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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장 1920년대  이후  국외  안동인의  항일투쟁 185 1편 정치 국관헌에 검거되어 일본에 인도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재만책진 회와 재만한인반제국주의동맹은 해체되었다. 이상룡은 1930년 서란현 소성자촌小城子村에 은거하다가 소과전 자촌 燒鍋甸子村으로 다시 자리를 옮긴 뒤, 만 74세가 되던 1932년 음력 5월 12일 순국하였다. 이 무렵 김동삼은 국내로 이송되어 평양형무 소에 갇혔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1937년 김동삼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일제강점기임에도 불구하고 한용운의 주 도로 사회장이 치러졌고, “내가 조국에 끼친 바 없으니 죽은 뒤 유 해나마 적 치하에 매장하지 말고 화장하여 강산에 뿌려 달라”는 옥 중 유언에 따라 그의 유골은 한강에 뿌려졌다. 1930년대 만주지역에서는 좌파 청년들의 활동이 강하게 나타났 다. 이미 1920년대 중반부터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활동이 두드 러지기 시작했지만, 특히 1930년대에 들면서 중국공산당이 한인 공산주의자들의 역량에 눈길을 보내기 시작할 만큼 왕성한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에 의열단 출신이던 이동산李東山(본명 權正弼)이 ‘제 1차 간도공산당사건’ 이후 조선공산당 만주총국(화요파)의 책임비 서를 맡았다. 마침 1930년 3월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화요파는 ML파와 더불어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고 밝혔다. 이제 조선공산당원들은 모두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구성원이 된 셈 이다. 당시 만주지역 2,000여 명의 중국공산당원 가운데 한인 당 원이 80∼90%를 차지하였다. 안동출신 청년들도 사회주의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특히 이준형 ‧이광민‧이광국‧이병화 등 이상룡 후예들이 핵심을 이루었고, 김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