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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9월30일 일요일 4 (제141호) 관향조 종친회 파천면의 입향조 휘는 유도(維度) 자(字)는 중오(重五) 호 (號)는 갈산(葛山)으로 1600년에 서울에서 아버지 휘 자흥 (自興)과어머니는청풍김씨사이에서태어나1619년당시19 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동부승지에 오르고 진보현 감곡촌에 1 623년 인조반정을 피해 입향 하였다. 인조반정은 광해군 15년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인조)을 왕으로 세운 정변으로 당 시 영의정은 퇴우정 박승종으로 파천 입향조의 조부가 된다. 아버지 자흥은 병조참판과 전라도관찰사, 경기관찰사를 역임 하였다. 입향조 갈산공(휘 유도)의 나이 23세 때 발생한 인조 반정에 영의정과 경기도관찰사, 광해군의 세자(이 지)빈을 배출한집안을서인세력들은가만두지않았다. 광해군이 폐위되던 날 갈산공의 아버지 기백공(휘 자흥)께 서는 불행하게도 광해 임금과 사돈으로 아버지 퇴우정공과 함께자결함으로써나라와임금에게충절을다했다.따님이신 세자빈은 강화 교동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어 있을 때 인두 를 이용하여 땅굴을 파고 세자를 탈출시켰으나 군졸에게 잡 혀 관아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위리 안에서 목을 매어 자 결하였다. 이는 국초 이래로 충절을 다하였음에도 옥석을 구 분하지 못하던 인조는 광해군과 사돈이라는 이유만으로 퇴우 정공(휘승종)과기백공(휘 자흥)을역적으로몰아 관직을 삭 탈하고 가산을 적몰하였기에 입 향조 갈산공은 가문과 목숨을 보 존 하 기 위 해 모 든 것 을 숨 기 고 천리 먼길 진보현의 남쪽 현 청 송군 파천면 신기2리(감곡촌)에 노 비 와 함 께 몸 을 오 랜 세 월 숨 어지냈다. 감곡촌의 옛 이름인 갈음촌 (칡덩굴이 많아 붙여진 이름)의 이름을 따 갈산처사(葛山處士) 라 하고, 또 어두운 굴속에 숨어 산다는뜻으로‘돈와(遯窩)’라고 도하였다. 돈와공께서 감곡촌에 입향 후 마을 사람들에게 학문을 가르치 는문풍을일으키니사람들이모 두가예조 완문(박준장을 비롯한 후손들이 말하기를 ‘우리집 선생’이라하여갈산처사라함은이를두고하는말이다. 그러면서도마을사람들은선생이어느곳에서오셨는지몰 라 궁금해 하면서도 모두가 선생을 따랐다. 세월이 어느덧 흘 러 이미 몸이 늙으니 매양 기둥에 기대어 북두성만 바라보고 지나 온 한이 끝이 없어 이로 인하여 병이 나 일어나지 못하였 다.임종에 이르러 아들을 불러 곁에 앉히고 가문이이 화를 입 은 후 남쪽으로 내려 올 당시 항시 몸에 지니고 다녔던 아버지 기백공의교지(병조참판)를비롯한유물등을내놓고신원이 되면 선조께서 살던 곳(현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 사는 것을 어기지말라하였다. 돈와공의 선원 세계를 보면 밀성대군 후예이고 규정공(휘 현)의 16세가 된다.규정공의 아들 문유는 전리좌랑과 경주판 관을 손자 사경은 전법판서 겸 상장군이고 아들 침을 두었는 데 고려 전의판서로 이 태조가 개국 조선조에서 호조전서 벼 슬을 내리고 참여하기를 권하였으나 거절하고 두문동으로 들 어가절의를지켰다. 전서공(휘 침)이 아들 강생을 낳으니 집현전 부제학을 지냈 고, 안변부사가 되어서는 선정을 베풀었으며, 의정부 찬성사 로추증되었다. 공(公)이 절문을 낳았는데 권지교서정자이고, 중손을 낳았 는데 유복자이다. 중손은 어린 시절을 아버지 없이 자랐지만 할아버지 부제학공의 교훈으로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 고, 단종조에 정난공신 1등 공신으로 책훈 되고 밀산군(密山 君)에 봉해졌으며,이조판서와 예문관 대제학을 지냈고,의정 부좌참찬에올랐으며공효(恭孝)의시호를받았다. 공효공의 아들은 미(楣)인데 예조참의를 지냈고, 참의공은 아들을 낳으니 휘를 조(藻)라 하였으며, 음직으로 귀후서 별 제를 지냈고, 별제공이 아들을 낳으니 유명한 낙촌 박충원 공 으로 영해창수록을 남겨 현재 돈와공의 종손가에 원본이 보 관되어전해진다. 