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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9월30일 일요일 6 (제141호) 기 획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명방촌에 있으며 세거(世居)하는 밀 성박씨 일문(一門)이 선조(先祖) 삼사좌윤공(三司左尹公) 휘 (諱) 을재(乙材)를 주벽(主壁)으로 태안부원군 휘 원의(元義), 초암공휘린우(麟祐),정국군휘위( 쭈),구산군휘천( 횡),청백 리이자 이조정랑 휘 수(粹), 창원군 휘 령(齡)을 7현 중조(七賢 中祖)로 경내의 경현사(景賢祠)에 위패를 봉안하고 추모향제 (追慕享祭)하는 재숙소로 삼사좌윤공의 26世 후손 귀흠(貴欽, 대륙재관 총회장),27世후손 창규(昌圭)등의 주간(主幹)으로 1 995년乙亥에후손의성력창건(誠力創建)한집으로재호(齋號) 는모아재(慕雅齋)이다. 대문(大門)으로 상례문(尙禮門),7현(賢)중조의 위패를 모신 경현사(景賢祠)와삼문,재숙소인모아재화장실등5동의건물 로되어있다.모아재는정면6칸측면3칸의팔짝지붕이며,경 현사는정면3칸측면2칸으로맛배지붕이며출입문은삼문으 로염수문(念修門)이라하였다. 경내에는 표성비, 대동보 발간 및 모아재와 경현사 창건을 주도하며 건축비의 대부분을 헌성한 귀흠 회장의 사적비, 종 사에 혁혁한 공을 세운 만취공(晩翠公)휘(諱)창규(昌圭)현종 의 기적비,1987년 창절사 사우 복원과 1991년 선대 묘역 의물 (儀物) 봉수(奉竪)와 모아재 건립에 기여한 상엽(相燁) 현종의 헌성비가 세워져 있다. 경외에는 7현(賢) 선생 유적비(遺績碑) 가 있 다 . 삼사좌윤공파(三司左尹公派) 파조(派祖)의 휘(諱)는 을재 (乙材) 호(號)는 아천(雅川)으로 려조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좌윤과 명종조에 이르러 밀직부사(密直副使, 정3품)에 올랐다. 밀성대군의 7세(世)이다. 밀성대군의 아들 요동독포사 휘 란(瀾)의 아들 5형제 중 넷째 휘 영후(永 , 戶曹典書)의 현 손으로아버지는판각(版閣)을지낸성린(成麟)이다. 삼사좌윤(三司左尹)은 고려 시대 삼사좌사(三司左使) 다 음가는 삼사(三司)의 종삼품 벼슬로 후손들은 선조의 관직명 을따삼사좌윤공파또는좌윤공파라한다. 삼사좌윤공의 후손은 거주하는 지역(居鄕), 혹은 당호(堂 號) 등으로 고성파(高城派), 창원군파(昌原君派), 초암공파 (草菴公派), 정국군파(靖國君派), 구산군파(龜山君派), 태안 군파(泰安君派) 등 6파로 나누어졌고, 이중 창원군파는 창원 박씨(昌原朴氏), 구산군파는 구산박씨(龜山朴氏), 태안군파 는 태안박씨(泰安朴氏)로 분적 되었으나 경남 밀양의 경현사 를 중심으로 돈종돈목(敦宗敦睦)하고 있으며, 1987년 대동보 (丁卯譜)를 수보하여, 정묘보를 기준으로 세계(世系)를 고찰 (考察)해보고자한다. 삼사좌윤공(휘 을재)은 견기(堅基), 입기(立基), 덕기(德 基) 삼형제를 두면서 크게 번성한다. 장남 견기(堅基)는 형조 참의를 역임하고 판도판각에 증직되었으며, 그의 아들 회 (回)는 형조정랑으로 계증(繼曾), 계맹(繼孟), 계안(繼顔)을 두었으나첨사(僉使)를지낸장남계증과셋째사문진사계안 은 후사가 없고 차남 계맹(繼孟)으로 이어진다. 문하시중을 지낸 계맹의 아들 순철(順哲)은 중서령, 호부시랑, 밀직부사 이고, 그의 아들 인숙(仁淑)은 전의판서, 손자 길(吉)은 조선 초 태종 때 전서(典書)를 지내고 아들 수(粹)를 낳으니 이분 이 고성파(高城派)의파조가된다. 좌윤공의 차남 입기(立基)는 호부상서, 문하시중 병마원수 를 지내고 그의 아들 기(奇)는 고종 갑술(甲戌, 1214년) 문과 에급제하여주요요직을거쳐창원군(昌原君)에봉해져후손 들은창원파혹은창원박씨로분적되었다. 