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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11월30일 금요일 12 (제143호) 기획 밀성박씨 충헌공 后 참찬공파 화성문중이 입향 500주년을 맞이했다.입향 이후 토호세족으로 현재에 이르기 까지 지역민과 함께하며 책임과 의무는 물 론충효(忠孝)를실천함으로써지역민들로부터선망(羨望)의대상이되기도한화성문중을찾아가본다. ▶팔탄면구장리유래 비봉면 태행산에서 발원하여 창곡리 하저리를 경유하는 자안천(紫安川)과 팔탄면 건달산에서 흘러 구장리를경유하는구장천의 흐름이 8자형이 라 하여 조선조 태조원년(1392년)부터 팔탄촌으 로 불렀다.조선조 말까지수원군 지역이었던 구장 리는 고종32년(1895년)에 남양군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저팔면 일부와 공향면 일부를 팔탄면으로 행정구역을 정하고 다시 수원 군에 편입되었다. 구한말 이전까지 구장리는 장시 (場市)로 번성하다가 1913년경에 이 장터가 발안 리로 옮겨가면서 장터는 폐쇄되고 전에 장이 서던 구장터라는뜻으로구장리로불리게되었다. ▶팔탄면구장리입향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구장리에서 태어나 성장 과 교육을 받은 분은 충헌공(휘 척)의 12세(世) 동 몽교관 휘 후(厚) 공으로 아버지 휘 의번(義蕃)公 이황해도송화현감을지냈다.당시중앙관직에있 던 관료들이 서울근교에 별거지를 정해두고 관직 에 등용되면 다시 서울로 갈 수 있도록 하고 있어 현감공께서도 화성시 매송면 송나리에 별거지를 정해 살다가 아들 후(厚)를 1518년 8월 구장리에서 낳아양육하면서500년세거지가되었다. 입향조휘후(厚)는학행으로교관으로천거되고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당시 마당 에 심었다는 느티나무가 후손들의 휴식처로 또는 화합의장소로항상인적이끊이지아니하였다.500 여년의풍상을견디면서마을의산증인으로수호신 으로버티고있어1982년보호수로지정되었다. ▶입향조세계(世系) 밀성박씨 충헌공파는 밀성대군(彦침)의 13世支 孫(시조 42世孫) 휘 척(陟)을 파조로 모신다. 공 (公)은 고려조에 내부시승(內附侍丞)에 이르고 순 충동덕찬화공신삼중대광(純忠同德贊化功臣三重 大匡)에 밀성군(密城君)으로 봉(封)해졌으며, 추 은(推恩)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은 총이더하여지고시호(諡號)는충헌(忠憲)이다. 충헌공은 부인 아림군부인(鵝林君夫人) 경주 이씨(慶州李氏)와의 사이에 아들 성진(成進)을 낳으니 문과에 올라 조현대부(朝顯大夫)로 흥위 위(興威衛) 정용장군(精勇將軍)에 협찬공신(協 贊功臣)으로 황증문하평리(皇贈門下評理 종2품) 에 이르렀다.손자 판전교시사의 휘는 원(原)으로 충숙왕조(忠肅王朝)에 벼슬이 판전교시사(判典 校寺事)에 이르고 규의선력공신(揆儀宣力功臣) 으로 밀성군에 봉해지고, 슬하에 아들 윤겸(允 謙),윤문(允文),윤무(允武)삼형제를두었다. 장남 윤겸(允謙)은 중랑장(中郞將)으로 아들 (휘 連),손자(휘 강)에 이르러 무후(无后)이고 차 남 휘 윤문(允文)은 밀주의 풍각화산(현 청도군 풍각면 화산)본가에서 출생하여 충숙왕 원년(131 4년)에 급제하여 삼중대광 보문각대제학(寶文閣 大提學)에 이르고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문 장이 뛰어나 저술(著述)한 문적(文籍)이 동문선 (東文選)에 실렸고,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더 불어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슬하에 아들 6명을 두니세칭육남대가라불러지며크게번성하였다. 