되었다.(븮三國史記븯신라본기11헌강왕6년2월조) 6년 9월 9일, 왕이 좌우의 신하들과 월상루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니, 서울에 민가가 즐비하고, 노래 소리가 연이어 들렸 다. 왕이 시중 민공을 돌아보면서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 는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덮고,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짓 는다 하니 과연 그러한가?”라고 물었다. 민공이 “저도 일찍이 그렇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고,이어서 “왕께서 즉 위하신 이후로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바람과 비가 순조로워서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며, 변경이 안 정되고 시정이 즐거워하니, 이는 왕의 어진 덕에 의하여 이루 어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이 즐거워하며 “이는 그대들의 도움 때문이지, 나에게 무슨 덕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븮三 國史記븯신라본기11헌강왕6년9월조) 위에서 보면 민공은 이찬으로 시중이 되었다.느닷없이 김안 의 아들 민공이 이찬으로 시중이 된 까닭은 무엇일까. 경애왕 의 조 부 예 겸 의 사 직 과 김 부 의 증 조 민 공 의 취 임 은 여 덟 달 전 신홍 등의 모반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2대에 걸쳐 왕위 를 빼앗긴 민공은 왕권에 저항했을 것이고, 헌강왕은 이들 민 공 세력 등을 포섭하기 위해 시중 직을 부여했을 가능성도 배 제할수없다. 5년 여름 6월, 일길찬 신홍이 모반하다가 사형을 당하였다. (븮三國史記븯신라본기11헌강왕5년6월조) 한데 민공의 태도가 매우 눈에 띈다. 자신에게 돌아왔을 지 도 모를 왕위를 빼앗아 간 헌강왕의 치세를 크게 선양하고 있 다.시중에 취임한 지 일곱 달, 민공은 헌강왕을 정치적으로 비 난하기는커녕덕을칭송하고있다. 왕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바람과 비가 순조로워서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 며, 변경이 안정되고 시정이 즐거워합니다. (븮三國史記븯 신라본기 11헌강왕6년9월조) 과연 민공의 말은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일까? 당시 헌강왕이 왕위에 오른 지 6년,신라 사회는 과연 민공의 지적처럼 태평성 세였을까? 여기서 헌강왕이 지닌 왕권 자체가 얼마나 강고한 것인지 알 아볼 필요가 있다.그러려면, 그 뿌리가 되는 아비 경문왕 치세 로 거슬러 올라가 훑어볼 필요가 있다. 한 나라의 국부를 살피 려면 최소한 십년 정도는 더듬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다음에경문왕대의주요재해들을뽑아보았다. 3년겨울10월,복숭아와오얏꽃이피었다. 3년11월눈이내리지않았다. 7년5월,서울에전염병이돌았다. 7년8월,홍수가나고곡식이잘여물지않았다. 7년10월,사신들을여러곳으로파견하여백성들을위문하였 다. 8년6월,황룡사탑에벼락이쳤다. 10년4월,서울에지진이있었다. 10년7월,홍수가났다. 10년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백성들이 전염병에 많이 걸 렸다. 12년4월,서울에지진이있었다. 12년 8 월 , 국 내의 주 와 군 에 메 뚜 기 떼 가 나 타 나 곡 식 을 해 쳤 다. 13년봄,백성들이굶주리고또한전염병이돌았으므로,왕이 사신을보내백성들을구제하였다. 15년봄2월,서울과동쪽지방에지진이있었다.