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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9월30일 일요일 2 (제141호) 기 획 현재 경애왕의 무덤은 삼릉 골에 조성돼 있다. 하지만 기록 은 경애왕의 무덤이 ‘해목령’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경애왕의 무덤은 기록상의 해목령과 현재 삼릉골의 무덤, 즉 둘이 되게 된다.어느쪽이진실에가까울까. 기록은 경애왕이 죽은 이후 주검의 처리 과정에 대해서도 다음과같이증언하고있다. 전왕前王 경애왕의주검을 서당西堂에 모시고,여러 신하들 과함께통곡하였다.시호를올려경애라하고,남산해목령蟹 目嶺에장사지냈다(븮삼국사기븯권12신라본기12경순왕즉위년조). 이로 보면 김부 일당은 경애왕 주검을 조상 弔喪한 뒤 남산 에 옮겨 안장했다고 한다. 해목령은 현재 남산 게눈바위라 불 리는 곳이다. 한데 김부가 경애왕 주검을 서당에 안치하고 통 곡했다는대목은도저히믿기힘들다. 김부는견훤과연대해경애왕을죽음으로 몰고간장본인이 다. 견훤이 당시 왕도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당시 서라벌은 말 그대로 견훤의 서슬 퍼런 위협과 지배 아래 있었다. 경애왕을 가장 증오하여 죽인 견훤의 눈앞에서, 또 자신의 정적이기도 한 경애왕을 위해 김부가 진정성을 지닌 채로 통곡했을 리 없 다. 역사적으로도 김부의 아비 효종과 경애왕의 아비 박경휘 (신덕왕)는 왕위를 두고 대립했었고, 경애왕의 사후 김부가 견훤의 후광으로 ‘권지국사’에 오르는 사실만으로도 김부와 경애왕은극과극의관계였음이드러난다. 그럼에도 김부의 통곡이 나왔다는 것은 모종의 목적- 가령 시해의 면책, 민심 수습 등-을 두고 철저히 계산된 행위가 분 명하다. 이후 경애왕의 주검은 남산에 옮겨졌고 안장됐다고 한다. 앞서경애왕을조상한김부의조치에는진정성이없다고보 았다. 그렇다면 뒷부분 경애왕을 남산에 옮겨 안장했다는 대 목에도 의혹이 쏠리지 않을 수 없다.경애왕을 죽인 그들이 경 애왕을온전히안장했을리없기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경애왕의 장지로 알려진 해목령(蟹目嶺)에 대 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곳은 도대체 어떤 곳일까. 게의 눈 을 닮은 바위가 있어 게(蟹)의 눈(目), 해목(蟹目)이라 불린 이 고개는 남산 최북단 정상 지점에 있다. ‘게눈 바위’, 즉 ’해 목령’은 해발 281m로서 동과 서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것 은 물론 북쪽으로는 남천과 월성의 동태까지 정찰이 가능한 보루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쌓은 남산 신성이이곳을감싸고축성되어있다. 문무왕이 처음 즉위했을 때 남산(南山)에 장창(長倉)을 설 치하니, 길이가 50보(步), 너비가 15보(步)로 미곡(米穀)과 병기(兵器)를여기에쌓아두니이것이우창(右倉)이요,천은 사(天恩寺) 서북쪽 산 위에 있는 것은 좌창(左倉)이다. 다른 책에는, 뷺건복(建福) 8년 신해(辛亥; 591)에 남산성(南山城) 을쌓았는데그둘레가2,850보(步)다뷻라고했다.그렇다면이 것은 진덕왕대(眞德王代)-실은 진평왕대-에 처음 쌓았다가 이때에중수(重修)한것이다.