다섯째 아들인 계양(啓陽)은 진사시험(進士試 驗 )에 포 은 정 몽 주 와 더 불 어 동 년 에 급 제 하 여 관 직이 정헌대부(正憲大夫) 검교참찬의정부사(檢 校參贊議政府事)로 입향조의 7대조로 참찬공파 로세계를이룬다. 참찬공의 아들 사제(思齊)는 조선조 판도총랑, 손자 인효(仁孝)는 장례원 사평,증손 시운(時雲) 은 문과에 올라 목사이고, 현손 영(寧)은 자헌대 부 공조판서, 5대손 중화(仲華)는 정헌대부 의정 부 좌참찬 호조판서로 입향조의 조부가 된다. 아 버지휘의번(義蕃)은황해도송화현감을 지냈다. 입향조 휘 후(厚)는 1518년(중종13)8월 7일 구 장리에서 태어났다. 학행(學行)으로 교관에 천거 되었고,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후 학양성에매진하였다. 아들(2세)현룡(見龍)은생원시에올라음직으 로 상의원 첨정이고 증직은 좌승지이고, 손자(3 세) 경생(慶生)은 진사시에 오르고 광릉(세조와 정희왕후 릉)참봉으로 예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증손(4世) 이율(而栗)은 문학이 뛰어나고 효행 이 지극하여 교관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 하였다. 현손(5세) 영(英)은 종사랑, 6세(世) 진 여(震呂)는 무과에 급제하였고, 6세 진량(震亮) 은 1654년 문과 갑과에 올라 봉례랑 직강이고, 7 世 수계(壽繼)는 동부승지에 증직되었고, 8世 도 윤(道潤)은 증 호조참판이다. 9世 종찬(宗瓚)은 1795년 을묘년에 특별히 통정에 가자되고 이어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제수 되었다. 12世 용하(容夏)는 고종조에 성균관 사 복으로 순종조에 통정대부에 가자되었고, 그의 아들(13세) 래원(來遠)은 순종조에 승훈랑이고, 건릉(정조와효의왕후)참봉이다. 구장리 입향이후 선조들의 삶은 효행과 학행이 뛰어나 대대로 관직이 끊이지 않았으며, 남양향 교청금록에오른인물만해도수십명에이른다. ▶참찬공휘계양(啓陽) 공의 자(字)는 계신(季信)이요 일휘는 돈지(敦 之 )초명은 계양(啓陽)이다.고려 삼중대광 보문 각 대제학 (高麗 三重大匡, 寶文閣 大提學) 휘 윤 문(允文)의 자(子) 육형제중 5남으로 1342년 1월 6일(충혜왕4) 송도(개성) 건천리 본가 사제(私 第)에서태어났다. 1360년(공민왕10)에 진사시에 장원하였고, 이 해 10월 25일에 책문으로서 신경동당(新京東堂) 병과(丙科) 5인에 급제하였다.이 때 공(公)의 나 이 19세이다. 고려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 周)는 이 날 을과(乙科) 3인에 급제하였는데 당시 나이 24세였고.목화씨로 유명한 고려 충신 삼우당 (三憂堂)문익점(文益漸)도병과(丙科)7인에같이 급제하였는데 나이는 30세였다.1362년 5월 문예부 승(文睿府丞)을 제배(除拜)하고 이듬해 5월 승봉 랑(承奉郞), 전의주부(典儀主簿), 고공좌랑(考功 佐郞),예의좌랑(禮儀佐郞)으로 옮겼는데 한결 같 이사람의도량과재능의이룸을보였다. 