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page

2018년10월31일 수요일 12 (제142호) 기획 사후(死後)에그이름및행적을나타내거나어떤사적(史蹟)이나업적또는사실(事實)을돌에새겨널리알리 고추모하는것은후예의도리이다.그 러나신라시조대왕의후예인우리는시조대왕사후1700여년이지났음에도비석에글한자새기지못하였고, 위판에‘王’자(字)조차새기지못하였 다.이에임금에게소(疏)를올린후경채10만냥을마련하여비를세우고,위판에왕자를새길수있도록소(疏 )를올리는데동참하여실현시키고, 밀 성대군후예의최초대동보신유보(辛酉譜)를발간한동고(東皐)박윤현(朴胤玄)만와(晩臥)박윤광(朴胤光)형 제분의아름다운행적을행장과입비 (立碑)소(疎)등을통해알아본다. 동고(東皐)·만와(晩臥) 공은 밀성대군의 후예 로 13대조 행산공(杏山公)은 양효공(良孝公) 간 (幹)의 차차(次子)로서 은산부원군 휘 영균의 동 생으로 고려 충혜왕 때(1340년경) 태어나고, 휘 (諱)는 세균(世均)으로 고려조의 보문각 태학사 이며 전문형(典文衡,정2품)과 중국 元나라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내고 귀국하여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오르고, 밀성부원군(密城府院 君)에 봉해진 후 사후 시호(諡號)는 충정(忠靖) 이고,아들 도은공(挑隱公,휘 文彬)과 소감공(少 監公, 휘 文翊)형제는 포은(정몽주),목은(이색) 등의 문인들과 교류하는 등 높은 학덕으로 목은 선생의 시(詩)에도 전해지듯 당대의 거유(巨儒) 이고, 행산공의 삼부자를 가전삼학사(家傳三學 士)라 칭하고,공민왕이 하사한 광효(光孝)두 글 자는효(孝)의가문임을엿볼수있다. 고조부의 휘는 수춘(壽春), 자는 경로(景老), 호는국담(菊潭)이다 국담 선생의 삶은 충(忠), 효(孝), 인(仁), 예 (禮)를 친행(親行)한 생애(生涯)라 하겠다. 정유재란에 격문을 돌리고 의병을 일으켜 망우 당 곽재우와 함께 창녕 화왕산성을 고수(固守)하 였고, 광해가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 에 유폐(幽廢)시켰을 때 간신배의 기세가 하늘에 닿았으며 명유(名儒)들이 쫓겨나고 온 조야(朝 野)가 진동(震動)해도 이에 대해 말하는 이가 없 으니 선생은 홀로 소를 지어 대궐에 나가 극언(極 言)하고간신배들의죄상을역설하였다. 丙子年 청나라에 의해 서울이 함락되자 의병을 일으켜 北上중에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를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선생은 침식을 잊은 채 (入山甘作崇禎士 處世羞爲丙子民-산에 들어가 숭정사 되려한다. 병자년 백성으로 세상 사는 게 부끄럽다네.)라는 시로서 분통과 충절을 표출하였으며 그 후로는 세상사와 단절하고 산중 에서 학문을 닦고 강론하며 후학을 양성하는 데 에만 전념하는 등 일신(一身)과 집안의 위험을 무릅쓰고오직의(義)를위해헌신한것이다. 그리고 선생은 효성에 지극하였고 뭇사람들에 대한 교화(敎化)에 심혈을 기울였을 뿐 만아니라 성리학의학자였다. 1625년(효종3) 11월 8일에 81세를 일기로 고종 (考終)하니 사림(士林)들의 애통함이 친상(親 喪)을 당하듯 하였으며 야노산승(野老山僧) 까 지도눈물의바다를이루었다한다. 