혜성이동쪽 에나타났다가20일만에없어졌다. (븮三國史記븯신라본기11경문왕조에의거함) 경문왕 치세에는 이상 난동, 역질, 뇌우 등의 재해가 끊이지 않았다. 민생의 고통 또한 심각했다. 재위 8년에 황룡사 탑에 친 벼락은 3년 뒤 중수를 해야 할 만큼 심각한 정도였다. 벼락 은 뇌우를 동반하기 마련이고 이것은 한 해 농사에 큰 타격을 미친다. 일련의 신라 내부 동요는 일본의 대마도와 대재부에까지 영 향을 미쳤다. 866년(경문왕 6년) 11월 17일 신라 적병의 침입 에 일 본 안 여 러 소 국 과 대 재 부 는 비 상 훈 련 및 제 신 에 게 진 호 를 기원했다. (븮일본삼대실록븯 (日本三代實錄), 권13) 이 듬 해 5 월 2 6 일 신라와 경계를 접한 여러 소국은 변란의 제거를 빌며 븮최승왕 경븯 등을 7일간 전독(轉讀)했을 정도였다 (븮일본삼대실록븯(日本三 代實錄), 권14). 869년(경문왕 9년) 5월 22일에는 신라 해적선 2 척이 실제 구주의 하카다에 상륙,풍전국의 연공(年貢)을 약탈 했다.( 븮일본삼대실록븯(日本三代實錄),권16 ) 일본 정부는 869년(경문왕 9년) 12월 5일, 12월 14일, 12월 1 7일, 12월 29일 등 네 번에 걸쳐 대책을 심각하게 논의했다(븮일 본삼대실록븯 (日本三代實錄), 권16). 870년(경문왕 10년)에는 신라 가 대선을 건조해 대마도 탈취를 꾀한다는 첩보에 대재부가 연 안 제군에 비상령을 발동하고 있으며(븮일본삼대실록븯 (日本三代實 錄),권17) ,같은 해 8월 28일에는 대마도에 노사(弩師)1명을 임 명해 이를 항례(恒例)로 삼기도 했다(븮일본삼대실록븯 (日本三代實 錄),권18) . 신라의 침입에 대비해 870년 9월 15일, 11월 13일 등 에 걸쳐 신라와 내응한 세력의 색출에 나서고 있다.심지어 873 년(경문왕 13년)에는 일본이 신라 해적의 준동을 감찰하는 경 비로 경고전(警固田)을 두기도 했다(븮일본삼대실록븯(日本三代實 錄),권24). 위 사례들은 신라 내부 에네르기의 외적 팽창이나 분출이 아 니라 민생 경제의 붕괴와 모순에 말미암은 것이다. 게다가 경 문왕에 저항하는 지배층의 내분도 격화되고 있었다. (이하 삼국 사기권11신라본기11경문왕조에의거) 6년 겨울 10월, 이찬 윤흥이 아우 숙흥븡계흥과 함께 역모를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대산군으로 도주하였다. 왕이 명령을 내려그들을붙잡아참수하고,삼족을처형하였다. 8년 봄 정월, 이찬 김 예븡김 현 등이 반란을 도모하다가 처형 당하였다. 14년 여름 5월,이찬 근종이 모반하여 대궐을 침범하므로,대 궐 지키는 군사를 출동시켜 격파하였다.근종이 그의 무리들과 함께 밤에 성 밖으로 도주하는 것을 추격 체포하여 수레에 매 어찢어죽였다. 경문왕 치세 15년 동안 세 차례 반란이 일어났다. 세 차례 반 란의 주범은 모두 이찬의 관등을 가진 자들이다. 예컨대 윤흥 의 경우 822년 문화관문을 충공과 더불어 지킨 바도 있고 남원 소경의 음률을 전습하는 등 당대 유력 세력임이 드러난다. (김창 겸, 븮신라하대왕위계승연구븯, 경인문화사, 2003, p. 311) 이러한 정치 거 물급들의 잇따른 반란은 경문왕이 당시의 지배 계층으로부터 폭넓은지지를얻지못한반증이다. 경문왕은 반란 수괴의 삼족을 멸하거나 전대미문의 거열형 과 같은 극형을 행했다. 이것은 경문왕이 처한 정치적 고립의 일단이 아닐까? 경문왕이 감찰,첩보 수집에 나선 정황은 실제 로도포착된다.그러한사정은다음과같은은유로나타났다. 왕위에 오른 후 왕은 귀가 갑자기 길어져서 나귀의 귀처럼 되었다. 왕후며 궁인들도 모두 이를 알지 못했으나 오로지 복 두장 한 사람만이 이 일을 알고 있었다. 그러 나 그는 평생 이 일을 말하지 않았다.그는 죽으려 할 때 도림사 대밭 속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대나무를 보고 외쳤다.뷺우리 임금의 귀는 나 귀 귀처럼 생겼다.뷺그런 다음부터는 바람이 불면 대나무 밭에 서 소리가 났다.뷻뷺우리 임금의 귀는 나귀 귀처럼 생겼다.