임금이 현용청(現用廳)을 설치 하고저 할 때 적 색소경[政色小卿,무신 정권 때 정방(政房)에 ]둔 정색승선(政色承宣)중 사품 이하의관원)]에 명하 였고, 1365년(乙巳)7월 군부좌랑(軍簿左郞), 1366 년 12월 예문응교(藝文應敎)지제교(知製敎),1367 12월 군부정랑(軍簿正郞), 예문지제교(藝文知製 敎),무신(戊申)12월에봉선대부(奉善大夫)내서사 인(內書舍人) 지제교(知製敎), 기유(己酉)12월에 봉상대부(奉常大夫)로 승진했는데 다른 직책은 전 과 같았다. 홍무(洪武)신해(辛亥) 12월에 비서감 (秘書監)으로 승진하니 품계는 중정대부(中正大 夫)였다.임금의 귀염을 받던 홍윤(洪倫)이 원수진 사람으로부터많은재물을받아서임금의측근들에 차차 젖어들게 하여 公으로서는 닦을 수 없는 명예 (名譽)라 산과 강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홍륜이 거 열형(車裂刑)을 당한 후 밝게 설원(雪寃)되었다. 무진(戊辰)(1388) 겨울 한산군(韓山君) 이색(李 穡)이 사신(使臣)이 되어 경사(京師-명나라 서울) 에 가면서 공을 압물관(押物官)으로 삼아서 경사에 갔는데관소(館所)에대우가특별하고온전했다.국 초(國初)에 왜구(倭寇)가 아직까지 날뛰어 바닷가 를노략질하므로태조(太祖)께서일본에공을통신 사(通信使)를 보냈다. 일본의 대장군(大將軍)과 대 내전(大內殿)이공의풍체가잘생긴것을보고는공 의말을간절하게들으면서매우존경을표했다. 대내전이 대장군에게 호령을 내어 군사를 거느 리고 친히 왜구를 토벌하라고 청하여 오백 여명을 참수(斬首)하기에 이르렀다. 건문(建文) 기묘(己 卯,1399년)5월초5일에복명(復命)하니인덕전(仁 德殿-왕)께서 매우 기뻐하여 공(公)을 통훈대부 (通訓大夫) 판전중(判殿中)으로 발탁하니 특별한 대우였다. 이로부터 왜구가 발호(跋扈)하는 일이 없어 연해(沿海)에 백성들이 전처럼 안도(安堵)하 며살수있었다.1399년2월에판봉상(判奉常)보문 각직제사(寶文閣直提事), 이듬해 7월에는 가정대 부(嘉靖大夫)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 보문각학 사 겸 판전의사사(寶文閣學士兼判典醫寺使),1402 년 4월 가선대부(嘉善大夫)형조상서(刑曹尙書)5 월에는 승추부(承樞府)에 들어가 가정대부 제학 겸판군자감사(提學兼判軍資監事)가되었다. 9월에 공안부윤(恭安府尹) 수문전제학 겸 판 군자감사(修文殿提學兼判軍資監事), 9월에 자헌 대부(資憲大夫)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 1411 년(辛卯,태종11) 8월 정헌대부(正憲大夫) 검교 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를 지내고 142 2년(영락壬寅)에졸하였다. 공(公)의 효성과 충신(忠信)은 천성에서 나와 어버이를 봉양하고 여묘(廬墓)를 살면서 상제 (禮制)를 극진히 마쳐 효행으로도 크게 이름을 떨쳤다. 참찬공(휘계양)과집성촌구장리 선조 유지를찾아븣 구장리전경-사효재와면사무소에표지석이있으며입향조께서심은느티나무가그세월을말해주고있다. 사효재(思孝齋) 전경-2002년 건립. 참찬공의 손자 인효(仁孝) 를비롯한후손들의위패를봉안하고제사(祭祀)하는곳이다. 함 양 박 씨 동 정 공 파 가 을 시 향 이 지 난 1 7 일 부 터 19일에 봉행되었다. 함양박씨는 크게 6지파 로구분되는데광주동정공파는1파의군기소감 공 휘 지문의 후손으로 광주전남에 큰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동정공이 태어난 양과동은 600년 세거지로 선조들은 향약을 재정하여 지역을 유 풍과 문풍을 일으키는 등 토호세족으로서 의무 와책임을다하여왔다.