증조 휘 뢰( )는 좌승지를 증직 받았고, 조부 는 휘 진공(振 )이며, 아버지 휘 성징(聖徵)으 로 호(號)는 시재(蓍齋)로 연륜이 높아 가선대부 동중추부사에 가자되었고,어머니는 정부인 광산 이씨이다. 양(兩) 형제분의 탁월한 숭조심과 형제애 그리 고 고운 심성은 선조의 충과 효 그리고 절의 정신 에서비롯된듯하다. ▲동고(東皐)박윤현(朴胤玄) 선생은 1696년(숙종 22) 달구벌 남산리(현 청 도군 각북면 남산리)에서 태어났다. 휘(諱)는 윤 현(胤玄), 호(號)는 동고(東皐)이다. 어려서부터 영명하고 준수하여 재주와 능력이 있었으며, 처 음부터 중부(仲父) 술재공 몽징(述齋 蒙徵)을 따 라서 학문과 예능을 배워 일찍이 성취하였고, 또 한 글씨를 잘 써서 사람들이 다투어 그 글씨를 보 배로 여겼다. 비록 관직을 맡지는 못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그러한 얻고 잃음에 마음을 두지 않 았으며, 일찍이 서울을 오가면서 어울린 사람들 대부분이 당시의 이름난 고관이요 임금 곁의 실 세였으나, 오로지 조상 위하는 일로써 서로 의지 하고 도왔을 뿐이고 무슨 딴 뜻을 가지고서 윗사 람들을일부러만나진않았다. 그 힘을 다한바는 오로지 조상의 유업을 계승 하고 종친을 돈목시킴에 있었으니 일찍이 원근의 친족을 이끌어서 세덕사를 짓고 시조를 비롯한 그이하의여러현인을제사지냈다. 그리고 족보를 간행하지 않음을 한으로 여겨서 친족들과 의논하고 힘을 다하여 1741년 밀성대군 의 후손을 모두 실은 최초의 대동보 신유(辛酉) 보(譜)를발간하였다. 이 두 가 지 일 은 수 백 년 동 안 해 낼 겨 를 이 없 었 으나실로공의힘에기반하여해낸것이다. 그리고 선생은 서당을 세워서 선비들과 벗들을 불러 모으고, 가르치고 배우는 모범을 크게 펼쳐 서 한 지방에 오롯한 기풍을 일으킴으로써 선조 를 계승하고 후대를 복되게 하는 일이길 기대하 였다. 그 뜻한바가 아주 부지런하고 진지하였기 에 결 국 그 의 지 를 지 켜 낸 모 습 을 볼 수 있 는 것 이 다. 1750년(영조 26) 영면하니 선생의 높은 뜻을 추모하지않은이없었다. ▲만와박윤광(晩臥朴胤光) 선생은 1698년(숙종24)년에 태어났으며, 휘는 윤광(胤光), 字 자술(子述) 만와(晩臥)는 호(號) 이다. 통덕랑(通德郞)이고, 글을 읽으며 의롭게 살았음으로 해서 그 형인 동고 선생과 더불어 같 은 시기에 같이 이름이 드러났으니 그 형과 아우 를구분하기어렵다고들했다. 두 살터울인 형제를 보면 재주, 그 기상, 그 높 은 뜻은 같이 말달리면서 서로 나란히 맞추어 달 리듯 했으리라, 어려서부터 책상을 맞대어 같이 공부했으며, 다투어 매진하고 같이 정진 하였다. 안으로는 부모님을 모시고 가정을 가꾸며 바깥에 서는 사귀어 왕래하고 응접하니 형제가 그 어느 하나같이어울리지않음이없었다. 서로 필요하고 서로 도움 주었으니 질 나발과 피리가 어울리는 음악처럼 화락하고 유쾌하기가 그지없었다. 그래서 세덕사를 짓고 족보를 간행 하 고 서 당 을 여 는 것 역 시 모 두 같 이 한 것 이 니 더 불어의논하고같이힘써서이룩한것이다. 선생은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결국 회 시에서 실패하였다. 그래서 벼슬할 뜻을 과감히 접고 동녘 산자락에 정자 하나를 세우고서 ‘만와’ 라고 편액을 달고서 늙어 마칠 때까지 지낼 뜻을 보였다. 동고공은 이를 위해 기문(記文)을 지었 는데 자신의 뜻과 맞았기에 기문 짓기를 허락한 것이므로 그 지향하는 바가 서로 일치했음을 알 수있다. 