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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삼가(三嘉)의 유학(助學) 박종순(朴宗淳) 박재형(朴在灌) 등윤 삼가 재계 목욕하고 순 상(젠相) 합하(閒下)에게 백배(百拜)하고 서면으로 외견을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하건 태, 이치에 맞'^1 않고 소송하거를 좋아하는 무리는 세상에 혹 였지만, 권현(權現)-권병 대(權秉大)와 같이 심한 자는 있지 않았습니다. 본현(本縣, 三嘉縣) 대평면(大첼面) 송.7il촌(松肯村)은 저희가 대대로 살아온 옛터언 데, 저의 11세 선조언 이조참판 휘 총(願), 호 졸당공(쐐堂公)께서 처음으로 이곳에 우거(萬居)하셨숍녀다. 마을 앞에 한 구역의 풍글고 과지막한 산이 있는데, 산세가 매 우 기이하여 대(臺)를 쌓고 소나무률 섬어 밤낮으로 거닐었습니다. 옥산정(玉山훔)이 라 명명한 것폰 아마도 ‘옥산(玉山)이 저절로 무너졌다’1)는 뜻에서 연유한 것일 것엽 니다. 대대로 이 정자툴 지켰는데, 7세조 승지공(꿇冒公) 휘 천우(天祐), 진사(進士)로 서 의령 현캄(宜寧縣藍)을 지낸 휘 천거(天雄), 교수(鼓授)로서 휘 서귀(瑞龜) 호 악견 (좁堅) 세 종형제 또한 일찍이 이곳에서 놀면서 쉬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임진·계사년의 난리에 승지공은 망우당(忘憂堂) 곽채우(郭再祐) 선쟁, 대소헌(大笑幹) 조종도(趙宗道) 선생과 함께 의병을 웰으켜고 이 정자 아래에 와서 술 을 마셨다. 그리고 술잔을 합고 죽기를 맹세하는 사구가 『섭총록(十忠緣).n에 상세히 살려 있고, 『여지승람(與地勝寶).n어I 분명히 드러나 있숍니다. 그렇다면 이 소나무가 정차가 된 것은 다른 일반적인 곳외 울창한 쩡차와 차이가 있습나다. 또한 저희 션조 가운데 여넓 개의 인끈을 동시에 정자에 건 일이 있어, 또한 팔인정 (八印훔)이라 명명하였습니다. 더구나 션배들아 노래하고 서를 옳으며 지팡이 집고 거 닐던 곳아니 어른들이 서로 전하여 소당의 나무는 베지 말라2)고 옳고 사우(士友)들은 분명히 보고 청도(鄭挑)가 뽑지 않은 것을 흡모했으나, 비단: 자손들아 존종할 뿐만 아 니라 걸율 가는 사람 가운데 누가 박씨(朴民) 집안에서 대대로 지키는 청자라는 것올 모르겠숍녀까? 불행히도 중칸에 문중의 운세가 크게 변하여 몇몇 자손들은 각기 다른 곳으로 흩어 져 캘국 옛 터를 벼워두게 되차, 팔 다른 사람이 들어와 살았습나다. 그리고 두 번 지난 무인년에 이 마을의 권씨(權民) 성을 가진 사람이 기회를 픔타 청자 아래에다 몰래 묘를 썼는례, 누구의 무렴언지 알갖l 못하였다가 몇 년아 지나서야 겨우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알고 난 뒤에 어찌 묘롤 파내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마논 대대로 같 1) 진(音)나라 때 산간(山簡)이 술을 매우 좋아했던바, 그가 일찍이 양양 태수(義陽太守)로 았율 척에 현 산(限山) 아래 위치한 습씨(習民)의 양어지(養魚池)가 매우 경치가 좋아서, 매일 그곳에 나가 온종일 술을 마시고 곤드례가 되어 돌아오곤 하여 풍류를 만끽했는데, 이백(李白)온 「양양가(賽陽歌)J빼셔 산 간을 두고 옳기를 “맑은 마량 밝은 달은 한 훈 돈이라도 들여 살 것 없고, 옥산은 스스로 무더졌지 남이 민 게 아니로다.[淸風明月不用一鐘買, 玉山 自倒非A推.J.라고 하였다. 2) 예첨 주(周)나라 때에 소공(검公)이 행정을 잘 하여서 민심이 강북하였다. 그가 지방을 순행할 때에 어떤 아가위나무[葉] 아래에서 쉬었는데, 백성틀은 소공이 쉬던 나무라 하여 가지 하나 차르지 아니하 고 잘보호하였다 한다. ’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