동정공파세거지 변천사 를 보면, 중시조 이후 선조님들이 관직에 따라 많은 지역으로 옮겨졌을 것으로 보이나 중시조 의 묘소가 함양에 있는 것으로 보아 제1파 군기 소감공(휘 지문)이 어느 시기에 모처에서 전남 거평(현 문평면)으로 이거 했는지 기록을 찾을 수 없으나 군기소감공이 자리를 잡은 거평에는 함박등(咸朴嶝), 또는 함박동(咸朴洞)으로 불 리는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세(勢)를 알수있을만하다. 군기소감공을 비롯한 차남 경( 궝)은 문과에 올라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시학(侍學), 셋 째아들 휘 순(淳)은 군부총랑(軍部摠郞)이며 휘 순의 아들 휘 원경(元慶)은 삼척군(三陟君) 에봉해져삼척박씨의시조로분적되었다. 군기소감공과 아들 휘 경, 손자 홍저(洪貯, 典 儀令 判東部錄事), 증손 검(儉, 書雲副正), 현손 득춘(得春, 別坐), 득시(得時,중직대부 사복경 홍문관 교리 지제교)의 묘소가 모두 실전되어 나주시 남평읍 정광촌 저존재 후면에 설단하여 제향을 받들고 있어 최초 입향지인 거평에는 후 손들이없다. 군기 소감공의 현손 휘 득춘은 경북 예천으로 이거해갔고차남휘득시는문과급제하여중직 대부(中直大夫)사복경(司僕卿)과 홍문관 교리 (弘文館 敎理), 지제교(知製敎)를 역임하였으 며, 합천이씨와 결혼 광주광역시 남구 이장동 (황산마을)에서 아들 휘 선(鮮, 동정공)을 낳았 으니 바로 광주 전남지역의 대성으로 번성한 동 정공파의파조로서號는유곡자(柳谷子)이다. 지난 17일 저존재 경내 뒤편에 단소에서는 군 기 소 감 공 의 아 들 을 비 롯 한 실 전 된 선 조 5 代 5 位 의제향을봉행하고선조님의음덕을기렸다. 동정공 휘 선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 지제교 동정(同正)을 역임하며 명성과 덕망이 세상에 크게 떨쳤다. 세종23년(1441년) 졸하였 다.슬하에 수지(遂智),수화(遂和)형제를 두면 서 크 게 번 창 하 게 되 었 다 . 장남 휘 수지(遂智)의 字는 희안(喜安) 호가 지봉(芝峰)이다. 세종3년(1421)에 출생하여 어 머니를 지효(至孝)로 섬기고 제매(弟妹)를 어 루만져우애가지극했다. 사마시에 급제하고 감찰어사, 세자익위사 좌 익찬을 거쳐 예산 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노모를 위해 부임하지 아니하고 남평 현감으로 치적을 올려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뒤에 문과에 올라 홍문관 교리 지제교, 북평사 집의를 역임했다. 사후에좌찬성에증직되었다. 동정공(휘 鮮)과 장남 청백리(휘 遂智), 차남 수화(遂和), 손자 이온(以溫), 이관(以寬)의 제 향은단소제향후묘소에서봉행되었다. 청백리 휘 수지의 장남 이온(以溫)은 진사(進 士)시에 합격 후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으며, 손 자 휘 곤손은 갑산교수이고, 휘 후생(厚生, 敎 授)휘인(認,중추부사),근(謹,군자감정)형제 를 두었으며 장남 휘 인(認)은 통정대부 중추부 사로그의 장남휘 천정(天挺)은 성균 진사로 임 란에 거병창의하여 군량을 책임지었다. 그 후손 들은 황탄공파(黃灘公派)라하고 세계를 이루고 광주 남구 양과동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제 향은18일(음10.11)양과동선영에서모셨다. 아우 휘 종정(宗挺)은 스스로 호를 난계(蘭 溪)라 하고, 선조9년(1576) 사마시에 등과한 후 사학 연구와 후학양성에 매진하며 당파에 휩싸 이지 않는 등 그 사람됨을 후한[後漢]의 유명한 학자곽림종에비유되기도했다.