( 븮삼국유사븯기이 문무왕법민조) 진평왕 13년 가을 7월,남산성을 쌓았다.그 둘레가 2천8백5 십4보였다.( 븮삼국사기븯권4신라본기4진평왕 ). 3년봄정월,남산신성에기다란창고를지었다.19년가을8 월,남산성을증축하였다.( 븮삼국사기븯권6신라본기6문무왕). 김부나 견훤은 경애왕과 대립했던 정적이었다.까닭에 풍수 에 입각해 장지를 골랐을 만큼, 그들이 경애왕을 예우했을 리 없다. 서둘러 경애왕 시해 사건을 마무리 지어야 했을 그들이 구태여 이목을 끌 남산 북쪽 정상에 시신을 묻었다는 것부터 이상한일이아닐수없다. 왜냐하면 신라의 왕들 가운데 남산 꼭대기를 장지로 삼은 예는이전에도없었고,이후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왜 이들은 하필이면 경애왕의 장지를 남 산 북쪽 정상 지점으로 선택하는 역사상 유례없는, 경천동지 의예외적일을행한것일까. 신성은 왕궁인 월성과 가장 가까운 지점에 설치된 일종의 산성이다.유사시 공수의 핵심 거점 역할을 했던 곳이다.경애 왕이 안장됐다는 해목령은 이 신성의 안, 신성의 꼭짓점에 해 당하는지점이다. 당시 후삼국 동란기였으므로, 신성은 그 중요성에 걸맞게 거점 역할을 충분히 했었고, 원형을 유지했었다고 짐작된다. 그렇다면 남산의 꼭대기에, 그것도 방어를 목적으로 하는 성 안에 왕릉이 조성됐다는 말이 된다.이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 는 일 이 다 . 다시 포석정 사건의 기록들을 찬찬히 뜯어보자. 김부 일당 은 경애왕 시해를 목적으로 자신들의 세력권 포석정으로 경 애왕을 유인했다. 포석정에 참집한 사람들은 활로를 열지 못 한 채 거의 전멸당하여 함몰되었다. 마찬가지로 이후 경애왕 의주검또한두터운신성안에서처리됐다. 이것은 뭔가 단순한 우연의 결과가 아님을 짐작하게 한다. 즉, 경애왕의 유인, 시해, 처리가 일사불란한 사전 계획에 의 해음밀히추진되고진행된느낌을증폭시킨다. 겨울 10월에 태조가 군사를 보내 구원하였지만, 견훤이 갑 자기 신라 서울에 들어가니,이 때 왕이 부인과 궁녀들을 데리 고 포석정에 나가 술상을 차려놓고 즐겁게 놀다가 적이 쳐들 어오자 낭패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은 부인과 함께 성의 남쪽 이궁으로 돌아갔으며, 시종하던 관원들과 궁녀, 악공들 은 모두 반란군에게 잡혀 함몰되었다. 견훤은 군사를 풀어 놓 아 크게 약탈하고,사람을 시켜 왕을 잡아다가 자기 앞에서 죽 였다.( 븮三國史記븯권50열전10견훤조) 포석정 사건의 뒤처리를 위해 당시 살육한 주검들을 포석 정에 함몰시켰던 그들의 전력을 고려할 때,경애왕의 주검 역 시 민멸을 위해 남산 신성 안에서 화장처리 했을 개연성이 크 다. 포석정잔치가경애왕시해를목적으로엄밀히계획된범행 이었다면, 신성 안 해목령에서의 경애왕 시신 처리는 사체의 은닉과 말살을 기도한 행위였다. 즉 포석정 사건을 비롯한 모 든 것들이 우발적 행위의 연속이 아니라,믿을 수 없이 치밀하 게준비된 음모였던셈이다.경애왕은생전(生前)뿐만아니라 사후에조차꼼꼼히짜인음모의희생양이된것이다. 이로써초기단계에서부터시해수순뿐만아니라사체의유 기 방법까지 치밀하게 계획된 일종의 완전범죄였음이 드러나 는 셈 이 다 . 현재 경애왕의 무덤은 해목령이 아니라, 그 곳에서 한참 떨 어진 삼릉골 아래 있다. 이런 모순에 주목, 경애왕의 무덤은 다른곳이라는추정이제기되기도했다. 蟹目嶺은 경주시 남산의 西峰 즉 南山城의 서쪽 봉우리로, 潤乙谷과 鮑石溪의 경계에 해당되는 곳이다. 