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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장 제1공화국과  4‧19혁명 303 1편 정치 의 감시를 통해 관권의 개입이 어느 정도 봉쇄되어 있었다. 이 선 거에서는 관권의 무제한적 개입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6) 또 하나 의 특징은 처음으로 의원후보자 공천제(정당공천제)가 시행되었 다는 점이다. 이 제도는 정당이 공천한 국회의원 입후보자 외에 같은 정당에 소속된 사람이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는 것을 막기 위 해 시행된 것이었다.7) 이때까지 정당 정치가 막 시작된 터라 정당 제도가 아직 뿌리내리지 못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는 다 양한 정책을 가진 정당이 존재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일부 정당을 제외하고는 무너져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정당 소속 후보로는 이 승만 대통령이 총재로 있던 자유당과 야당인 민주국민당 소속이 많았다. 그러나 이보다도 무소속 후보가 66%에 달할 정도로 압도 적으로 많았다. 203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선거에 1천 2백 7 명이 출마하여 평균 5.9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8) 안동 갑구에는 모두 7명이 출마했는데, 자유당과 국민회 소속을 제외하고는 모 두 무소속 후보였다. 안동 을구에는 출마한 5명이 모두 무소속 이었다. 입후보자의 현황과 이들의 주요 경력은 다음의 [표2]와 같다.9) 6) 박태균, 「1954년 제3대 총선과 정치지형의 변화」, í��역사와 현실��17, 한국역 사연구회, 1995, 201~207쪽. 7)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대한민국선거사(1968년 증보판)��, 1968, 473쪽. 8)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대한민국선거사(1968년 증보판)��, 1968, 905-906쪽. 9)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역대 국회의원 선거상황��, 1989, 2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