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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선생은 벼슬을 던지고 고향으로 내려와 애국동지를 규합하하더니 융희 2년 무신(1908) 3월에 박동의, 서명국, 손재식, 장우만, 송경도, 김동신 등 동지와 경남 일대에서 의병 6백여명을 모집하고 부서를 정하니 박동의는 대장이 되고 선생은 부장이 되었다. 높이 기치를 들고 경남 각읍에서 왜적을 무찌르다가 동년 8월에 선생이 대장으로 추대됨으로써 사기는 가일층 진작되어 산청에 있던 왜의 헌병수비대를 격파하고 익년 2월에 또 왜의 합천 주둔군을 격파하였으며 4월에 함안으로 진병하여 군화시장에 경고문을 붙이고 왜의 수비대에 발송함으로써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고 6월에 칠원의 왜인들을 습격하여 가옥을 파괴하고 무기를 포획하였으며 9월에 왜인관리를 사살하고 무기와 기밀문서를 노획하였고 10월에 의령의 왜상인을 11월에는 고성에서 왜의 세리를 습격하고 세금을 압수하여 군자금으로 충당하는 한편 백여명의 병력으로 왜의 진주 분견대를 격파하였고 다시 지리산 지구의 문태수 의병장과 합세하여 함안으로 진격하였으나 때마침 유한풍의 계절이라 날씨는 춥고 장병들은 피곤하여 수많은 왜적들의 신무기 앞에는 중과부적이라. 부득이 장병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후일을 기다리던 중 융희 4년 경술(1910)에 국치를 당하자 가야산 염석봉에 「망한대」를 쌓고 통곡하면서 「望眼遥穿漢北來江山遺恨且銜盃」(한양 바라보는 눈 뚫어질 듯 하구나! 이 강산 끼친 한을 술잔으로 달래보세!)란 시구를 남겼다. 을미년(1919)에 광무황제가 붕어하자 선생은 종신토록 백립을 벗지 않았는데 이 사실은 이제서의 〈호관자전〉이나 류소민의 〈祭先生文〉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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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불행히 왜경에게 피체되어 10년형을 받고 투옥되었다가 갑자년(1924)에 병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와병중에도 후진들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워주었다. 임종때 자질과 제자들에게 명하여 「光武遺臣李學魯之柩」(광무황제의 끼친 신하 이학로의 널)라고 명정을 쓰게 하고 갑술년(1934) 10월 초 11일에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치니 묘는 池內門山長嶝甲坐(지내문산장등갑좌)에 있다. 배는 증유인 수원김씨니 사인 덕의 여로 부덕이 있었고 묘는 합분이다. 2남 1녀를 두었는데 남은 기창, 기명이요. 서는 부계예 동환이며 기창의 남은 종남, 종욱, 종준이요, 서는 월성 김찬권, 밀양박 동홍이며 기명의 남은 종철, 종윤이요. 서는 경주 이희근, 현풍 곽홍준이다. 종남의 남은 철순, 성순이요. 종욱의 남은 용순, 인순, 우순이며 종준의 남은 익순, 항순, 극순이고 종철의 남은 혁순, 기순이며, 종윤의 남은 승재이다. 오호라. 선생이 세상을 떠나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