낙촌공이 아들을 낳으니 호조,예조,형조,병조판서에 오른 박계현(朴啓賢,號灌園)이다.관원공의아들은 안세(安世)이 니 지돈령부사이고, 이분이 아들을 낳으니 광해조의 영의정 박승종으로돈와공의조부가된다. 공(公)의 호는 퇴우정(退憂亭),시호는 숙민(肅愍)이다.역 사란 산자의 것이라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광해조 편 에 수정자구가 많은 것은 인조반정에 성공한 서인세력들이 만든 것으로 퇴우정공 또한 많은 부분 폄하(貶下)된 부분이 많다. 영상으로서 명나라와 후금 간에서 종주국인 명나라의 비위를 크게 거스르지 않고 후금에게도 침공할 만한 구실을 주지 않는 불편부당한 등거리외교를 구사하여 임란 후 파탄 에 빠진 나라의 평정을 유지하면서 민생을 보호하고 흉흉해 진 민심을 안정시키는 등 등거리 외교의 효시로써 오늘날 70 여명의 학자들이 모여 조선조 최고의 빛나는 외교사로 결론 지은바있다. 숙민공이 아들을 낳으니 휘는 자흥(自興),字는 인길(仁吉) 이며, 호는 읍청헌( 쳇淸軒)으로 1581년 태어나 1610년 문과 에 급제하여 세자 시강원설서에 제수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공의 따님이 광해의 세자빈이 되었다. 이조정랑 등 요직에 오 르며 동부승지, 병조참의, 전라도관찰사, 형조참판, 사헌부대 사헌과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다. 1618년 성균관 대사성, 1619 년 수원부사로 내려갔다가 1622년 가선대부로 승차하여 병조 참판을거쳐경기관찰사겸개성부유수가되었다.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광해군은 폐출되었고 공의 부자(父 子)도 경기도 광주의 험천(현 하남시 감이동) 정림(亭林)에 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향년 43세였다.또한 부친과 함께 관 작은 삭탈되었고, 가재는 모두 적몰되었다. 공의 묘소는 현재 하남시 정림의 시제곡에 모셔져 있으며, 어천리에는 별도의 제단이세워져후손들이추원보본의정성을다하고있다. 조야에서 공의 죽음에 대하여 왈가불가가 있었지만 대사간 홍호, 부제학 이준, 공조참의 안방준, 좌의정 송시열 등 제현 들이 시대는 같지 않지만 여러 차례 신원(伸寃)과 복관하는 상소를 올리고, 후손들 또한 간절하게 신원과 복관을 요청하 여 결국 돌아가신 지 234년 후인 철종 8년 정사(丁巳,1857)년 에 아버지 퇴우정공과 함께 신원되고 복관작 되었으니 이것 은 하늘의 뜻이라 할 것이고 사필귀정의 결말을 본 것이라 할 수있다. 돈와공(휘 유도)께서 1623년 진보현 감곡촌에 입향 이후 지 역 의 자 제 들 을 훈 육 하 는 등 문 풍 을 일 으 킨 가 운 데 그 아 들 또 한 문학이뛰어났다.어천리입향의정확한연도는상고할수없으 나 감곡촌에서 비교적 농토가 넓고 비옥한 토지의 어천리 입향 은 아 들 휘 만 기 (萬 起)에 의 해 서 다 . 공 (公)의 자 는 성 원 (星圓 ) 이고 호(號)는 어계(魚溪)이다. 돈와공의 후예들은 퇴우정과 아 들 기 백 공 (휘 자 흥 )이 사 후 23 4년 동 안 신 원 되 지 못 하 고 있 어 관계에 진출할 수 없었다. 대 신 지역의 유풍진작과 문풍을 일 으키는데 크게 일조하였으며, 타 고 난 성 품 이 순 후 하 고 효 를 실 천 하는자손들이즐비하다. 어천리의 후손들은 어계공의 아들 종순(宗舜)과 종보(宗寶), 종도(宗道) 삼형제를 두었고. 장 남 종순(宗舜)은 아들 문환(文 煥) 용환(龍煥), 수환(守煥), 신 환(信煥)을, 차남 종보(宗寶)는 정 환 (正 煥 )을 삼 남 종 도 ( 宗 道 ) 는 겸환(謙煥)을 낳으면서 문중 이 크 게 번 성 하 게 된 다 . 어계공의 장남 종순의 아들 문 환(文煥)의 현손 형래(亨來)의 자(字)는 원백(元伯), 호(號)는 가은(稼隱)으로 타고난 효자이 다. 부모의 병환에 성심을 다해 약재를 구하여 간병하고 상(喪) 을 당해서는 상례의 예를 다하고 3년의 시묘 후에도 매일 성묘를 하는 등 극진한 효성을 보여 그 기적비가동네입구에세워졌다. 어계공의 손자 용환(龍煥)의 아들 기중의 자(字)는 정일(精 一), 호(號)는 한매(寒梅)이니 학문이뛰어나지역의유풍을일 으켜 공(公)의 호(號)를 따 마을에 한매정(寒梅亭)을 지어 향 화(香火)를받들고있다. 