그런데 현재의 경북 경주시 排洞의 남산 삼릉 계곡 입구에 있는 단독의 원형 봉토분을경애왕릉으로추정하여사적으로지정하고있다.그 러나 남산 해목령에 장사지냈다는 문헌 기록과 이 고분의 형 태 등으로 보아서 이 陵은 경애왕릉이 아니라 三陵 중의 傳逸 聖王陵이 바로 경애왕릉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姜仁求, 븮新羅 王陵의再檢討(1)븯,븮東方學志븯41,1982,76∼77쪽 ). ( 븮삼국사기븯 권12신라본기12경순왕,한국정신문화연구원역주본) 해목령은 남산의 서봉으로 윤을곡과 포석계의 경계지점이 다. 따라서 (현재의) 경애왕릉 역시 여러 계곡과 구릉을 사이 에 두고 2㎞ 이상 떨어져 있어 경애왕릉이라 할 수 없 다 .( 권덕 영븮신라하대박씨왕가의의문븯, 한국고대사학회발표문, 2007, 5, P.3) ( ) 안은필자가추가하였음. 위 논자들은 하나같이 븮삼국사기븯 해목령 장례 기사를 금과 옥조로 믿고 있다. 또 이를 기준으로 경애왕릉의 위치 문제를 비정하고 있다. 경애왕과 대립각을 세운 김부 일당이 치렀다 는 경애왕 장례 기사에 한 점 의혹을 품지 못한 채,소박한(na ive) 역사 독법을 고집한 결과이며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낸 셈이다. 경애왕 무덤에 의혹을 제기한 강 교수는 고분에 관한한, 현 우리나라 제 일인자라 평해진다. 그러한 석학조차 천착에 빠 뜨려 버릴 만큼, 왜곡된 역사 기록의 병폐와 해독(害毒)은 심 대하다. 또 그만큼 김부 일당의 뒤처리가 교묘했었으며, 이후 의 과정 역시 투명하지 못했다는 말도 된다. 경애왕은 견훤과 김부에 의해 피살됐고, 다시 시해의 주범이라 할 김부가 고려 집권자 왕건과 밀착함에 따라 그 모든 의혹과 신원의 길은 원 천적으로 봉쇄되어 버렸다. 그 세월이 무릇 천여 년에 이르렀 다. 이렇듯 해목령 장례 자체에 정치적 음모와 계획이 깔려 있 는 이상, 경애왕의 장지 문제는 처음부터 재검토할 필요가 있 다. 여기서 문무왕의 장례 절차를 잠시 보자. 문무왕의 화장한 뼛가루를 뿌린 곳은 동해다. 하지만 문무왕이 화장된 곳은 서 라벌 안이다. 문무왕이 뷺임종 후 10일 이내로 고문(庫門) 밖 뜰에서 화장하라뷻고 한 븮삼국사기븯기록을 근거로, 문무왕의 화장지는능지탑(陵之塔)이라 추정되어 오기도 한다.이런문 무왕의예는경애왕장지의의문을푸는데참고가된다. 김부 등은 경애왕 주검에 대한 신속한 처리가 급선무였다. 경애왕 일가의 화장 전례도 김부 일당에겐 한층 유리한 명분 이됐다. 53대 신덕왕 임신년(912년)에 즉위하였으며 치세는 5년이 다.화장하여 뼈를 잠현 箴峴 남쪽에 두었다. ( 『삼국유사』 권1 왕력신덕왕 ) 54대 경명왕 정축년에 즉위하였으며 치세는 7년이다. 황복 사皇福寺에서 화장하여 뼈를 성등잉산(省等仍山) 서쪽에 흩 어버렸다. ( 븮삼국유사븯 권1왕력경명왕) 55대 박씨이며 이름은 위응이니 경명왕의 동복아우다.갑신 년(924년)에 즉위하였으며 치세는 2년이다. 경애왕의 부친과 형은 모두 화장됐음이 확인된다. 형의 경 우 황복사皇福寺에서 화장하여 뼛가루가 성등잉산(省等仍 山)서쪽에뿌려지기도했다. 김부 등은 이런 전례를 들어 경애왕을 남산의 신성에서 화 장하고, 무덤을 성토하지 않은 채 남산 일대에 뼛가루를 뿌렸 을공산이크다. 그들이 신성을 화장 장소로 정한 이유는 도성 내 평지에 비 해선, 상대적으로 훨씬 적은 군사력의 동원만으로 삼엄한 경 계,통금조치가 가능하다.