좌윤공의 삼남 덕기(德基)는 판각(版閣),밀직부사,문하시 중을 역임하고, 그의 아들 정구(鼎九)는 이부상서(吏部尙書) 를 지내고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지고 아들 기(璣, 大提學), 준( 燃,吏部尙書)형제를두었다. 대제학공(휘 기)의 아들 옥성(玉成, 同正)이 아들 형제 천 응(天應, 判事), 천명(天命)을 두어, 장남 천응은 다시 인식 (麟植)과 인우(麟祐)를 두었으나 장남 인식은 손자 수종(壽 宗)에 이르러 무후(无后)이고 차남 인우의 호(號)는 초암(草 菴)으로 전법판서를 지내고 병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초암 공파파조가된다. 동정공 옥성의 차남 휘 천명(天命)은 전법판서 호부시랑, 시중을 지내고, 아들 광후(光厚)는 보문각대제학을 역임하고 위( 쭈)와 천( 횡)을 낳으니 장남 위는 정국군파 파조, 차남 천 은구산군파파조로구산박씨로분적되었다. 밀산군(密山君) 휘 정구(鼎九)의 차남 준은 문하시중으로 아들 원효(元孝), 원제(元悌), 원충(元忠), 원신(元信), 원례 (元禮), 원의(元義), 원렴(元廉), 원성(元聖), 원현(元賢) 등 9형제를 두었으나 이중 장남 원효의 아들 희문(喜文)이 숙부 원의(元義)의대를이으면서아들9형제중여섯째휘원의(元 義)의후손들만전해진다. 휘원의는문과장원으로광록대부상서좌복야에오르고태 안부원군에 봉해짐으로서 태안파 파조가 되고 태안박씨로 분 적하였다. 신남서원은 1822년(순조22년) 충의백(忠義伯) 정국군(靖 國君) 박위 장군과 조선초 문신인 이조참판(吏曹參判) 박기 (朴耆)선생 부자를 봉향(奉享)하는 서원으로 장군의 14世孫 인 숭덕전(崇德殿) 참봉( 핫奉) 기성(基聖)의 주청으로 밀양 사림(密陽士林)의 공론으로모아 하였으며 사당은 상모사(尙 慕祠) 강당(講堂)은 경본당(景本堂)이라 편액하고 응교(應 敎) 강세백 선생이 상향축문을 지었으며 향례(享禮)는 仲春 秋季丁日(2월,8월달 마지막 丁일)로 정행(定行)하였다. 그러 나, 1868년 서월 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강당을 경보당으로 이 름을 바꾸어 제실로 삼아 후손들에 의하여 서원의식에 따라 향사를 받들어 왔었다. 그후, 1981년 후손들의 발의와 밀양유 림의 공의(公議)로 서원을 복원하여 상모사를 그전대로 중건 하였고 1984년 복원에따를 고유제를 올려 지난날의 서원 모 습을되찾게되었다. 현재 신남서원은 상모사를 중심으로 전면에 신문을 설치하 여 신역(神域)을 구획하였고 바깥에는 강당인 경보당이 있으 며경내에박위장군과박기선생의제단비가있다. 박위 장군은 시조대왕(諱 赫居世)으로부터 44세손이며 밀 성대군(휘 언침)의 15세손이고 중조 삼사좌윤공 휘 을재(三 司左尹公 諱 乙材)로부터 8世孫으로 부(父) 려조(麗祖) 판각 문사 보문각 대제학 증 정승 휘 광후(版閣門事 寶文閣 大提學 贈政丞諱光厚)모(母)정경부인 안동김씨(貞敬夫人安東金 氏)의장남으로탄생(誕生)하였다. 고려공민왕때왕의신변을호위하던숙의군의임무를담당 하는 우달치(于達赤)에 등용된 후 상주, 김해, 영흥 부사(府 使)진주목사,계림부윤,경상도순문사,판자혜부사 지문하부 사 겸 대사헌, 문하평리, 참찬문하부사, 양강도 절도사, 서북 면 도병마사, 삼군부친군총융사(三軍府親總戎使)를 역임하 며 수많은 전장에서 공을 세웠으며 공양왕2년 忠義君(伯)에 봉해졌으며 이조 태조 7년(1398년) 정국군 (靖國君로)으로 봉해 졌다. 공민왕 7년(AD 135 8) 중국 땅은 반란의 소 용돌이에휩싸였다. 남쪽지방에서 일어 난 반란세력은 元나라 군을 대파하고 그 세력 권이 고려에 인접하였 다. 그 반란 세력군에 곽자흥을 중심으로 한 무리가 홍건군(뒷날 明 나라를 세운 주원장도 여기에 속해 있었다)으 로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두르고 활약하였다. 