어계공의 7대손 용규(龍圭)의 字는 경백(景伯), 號는 낙천 (洛泉)으로 종사랑 현릉(문종과 현덕왕후 릉)참봉을 지냈으 며, 타고난 효자이다. 특히 학문이 뛰어나 낙천유고(洛泉遺 稿)가전해진다. 어계공의 7대손 병기(炳畿)의 자는 성첨(聖瞻)이고 號는 괴암(槐菴)으로 현릉참봉이다.학문이뛰어나많은후학들을 길러내 제자들로 구성된 괴암계(槐菴契)가 결성되어 공의 학 덕을 추모하고 있으며, 공의 아우 병두(炳斗)는 효행으로 가 선대부에가자되었다. 어천리 입향조 어계공의 현손 순진(順鎭)과 그의 아들 준장 (準章)은 인조반정으로 인해 234년동안 입향조 돈와공(휘 유 도)가 자흥의 후대임을 알리지 못하고 지내오다 철종 8년 신 원이 되어 진보향교에 출입하며 자흥이 물려준 교지와 상소 문 등을 근거로 진보 향교와 성균관에 통문을 올려 어천에 사 는 수손들이 퇴우정의 아들 기백공의 후손임을 확인시켰고,1 882년(고종20) 정월에 다시 한 번 완문(공증서)을 보내어 퇴 우정의 후손임을 각인시켰으며, 그 상소문과 완문 등은 돈와 공의12대종손주목현종이보관하고있다. 주목종손은선조의문헌을소중히소장하면서종중의체계 와문헌을정리하고있어그의타고난숭조심이엿보인다. 이같이돈와공의후예들은선조의유훈을지키며지역의문 풍과 유풍음 진작하면서 집안의 가풍으로 이어져 돈와공 8대 손병열(炳烈)의부인능주구씨는15세에결혼하여시집이가 난하여 방아품과 길삼품으로 홀로 계신 시모를 정성껏 봉양 하고부군을공경하였다. 고종조계묘년에고향을떠나충북진천으로이사를가서살 던 중 시어머니가 병을 얻자 지성으로 약을 구하고 환자의 변 (便)을 맛보는 등 부인의 정성어린 간병에도 불구하고 돌아가 시자 그곳에서 장례를 치루었다. 그 후 부군이 병환으로 자라 에눕게되자부군의병에뱀쓸개가좋다고하는지라,추운겨 울에도불구하고주야로축원하였더니어느날마당에큰뱀이 나타나는지라, 잡아서 부군의 병을 낫게 하였으며, 후일 부군 이앞을보지못하게되어고향ㅇ돌아왔으나시어머니의산소 가 타향이 있는 것을 아타까이 여겨 부인이 홀로 유해를 모시 고돌아오던중여비가떨어져주아로걸어서오던날밤,큰호 랑이가 나타나 길을 막거늘 부인 크게 놀라니 범이 스스로 피 하였다.향리의모든사람들이효열부라칭하였으며,문중에서 비각을건립하였다. 이밖에도 돈와공의 후손들은 청송군 제3대 군수를 역임한 박 종갑, 5,6,7대 경상북도 도의원(무소속)을 지낸 박종욱, 파천면 장박종률,파천면장박상팔,원예신문사사장박두환,파천농협 조합장 박하규, 경찰청 박장길 경정, 박 용학 청송군농업기술센터소장등이문 중을 빛내고 있으며, 도의원을 지낸 박 종욱 전의원은투철한숭조심과타고난 숭조정신으로 위선사업에 앞장서 지난 1979년 상급종친회인 규정공파대종회 의 감사패를 받는 등 돈와공 문중이 지 역의 토성으로 자리하는데 기여하고 있 다. /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뱚집 성 촌 탐 방 경북청송군파천면어천리돈와공문 중 경북 청송군파천면어천리전경(휘자흥의제단 아래부터시계반대방향으로 어천1리,2리,3리) 청송군 파천면(巴川面)은 청송읍(靑松邑)과 진보 면(眞寶面)을 잇는 국도 31호선의 중간지점으로 임하댐 상류에 위치하고 있으며, 달성서씨븡밀양 박씨븡청송심씨븡평산신씨븡평해황씨 등 씨족별 집 성촌을 이루고 있다. 이중 어천리에 큰 집성촌을 이룬 밀양박씨는 광해군 때에 영의정을 지낸 퇴우 정박승종선생의후예로1623년에입향후14代에 걸쳐700여세대가거주하고있어 찾아가본다. 뱚▶입 향 조 행 장 및 선 원 세 계 돈와공묘소(파천면감곡리) 기백공박자흥의제단과 후손묘원 예조 완문(박준장을 비롯한 후 손들이 예조에퇴우정의후손임 을확인받은문서) 선조낙촌공유고영해창수록(종손박주목 소장). 국내에몇권남지않은원본으로 2011년12월제주시문화유적지관리사무 소주관으로 역주본이 간행되기도하였다. 한매정(寒梅亭) 마을 입구에 있으며, 학문과 유풍을 진작한 한매공 박기 중의재사(齋舍)이다. 가은박형래효행기적비 능주구씨효열각 뱚▶어천리입향과후손들 괴암 박병기선생기적비 낙천유고 박종욱 전의원이 상급종친회규 정공파 대종회로부터 어천문중 을 비롯 선조 위선사업의 공을 치하하며받은감사패 12대 종손 박주목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