뿐만 아니라 경애왕의 유골 역시 눈 에 띄 지 않 게 처 리 할 수 있 다 . 이 경우 경애왕 주검의 뼛가루는 해목령을 중심으로 한 남 산의 신성 일대에 뿌려졌을 것이 상정된다. 해목령 부근 어디 에도 왕릉 급에 해당하는 무덤을 찾기 힘들다. 이것은 경애왕 주검의고의적민멸에말미암은결과다. 위의 추정은 븮삼국유사븯의 찬자 일연에 행위에서도 확인된 다. 일연은 경애왕 일가의 왕력(王曆)을 작성하면서 경애왕 장지 대목만큼은 아예 빼버린 채,유독 공백으로 남겨뒀다.일 연은 경애왕의 장지로 거론된 ‘해목령’에 대해 일언반구조차 언급하지않고있다. 제53대신덕왕 박씨이며 이름은 경휘니 본래 이름은 수종이다. 어머니는 정화부인이요, 부인의 아버지는 순홍각간이니 뒤에 시호를 성무대왕이라 하였으며 조부는 원종각간이니 아달라왕의 원 대손이다. 아버지는 문원이간이니 뒤에 흥렴대왕으로 추봉되 었고 조부는 문관해간이며 의부는 예겸각간이니 선성대왕으 로 추봉되었다. 왕비는 자성왕후니 혹은 의성 또는 효자라고 도한다. 임신년(912년)에 즉위하였으며 치세는 5년이다. 화장하여 뼈를잠현(箴峴)남쪽에두었다. ( 븮삼국유사븯 권1왕력신덕왕) 제54대경명왕 박씨며 이름은 승영이다. 아버지는 신덕왕, 어머니는 자성 왕후다. 왕비는 장사택이다. 대존각간, 추봉된 성희대왕의 아 들이며대존은곧수종이간의아들이다. 정축년(917년)에 즉위하였으며 치세는 7년이다.황복사(皇 福寺)에서 화장하여뼈를 성등잉산(省等仍山)서쪽에흩어버 렸다. (븮삼국유사븯 권1왕력경명왕) 제55대경애왕 박씨이며 이름은 위응이니 경명왕의 동복아우다. 갑신년(9 24년)에즉위하였으며치세는2년이다. 일연은 경애왕과 관련된 븮삼국사기븯기록, 특히 장지 기록을 읽지 못한 것일까.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븮삼국 사기븯 경애왕 4년조의 내용이 븮삼국유사븯 ‘김부대왕’ 조에 전 재하다시피고스란히옮겨져있기때문이다. 겨울11월에서울을습격하였다. 이 때 왕은 왕비 및 후궁과 친척들을 데리고 포석정에서 연 회를 베풀며 놀고 있었다.이 때문에 적병이 오는 것을 모르고 있었으므로갑자기어찌할줄을몰랐다. 왕은 왕비와 함게 후궁으로 뛰어 들어가고, 친척과 공경대 부 및 사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고 숨었다. 적에게 붙 잡 힌 자 들 은 귀 한 자 천 한 자 할 것 없 이 놀 라 고 진 땀 을 흘 리 며 엎드려 노복이 되겠다고 빌었으나 화를 면하지 못했다. 견 훤은 또한 군사들을 풀어 공공의 재물이나 사사로운 재물을 거의 모두 약탈하고, 대궐에 들어 앉아 측근들로 하여금 왕을 찾게 하였다.왕은 왕비와 첩 몇 사람을 데리고 후궁에 있다가 군영으로잡혀갔다.견훤은왕을협박하여자살하게하고, 중략… 그의 부하들로 하여금 비첩들을 강간하게 하였다. 그리고 왕의 아우뻘 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임시로 국사를 맡게 하였 다.이사람이경순왕이다. 秋九月 甄萱侵我軍於高鬱府 王請救於太祖 命將出勁兵一萬 往救 甄萱以救兵未至 以冬十一月 掩入王京 王與妃嬪宗戚 遊 鮑石亭宴娛 不覺賊兵至 倉猝不知所爲 王與妃奔入後宮 宗戚 及公卿大夫士女 四散奔走逃竄 其爲賊所虜者 無貴賤皆駭汗 匍匐 乞爲奴僕而不免 萱又縱其兵 剽掠公私財物略盡 入處宮 闕 乃命左右索王 王與妃妾數人在後宮 拘致軍中 逼令王自盡 强淫王妃 縱其下 亂其妃妾 乃立王之族弟 權知國事 是爲敬順 王.( 븮三國史記븯신라본기12경애왕4년11월조) 겨울11월에서울을습격하였다. 