공민왕은 북쪽에 서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반란세력(홍건군)과 한반도 남쪽 을괴롭히는왜구를토벌하랴매우분주하였다. 홍건군은2차에걸쳐고려를침공하였다. 1차는 1359년으로 의주, 선주 서경을 점령하였으나 김선치 장군 등에 의하여 1360년 초에 퇴각하였으며 2차는 1361년 10 월에 침공하여 귀주븡안주를 점령한 후 수도인 개경(개성)까 지 함락되어 가장 피해가 컸으며 1362년 1월 17일 총공격으로 (정세운,안우,이방실,이여경,김득배,최영,이성계 등)물리 쳤다. 靖國君께서는 南行하는 恭愍王을 상주에서부터 피난지 福 州(現 安東)까지 무사히 수행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 다.당시예정에없던파천이어서수행한벼슬아치들은고작2 8名 뿐이었다고 하며 그 일행 중에는 일생을 통하여 가장 많 은 영향을 준 유망한 청년 정몽주 선생이 한림학사로서 王을 수행하고있었다. 이때의 인연을 통하여 포은 선생과 靖國君은 믿음과 존경으 로서서로를이해하고일생동안각별한관계에있었다. 尙州에서 福州로 오는 길에 홍수와 찬물 때문에 왕비(노국 대장공주)가 물을 건너지 못함에 안동여인들이 강에 나와 일 렬로 서서 등위로 무사히 건너게 하여 이로부터 安東 놋다리 밟기가이어지게되었다. 恭愍王은 시름에 젖어 낙동강의 정자(현재의 영호루)에 자 주올랐으며후일친필액자를남겼다. 恭愍王은 福州사람들이 정성을 다하여 자신을 받들고 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개경수복에 공로를 쌓았다하여 福州를 安東 (東쪽에 위치한 安全한 땅)으로 명명하였으며 大都護府로 승 격시켜이후경상도내륙중심도시로발돋움하였다. 판도판각공(版圖判閣公)의 휘(諱)는 천익(天翊)으로 밀성 대군의 8세손이다.고려 선종조(1083~1094)때 판도판각(版圖 判閣)을지냈다. 판도판각공을 비롯한 후손들은 송도(松都)에 살면서 대대 로 벼슬을 하며 명문거족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병화와 남북 분단으로 인해 유지와 문헌은 실전되어 전해지지 않아 1923 년 충북 옥천의 원덕사에 배향되고, 1987년 경남 밀양시 삼량 진읍검세리에단(壇)을세우고제향을올린다. 판도판각공의 후손들은 고려조에 대대로 고관직을 이어오 면서 혹 국난을 당해서는 몸을 아끼지 않음으로서 공훈을 세 웠고, 자신의 직분을 다함으로서 나라에 천거되어 책임을 다 하기도 하였다.그리고 유풍(儒風)을 떨쳐서 서원에 배향되는 등훌륭한씨족이되었다. 판도판각공은 두 아들 석화(錫華)는 삼사좌윤(三司左尹), 석명(錫命)또한 삼사좌윤으로 시호(諡號)는 문열(文烈)이다. 판도판각공파는 이들 형제에 의해 세계를 잇고 있다.후손들중 대표적인인물은풍봉공휘한남(翰男)을예기할수있다. 풍봉공의 字는 국보(國輔), 호 (號)는 풍봉(風 峰)으로 선조 32 년(1599년)에 경 북 군위에서 태 어나 7세 때 조부 수문장공(휘 응 경)으로부터 글 을 배우기 시작 하였다. 1608년 戊申 公 1 0 세 二 月 에 선조가 승하(昇 遐)하고 광해군 이 즉위(卽位)하 였다. 그해 봄에 경상감사가 군위(軍威) 고을을 순찰(巡察) 한 다 는 말 을 듣 고 함 께 공 부 ( 工 夫 ) 하 는 여 러 학 동 들 과 함 께 길가 바위 위에 올라가서 군졸(軍卒)을 호령하는 장난을 하 니 보는 사람마다 기이(奇異)하게 여겼는데 이때에 순군(巡 軍 ) 이 앞 에 오 나 공 은 높 은 자 리 에 안 연 ( 晏 然 ) 히 앉 아 서 움 직이지 않으니 전도(傳導)하던 역졸(驛卒)이 눈을 부릅뜨고 꾸짖되 어디 사는 아이가 감사의 행처에 거만스럽게 앉아서 무엄(無嚴)함이 이러하냐 하니 곁에 있는 모든 아이는 모두 달아나되 공은 홀로 언연(偃然)히 호령하여 말하기를 너 군 졸로서어찌감히우반(雨班)을 모시(侮視)하느냐나도장차 커서 너의 호위(護衛)를 받으리라 하니 역졸이 웃으면서 가 버렸다. 