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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장 6‧25전쟁과  안동 231 1편 정치 정부는 서울을 빼앗긴 뒤에도 체계적인 피난민 철수대책을 수 립하지 못하고 허둥대고 있었다. 먼저 동년 7월 8일 「비상계엄령」 을 선포하고 7월 9일 군사작전에 수반되는 피난민 관계를 신속하 게 처리하기 위해 육군본부에 민사부를 설치하였으나 전장의 이 동속도가 급변하여 효과적으로 피난민을 통제하기는 어려운 상 황이었다.7) 이와 같은 정부의 조치와 지시에 따라 경상북도에서도 경북지구 사령부와 경북 경찰국이 긴급 군‧경 합동회의를 개최하였다.8) 여 기에 경북지구사령부의 이한림 대령, 박금윤 중령, 이기건 중령, 경 북 경찰국의 최치환 총경, 박충근 경감 등이 참석하여 식량 및 유 류 확보 문제와 전시상황에 대한 토의를 갖고, 비상사태대책에 관 한 지휘관회의를 열어 공산 오열 검색, 후방치안 유지, 공산군의 침투 분쇄 등 전시태세를 갖출 것을 촉구하였다. 경북 도경에서는 내무부에 즉각 행동방침을 문의한 후 경찰병력 을 경북 경찰국에 집결시키기 위해 비상 소집명령을 내렸다. 그 러나 비상소집에 응한 경찰이 적어 소대 병력 정도만이 집결하였 을 뿐이었다. 도경에 집결한 경찰은 즉시 비상근무체제에 돌입하 여 비상근무규칙 즉, 식량 확보‧생활필수품 통제‧이재민 수용‧기 일단 대구까지 내려갔던 이박사가 다시 북상하자고 하여 같은 날 하오 대 전까지 되돌아 왔습니다”고 하였다. 7) 국방부, 「일반명령」제40호(1950.7.9). 8) 대구시사편찬위원회, í��대구시사��2, 1995, 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