동고공이 돌아가시니 무릇 선조를 밝히고 빛내 는 일에 있어서는 자기 임무라고 욕심내었건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다. 그래서 선생이 종친들을 이끌고서 시조 임금 사당 숭덕 전에 비를 세워 그 공적을 찬술하자고 상소하여 임금의 허락을 받았다. 또 상소하여 고조 국당공 과 중부(仲父)술재공에게 포상하는 은전을 내리 기를 청하였으나 이 모두가 애쓰는 마음과 참된 정성에서우러러나온것이다. 선생은 속에 품은 학식이 많았기에 이것이 글 과 말에 드러났던 바 그 단아하면서도 해박함으 로써 많이 알려질 만 했다. 그러나 화재로 인하여 남아있는것이몇되지않으니한탄스럽다. 1751년 영조(27) 시조대왕의 비(碑)가 전해지 지 않음을 안타깝고 한탄(恨歎)스러워 하면서 소 (疎)를 제기하고 경채 10만냥(현 환율가치 40억 여원)을 얻어 비를 세우는 등 전대미문의 큰 일 을해내기도하였다. 1770년(영조46) 11월 11일 영면하시니 모두가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와유고(晩臥遺稿)가 전해진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주(周)나라 무왕(武王) 이 황제(皇帝)와 요순(堯舜)의 후손(後孫)을 찾 아서 삼각(三恪)을 삼아서 그 제사를 받들게 하 셨으니 聖人이 덕(德)을 높이고 끊어진 혈통을 이어 주신 뜻이 실로 아름답다 하겠습니다, 우리 성조(聖祖)가 주(周)나라와 함께 아름다움을 함 께 하시와 전대(前代)의 임금을 공경하고 숭봉 (崇奉)함이 천고(千古)의 아름다운 자취를 본받 아서 평양의 숭인전(崇仁殿)과 마전(麻田)의 숭 의전(崇義殿)과 경주의 숭덕전(崇德殿)을 세워 서 처음 건국(建國)한 임금의 공덕(功德)에 보답 (報答)하는 법전(法典)이 주대(周代)의 삼각(三 恪)의 거룩한 법(法)과 같이 지극하나 신(臣) 등 이 나름대로 약간의 하소연하고저 하는 바가 있 사와 감히 천리(千里)길에 발을 싸 동이고 구중 궁궐(九重宮闕) 존엄(尊嚴)한 곳에 와서 하소연 하오니 원하옵건대 신라 시조왕께옵서는 하늘이 내리신 신인(神人)으로 동경(東京)에 오읍하사 사방(四方)을 개척(開拓)하시와 공(功)이 삼한 (三韓)에 으뜸됨은 역사(歷史)에 소상히 실려 있 으므로 되풀이할 것도 없사옵고 이곳 영남(嶺南) 은 실 로 우 리 나 라 근 본 되 는 땅 으 로 그 백 성 이 후 덕 (厚 德 )하 고 진 실 하 여 끼 친 풍 속 ( 風 俗 )이 오 히 려 남아 있사오며 하물며 큰 가뭄 「한(旱)」을 당 하면 지금도 숭덕전의 나정(蘿井)에 기우제(祈 雨祭)를 올리면 받드시 영험(靈驗)이 있으니 하 늘에 계시는 정령(精靈)이 남몰래 우리나라와 백 성을보우(保佑)하심을알수있습니다. 옛적에 우리 세종대왕께서 특히 시조왕릉의 황 폐(荒廢)함을 진념(軫念)하시와 묘전(廟殿)을 세우시고 또한 경종대왕께서 숭덕전(崇德殿)의 전호(殿號)를 하사(下賜) 하시와 성손(姓孫)으 로 참봉을 삼아 전수(典守)하게 하시니 또한 숭 인전에 기자(箕子) 후손(後孫)인 선우씨(鮮于 氏)로 참봉을 삼아 수호하게 한데서 따른 것으로 숭봉(崇奉)하는 법전(法典)이 거의 유감(遺憾) 이 없다 하겠사오나 가만히 있어서 높은 공덕을 찬양하여 뒷 세상에 전하였느니, 천백년 뒤에도 누구인들 우러러 높은 덕(德)을 상상(想像)하지 않으리오 마는 홀로 숭덕전(崇德殿)만은 아직 비 (碑)가 없어서 한 산언덕이 황폐된 능(陵)이 헛 되제 길손들의 개탄(慨歎)하는 바가 되오 왔기 때문에 일찍이 병인(丙寅)에 도신(道臣, 감사) 김상로(金尙魯)가 장계(狀啓)하여 묘표를 세우 라는 비답(批答)을 받았사오나 아직까지 거행 (擧行)되지 못하여 지금에 이르렀기로 신(臣) 등 이 신라왕의 후손으로 개연(槪然)한 마음을 금치 못하여 이에 사사로이 재력(財力)을 모아 묘비 (墓碑) 세우기를 꾀하였으나 나라의 존봉(尊奉) 하는 곳에 감히 사사로이 할 수 없어서 이에 소회 (素懷)를 말씀 올려 윤허(允許)를 청하는 바이오 며 또한 다시 생각하오매 시조왕께서 인문(人文) 이 미개한 시대에 처음으로 동방(東方)의 임금이 되시었고 왕(王)의 후손중에는 여러 번 성대(聖 代)의 왕비로 책봉되시기도 하셨으니 국가(國 家)의 숭봉하는 법전도 마땅히 전조(前朝)의 여 러 왕릉(王陵)과는 다를 것이옵기로 전번 임자년 에 별관을 보내어 본전(本殿)에 치제(致祭)하심 이 실 로 숭 봉 (崇 奉 ) 하 는 성 의 (聖 意 )에 서 나 온 줄 사료(思料)됩니다. 신(臣) 등이 성은(聖恩)에 감격(感激)함이 더 욱 자별(自別)하오나 다만 전수(典守)하는 능 관(陵官)을 예조에서 직첩(職帖)을 발급(發給) 하니 관직이 임시직으로 받는 사람도 중하게 여 기지 않아서 수호(守護)하는 범절(凡節)이 왕 릉의 체모(體貌)를 이루지 못하여 조정이 관원 을 두어 수호하는 본의(本意)에 어긋나고 또한 숭인전의 참봉관을 정주(政注)에서 임명하는 것과도 다르오니 사체(事體)를 중히 하는 뜻에 서 혹이나 잘못이 있는 듯 하오니 원하옵건대 저 하(邸下)께옵서는 특히 살피시옵고 괘히 명령 을 내리시와 묘표(墓表)를 세울 것을 윤허(允 許)하시옵고 전(殿)을 지키는 관원(官員)도 또 한 비삼망(備三望)하여 실직(實職)으로 임명하 시와 금호(禁護)하는 직책(職責)을 중하게 하 시면 성조(聖朝)의 지극하신 어진 덕(德)이 더 욱 삼각(三恪)의 성전(聖典)에 빛날 것이옵니 다 . 신 ( 臣 ) 등 이 황 공 ( 惶 恐 ) 하 여 몸 둘 바 를 알 지 못하옵고 비는 바이오며 삼가 죽음을 무릅쓰 고 올리나이다. 1751년(辛未)3월 소수(疏首)박윤광(朴胤光) 답(答) 올린 글은 보았노라 진정(陳情)한 사연 은 해당(該當)관청(官廳)으로 하여금 품의(稟 議)하여처리(處理)하도록하리라 【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 73권, 영조 27년(1751) 3월 12일 기유 3번째 기사 「영남 유학 박윤광이 신라의 시조왕 묘에묘표세우는일을허락해줄것을청하다」 『嶺南幼學朴胤光上書, 請新羅始祖王墓許竪墓 表,東宮令該曹稟處』 영남(嶺南) 유학(幼學) 박윤광(朴胤光)이 상 서(上書)하여, 신라(新羅)의 시조왕묘(始祖王 墓)에 묘표(墓表)를 세우는 것을 허락해 주기를 청하니, 동궁(東宮)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 (稟處)하게하였다. 영조실록 74권, 영조 27년(1751) 7월 26일 경인 2번째 기사 「이조에서 숭덕전의 전감을 영으로 승진시킬것등을청하다.」 『吏曹啓曰: "崇德殿設置殿監, 準限陞令, 使道 臣以其嫡孫狀聞差下, 一依崇仁殿例, 定式施行。 "上可之。蓋因嶺南儒生朴胤光等上書請之也』 이조(吏曹)에서 아뢰기를, "숭덕전(崇德殿)에 설치한 전감(殿監)을 연한을 기준하여 영(令)으 로 승진시켜,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그 적손(嫡 孫)으로서 장문(狀聞)하게 하여 차하(差下)하게 하되 한결같이 숭인전(崇仁殿)의 준례에 따라 정 식(定式)하여 시행하소서."