후에사림의천 거로 장원서 별제와 계사년(1593)에 황원(현 영 암군의 일부) 목사를 역임하고, 정유재란(1597 년 )에 아 버 지 (휘 認 )와 숙 부 휘 근 ( 謹 )과 함 께 창의하여 군량미 등을 모아 해안을 따라 임금의 행재소로 향하다 영암에서 아버지에게 달려드 는적병을몸으로막다몸에상처를입어사망하 여 광주 효우동 분작산에 치장하고 뒤에 정려가 내려졌으며,제향은 19일(음10.12)광주 남구 노 대실로에소재한묘소에서봉행되었다. 청백리공의 차남 회산공(懷山公)의 휘는 이량 (以良)으로 1 447년(세종29) 광주에서 태어나 성 종 조에 사 마시 에 올 라 지평 과 선박 과 군함 의 관리 를 맡 아보 던 전 함사 (典艦司) 제검 (提檢, 정4품) 을지내다연산군이폭군의근성이발동되어국정 은 뒤로 한 채 쾌 락(快樂)과 황음 (荒淫)에 빠 져있 음에 은거(隱居)하며 불취(不就)하고 후학을 가 르치는데 매진하다 중종조에 사림(士林)의 천거 로세자좌빈객이되고이조판서에올랐다. 회산공은 성종 25년(1494) 광주에서 처음 보 성읍 택촌마을로 이거하였으며, 중종 12년(151 7 , 정 축 ) 회 산 공 이 서 거 함 에 회 천 면 객 산 리 자 좌 (子坐)에 예장(禮葬) 되었으며, 제향은 난계공 과같은날인19일봉행되었다. 함양박씨 동정공의 이번 시향은 사후(死後)57 7주기를맞은날이기도하다.재순회장은이날박 하진 현종이 3代가 참례하였다며 정말 반갑고 감 사하다며앞으로도더많은가족이자녀들과함께 찾아선조님의음덕을기렸으면한다고말했다. 함양박씨동정공파시향봉행븣 동정공(17일),양과동선영(18일),난계공·회산공(19일) 동정공파 주요 유적. 함양박씨1파군기소감공(휘지문)의아들휘경을비롯한5대 (代)설단의제향이원갑대종손의초헌례와광호,재길현종순 으로헌작하고영용현종의독축으로지난17일봉행되었다. 동정공 묘소 시향 제관-왼쪽부터 영용 축관 전석 종헌관, 영훈아헌관,재순초헌관,환영집례順 밀성박씨 충헌공 후(后) 참찬공파 화성문 중(회장 명준)은 지난 18일 경기도 화성시 팔 탄면 구장리 613-11에 소재한 사효재에서 입 향(入鄕)500주년 기념식을가졌다. 이날 기념식은 참찬공의 손자 인효(仁孝) 공 을 비롯한 선조 시향을 봉행하고 입향 고유제와 입향500년 약사보고,유공자 표창,피로연순으 로 진행된 가운데 명준 회장은 기념사를 통해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음을 항상 조상님께 감 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감사하는 마음은 사 람이 살아가는 도리요, 그것을 표시하는 것이 제사”라며“우리가입향조500년동안선조님이 살아온 삶을 재조명하고 선조님들에게 욕됨이 없는 삶을 살도록 하자”고 강조했다.참찬공파 화성문중은 구장리 입향 500년 동안 지역의 유 풍을 일으키며 학행과 충효로 지역민을 선도하 며대대로명현선조를배출하였고,근세에이르 러서는박사와변호사,행정고시를합격한종원 들을다수배출하여이날기념식에서지난2003 년 법원행정고시에 수석합격 한 만준(晩濬) 종 원과 2018년 변호사 시험 에 합 격 한 황준(皇濬) 종원에게 표 창이 수여됐 다.한편이날 행사에는 박 원준 수원향 교 전 교 를 비롯하여 박 광 수 ( 판 서 공 后) 현종과 종원 100여명 종원과 주민들이 참석입향500주년을자축하였다. 참찬공파 화성문중 입향 500주년 기념식 가져 사효재 시향 봉행 및 유공자 표창 등 박명준 회장이 문중의 위상을 높이는 데 공헌한 종원에게 표창패를 전달하 고 함께하고 있다.(사진 왼쪽부터 만 준의 아버지 상찬, 명준회장, 황준 변 호사)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