이 때 왕은 비빈 종척들과 포석정에서 잔치를 열어 즐겁게 놀고 있었기 때문에 적병이 쳐들어오는 것도 모르다가 창졸 간에어찌할바를몰랐다. 왕과 비는 달아나 후궁으로 들어가고 종척 및 공경대부와 사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가 적에게 붙잡혔으며,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땅에 엎드려 노비가 되기를 애원했 으나죽음을면치못했다. 견훤은군사를놓아공사간의재물을약탈하고왕궁에들어 가거처했다.이에좌우사람을시켜왕을찾게하니왕은비첩 (婢妾) 몇 사람과 후궁에 숨어 있었다. 이를 군중(軍中)으로 잡아다가왕은억지로자결(自決)해죽게하고왕비를욕보였 으며, 부하들을 놓아 왕의 빈첩(嬪妾)들을 모두 욕보였다. 왕 의 족제(族弟)인 부(傅)를 세워 왕으로 삼으니 왕은 견훤이 세운셈이되었다. 븣九月. 百濟甄萱侵羅至高鬱府. 景哀王請救於我太祖. 命將 以勁兵一萬往救之. 救兵未至. 萱以. 冬十一月. 掩入王京. 王與 妃嬪宗戚. 遊鮑石亭宴娛. 不覺賊兵至. 倉卒不知所爲. 王與妃 奔入後宮. 宗戚及公卿大夫士女. 四散奔走. 爲賊所虜. 無貴賤 匍匐. 乞爲奴婢. 萱縱兵. 剽掠公私財物. 入處王宮. 乃命左右索 王. 王與妃妾數人. 匿在後宮. 拘致軍中. 逼令王自盡. 而强淫王 妃. 縱其下亂其嬪妾. 乃立王之族弟傅王. 王爲萱所擧卽位븣 ( 븮三國遺事븯권2기이2김부대왕조) 위에서 확인되듯, 일연은 븮삼국사기븯기록을 틀림없이 보았 고, 직접 인용하기도 했다. 자칫 잘못 읽으면 일연은 븮삼국사 기븯 기록을 거의 그대로 인용, 전재하고 있어, 일견 철저한 신 봉자처럼보일정도다. 븮삼국사기븯 경순왕조, 즉 경애왕 장지를 해목령으로 했다는 기록은 경애왕 4년조 기록 바로 다음 행간에 있다. 따라서 일 연은 해목령을 언급한 장지 기록 역시 반드시 읽었음이 틀림 없다.일연이 븮삼국사기븯경순왕조 전부를 읽었다고 확증할 또 다른근거는븮삼국사기븯경순왕조끝에 있는사론이븮삼국유사 븯‘김부 대왕’이란 편에 여과 없이 옮겨져 있기 때문이다.그럼 에도 일연은 경애왕의 장지로 거론된 해목령에 대해선 일절 언급하지않았다. 이것은 일연이 해목령을 경애왕의 장지로 생각하지 않았다 는 뚜렷한 반증이다. 나아가 김부 일당이 벌인 경애왕의 장례 절차를 인정하지 않은 결과로서, 사실상 일연이 철저히 작심 하고 벌인 고의적인 누락이자 저항이었다.또 븮삼국사기븯의 경 애왕 장례 기록에 대한 일연의 뚜렷한 자기주장이며 사실성 을따져선택한취사의결과이기도했다. 븮삼국사기븯에조차 없는 경애왕 일가, 즉 신덕왕과 경명왕의 장지 기록까지 빠뜨리지 않고 꼼꼼히 챙겨 기록했던 일연이, 븮삼국사기븯에 멀쩡히 기록돼 있는 경애왕의 장지,해목령 기록 만을구태여빠뜨렸다는것은심대한의미가있다. 일연은 앞서 김부의 아비 효종과 포석정의 관련을 밝혔는 데, 다시 김부가 치른 경애왕의 장례마저 사실상 인정하지 않 았음이 드러난다.이점은 거듭 주목을 끄는 대목이 아닐 수 없 다.‘기록하지 않은 역사’의 ‘역사성’을 이젠 곰곰이 헤아려 볼 차례다. 경애왕(신라55대왕.재위924~927 ) 뱚역사비정(21) 뱛Ⅰ.두개의경애왕릉 박 순 교 그림1.경애왕이 안장된것으로 기록된해목령(게눈바위)과 신성,포석정지도 뱛Ⅱ.해목령장지기록의진위 뱛Ⅲ.일연이거부한해목령장지기 록 뱚▶다음호에계속 목 차 Ⅰ.두개의경애왕릉 Ⅱ.해목령장지기록의진위. Ⅲ. 일연이 거부 한 해목령 장 지 기록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