뷻왕은 이 소리를 싫어해서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산수유나무를 심었 다. (븮삼국유사븯권2기이 248대경문왕) 응렴은 왕위에 오른 이후 귀가 갑자기 길어졌다고 한다. 왕 후며 궁인들도 모두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것은 비밀리에 경 문왕이 정탐에 골몰했고 정적의 거세에 부심했음을 시사한다. 이 일련의 내용들은 경문왕의 왕권이 그만큼 약했음을 보여주 는반증이다. 874년 근종이 일으킨 반란의 경우 군사를 거느리고 직접 대 궐을 침범할 정도였다. 뿐 아니라 경문왕은 즉위 이래 원성왕 능역의 조성과 곡사의 이전, 임해전의 개수 등의 역사를 벌였 다. 결국 경문왕의 치세 내내 숱한 토목 공사가 줄을 이었고 사 회는 어수선하고 불안정한 정정이었다. 순탄치 못한 국정운영 은다음자료에서도짐작이가능하다. 일찍이 왕의 침전에는 날마다 저녁이면 수많은 뱀들이 모여 들었다. 궁인들이 놀라고 두려워 이를 쫓아내려 하자 왕은 말 했다. 뷺만일 뱀이 없으면 내가 편히 잘 수 없으니 쫓아내지 말 라.뷻 왕이 잘 때에는 언제나 뱀처럼 혀를 내밀어 온 가슴을 덮 고있었다. (븮삼국유사븯권2기이248대경문대왕) 경문왕이 뱀으로 묘사된 세력과 얽혀 밤을 지새우고, 뱀이 없으면 한시도 편안히 지낼 수 없다고 한 경문왕의 자탄은 약 체화된 왕권의 은유가 아닐까 짐작된다.뱀은 신라인에게는 사 악함의상징이나다름없었다. 지금 백제가 무도하여 긴 뱀과 큰 돼지가 되어 우리 강토를 침범하므로~하략…(븮三國史記븯권5신라본기5선덕여왕11년겨울) 경문왕은 밤마다 뱀과 더불어 지냈고 뱀처럼 혀를 내밀어 가 슴을 보호했다. 이것은 불안함과 두려움 속의 자기 방어의 일 환이다.경문왕으로 하여금 그토록 부심하게 한 최대의 정적들 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이에는 왕위를 빼앗긴 김부 일가의 움 직임도빠뜨릴수는없을것이다. 재위 15년이던 875년 7월 8일,경문왕은 죽었다.경문왕은 헌 안왕이 죽기 직전인 860년 10월 결혼했다. 그때의 나이가 15~2 0세였고, 이후 15년간 왕위에 있었다. 그렇다면 경문왕이 죽었 을때30~35세에불과하다. 경문왕이 결혼 직후 자식을 얻었다고 쳐도 헌강왕은 왕위에 올랐을 때, 열다섯을 넘지 못한다. 이런 상황 하에서 헌강왕의 왕권은 민공의 지적처럼 결코 태평할 수만 없었을 것이다. 민 공이 헌강왕에게 태평을 말한 시점을 다시 눈여겨보자. 앞의 기록에선 그날이 헌강왕 6년(880)9월 9일로 정확히 나타난다. 고대인의 관념 속에 홀수는 양수로 간주되었다.특히 완전수 9가 겹치는 9월 9일은 중양절, 또는 중구절로 불렸으며 당나라 이래 최대 명절이었다. 시기적으로는 제비가 강남으로 날아가 고 한 해 수 확 을 마 친 즈 음 이 다 . 제 나 라 경 공 (景 公 ) 이 우 산 (牛 山)에 올라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도 있을 만큼, 군신의 등산 (登山)이 열렸다. 국화 술을 마시고 화전을 먹는 등 백성들 역 시 한 해의 결실을 즐겼다. 중국의 이 세시 풍속은 신라로 들어 왔고고려븡조선에도이어졌다. 헌강왕이 민공 등을 거느리고 궁궐 내 월상루에 행차했을 때, 사방에서 노래와 피리,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중양절의 풍속에 힘입은 결과일 뿐이다.헌강왕은 여기서 ‘기와지붕을 덮고 숯으로 밥을 짓는 것이 사실인가’라고 민공 에게물었다. 그러자 시중 민공은 일찍이 그런 말을 들어 왔었다는 것과, 왕 즉위 이래 풍작이었음을 밝혔다. 그러나 민공의 말은 정치 적수사(修辭)이자명백한자기기만이었다. 경애왕(신라55대왕.재위924~927 ) 뱚역사비정(23) 뱛Ⅰ.김부의고조,김안 박 순 교 뱛Ⅱ.김부의증조,민공 뱛Ⅲ.민공의교언영색 뱛 Ⅳ.거짓과위선 뱚▶다음호에계속 목 차 뱚Ⅰ.김부의고조,김안 뱚Ⅱ.김부의증조,민공 뱚Ⅲ.민공의교언영색 뱚Ⅳ.거짓과위선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