하니,임금이 옳게 여 겼다. 대개 영남(嶺南)의 유생(儒生) 박윤광(朴 胤光)등의상서(上書)로인하여청한것이다. 동고(東皐, 휘 윤현)·만와(晩臥, 휘 윤광) 형제 분은 밀성박씨 최초의 대동보인 신유보(1741년) 를 발간하였다. 그리고 1751년 시조왕릉의 비 (碑) 건립의 당위성과 시조왕위판(始祖王位版) 에왕자표기에대해상소하여이를관철시켰다. 시조왕릉의 비(碑)는 동고·만와공 형제의 수창 으로 당시 10만냥(현재 금액 40억 상당)의 경채 를 차입하여 세우게 된다.비(碑)는 높이 3.1m,너 비 1.16m,두께 0.51m이다. 영조 27(1751)년에 경주 남쪽 70리 지점인 치 술령 서쪽 기슭에서 석역(石役)을 시작하여 승군 (僧軍) 1,500여명을 동원하여 2년여에 걸쳐 비신 (碑身)을 전(殿) 앞까지 운반(運搬)하였다. 그후 비신(碑身)과 두 개석(頭蓋石) 좌판(坐板)을 다 듬어 비문을 쓰고 각자를 하는데 8년간의 긴 작업 끝에 완공하였다. 이 비(碑)에는 대제학 조관빈 (大提學 趙觀彬)이 글을 짓고 판부사 유척기(判 府事 兪拓基)가 전(篆)을 쓰고 지의금(知義禁) 홍봉조(洪鳳祚)가세자(細字)를썼다. 숭덕전에 모셔진 시조대왕의 위판은 임진왜란 이후 신라시조(新羅始祖)라고 만 되어 있었으나 만와공을 비롯한 성손 217명의 소(疏)에 의해 신 라시조왕(新羅始祖王)이라 하였으니 우리 후손 들에게는 엄청난 자긍심을 부여하는 계기가 되기 도한다. 위판 왕(王) 자(字) 개제소 일부를 소개해 본 다. 『불행히 임진병화(壬辰兵火) 뒤에 위판(位 版)을 다시 고쳐 쓸 때 다만 신라시조(新羅始祖) 라고 쓰고 왕자(王字)를 넣지 않았는데 조정에서 내 리 는 축 (祝 ) 에 는 신 라 시 조 왕 (始 祖 王 )으 로 쓰 여 졌으니 왕(王)의 칭호를 쓰고 안 쓰는 것은 얼 마나 중대(重大)하온대 축(祝)에는 쓰고 위판 (位版)에는 쓰지 않았으니, 어찌 크게 예절에 어 긋나고 체모(體貌)를 손상하지 않겠습니까.』라 고하였다. 어떤 이는 미관말직으로 역사서에도 나타나지 않음에도 관직을 고려태사 또는 시호 등 그 행적 을 조작하거나 미화하여 거북좌대에 용수의 거대 한 비석으로 치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두 형제분 은 평 생 숭 봉 (崇 奉 )하 는 것 을 업 (業 )으 로 삼 았 음 에도 두 분의 기적비 건립사업은 미진하다. 이에 최근 행산공파 대종회 중희(仲熙)회장을 중심으 로 직손(直孫) 권흠(權欽) 前국회의원, 동고공의 종손 재철(載喆), 만와공의 종손 병흠(秉欽) 현 종이 합심하여 두 형제분의 공적이 드러나고 있 어 기적비 건립에도 관심 사안으로 떠오르고 있 어기대해본다. 신라시조대왕 비(碑)를 수비(竪碑)한 박윤 현·윤광 형제 선조 유지를찾아븣 동고(東皐)·만와(晩臥)공(公)의선원세계 지난2017년9월행산공파주관으로동고·만와공의묘역성묘행사를갖고참석한종원들이함께하고있다. 숭성각-신라시조왕의묘표(숭성비)와비각. 묘 표(숭성비) 1741년 밀성대군의 후손을 모두 실은 최초의 대동보 신유 (辛酉)보(譜) 동고·만와공묘역-경북청도군풍각면승마산. 동고(東皐)·만와(晩臥)공(公)의생애 시조왕릉입비소(始祖王陵立碑疏) 맺음말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