풍봉공이남한산성에서적과대치하다귀에화살을맞아화 살을빼면서 귀가 함께빠져 무인석에도 귀가 없다. 풍봉공의 용맹스러움을표현해주는듯하다. 1619년 기미(己未)公의 나이 21세에 항상 무(武)에 마음이 있어 위연( 쬔然)히 탄식하다가 부친 부사공에게 고하고 드디 어 붓을 버리고 무예(武藝)에 힘써 1621년 23세에 무과에 급 제하였다. 훈련원습독관(訓練院習讀官), 훈련원주부(訓練院 主簿), 다경포수군만호(多慶浦水軍萬戶), 도총부도사(都摠 府都事), 현신교위(顯信校尉), 훈련원부정(訓鍊院副正), 어 모장군(禦侮將軍) 화양진관철관수군(花梁鎭管鐵串水軍) 첨 절제사(僉節制使), 절충장군(折衝將軍) 화양진관철관수군 (花梁鎭管鐵串水軍) 첨절제사(僉節制使), 용양위부호군(龍 웹衛副護軍), 호실위사용(虎實衛司勇), 용양위사과(龍 웹衛 司果)를 거쳐 1640년 8월에 통정대부 벽동군수겸병마절제사 로도임하여선정을펼쳐거사비(去思碑)가세워졌다. 이후에도 많은 요직을 두루 거쳐 1653년 계사(癸巳) 公 55 세 정월에 호분위부사과겸내금위장(虎賁衛副司果兼內禁衛 將)을 제수(除授)받고 三月에 풍천도호부사겸병마절제사(豊 川都護府使兼兵馬節制使)에 임명되나 풍천은 지방이고 넓고 폐(弊)가많았으나공이 부임(赴任)한지얼마 되지않아서치 성(治聲)이자자(藉藉)하였다. 1655年 을미(乙未) 公 57세 二月에 용양위부사직겸내금위 장(龍 웹衛副司直兼內禁衛將)에임명되고七月에충무위부사 과겸내금위장(종2품), 八月에 연위사(延慰使,외국의 사신을 맞이하여 위로하는 임무를 맡은 임시벼슬)로 뽑혀서 안주(安 州)에이르러서기병(奇病)을얻어서경성에돌아와서11월2 0일에여사(旅舍)에서卒하였다. 특히 병자호란에 풍봉공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몽 진(蒙塵)하고 임금의 수레가 파천(播遷)할 때 빙판(氷板)길 은 험악(險惡)하여 전진하기는 어렵고 적군은 가까이 핍박 (逼迫)해 오니 국가의 존망이 일발(一髮)의 사이에 처(處)해 있을 때에도 풍봉공(風峯公)은 금석(金石)을 뚫는 충성(忠 誠 )과 산 악 ( 山 岳 )을 재 치 는 의 용 (義 勇 )이 몸 을 바 쳐 전 란 에 나가서 등으로 임금을 업어서 성중(城中)에 들어가고 얼음을 깨어서고기를잡아임금의반찬에제공(提供)하고몸에박힌 적의 화살을 뽑고 성위에 올라가서 적군과 대치하고 당시의 상황을 그린 도적 4점을 남겨 당시의 상황을 짐작케 하고 있 다. 서울본부·밀원연구회와함께 하는유적탐방 모아재-경남밀양시청도면고법리943번지. 뱚 삼사좌윤공파(三司左尹公派)연원(淵源) 뱚 삼사좌윤공파(三司左尹公派)세계(世系) 뱚 신남서원과정국군박위장군 신남서원 경남 밀양시 무안 면 정곡리 74 뱚 정국군박위장군 정국군박위장군존영 뱚 판도판각공제단과박천익선생 판도판각공제단 -경남밀양시삼량진읍검세리373번지 풍봉공휘한남의묘소문인석 . 한빛신문은성손여러분모두가함께만 들어가는500만박씨종중의정론지븣 성손여러분이납부하여주신구독료는 선조님현창사업을위한소중한기금입 니다. 뱚 뱚뱚선조님과관련된자료를제보하여 뱚뱚뱚선조님현창사업에동참하여주시기바랍니다. 뱚뱚뱚제보및구독신청안내:053-588-7300,070-4250-0078 fax053-581-0067 e-mail:parkss1012@hanmail.net 뱚뱚※성손여러분이납부하여주신소중한구독료는 뱚뱚신문발행에큰도움이됩니다.후원에감사드립니다. 뱚뱚구독료및후원금계좌453013-55-000691(농협한빛신문)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