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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9월30일 일요일 10 (제141호) 종합 파랗고 투명한 하늘, 부드러운 햇살 살포시 드 리우는 농월정의 아름다운 자태는 뭇사람들의 발 길을 잡는다.1963년 8월 27일 전라도의 한 청년은 걷고 얻어 타는 무전 여행 속에서 농월정을 찾았 다. 그리고 51년이 지난 2014년 9월 9일 다시 찾은 농월정과 일가들에게서 느낀 정의 위력은 2018년 무술년의 지금에도 생생히 기억하며 잊지 못한다 . 평생 일기를 써온 학호 박래욱 선생의 지역을 초월한 단단한 뿌리의 소중함과 일가간의 정이 담긴서정적스토리이다. 1963년당시전라도장성에서경남함양으로가 는 교통편은 없었다.걷고 또걷고 운 좋아지나가 는 자동차를 얻어 타고 버스 노선이 있는 구간은 행운이었다. 그 만큼 어려운 환경에서 오직 숭조 의 일념으로 장성에서 경주를 향해 무전여행을 떠난 여정 속에 경남 함양군 안의면에 들러 농월 정을 찾았고 일가 분들의 극진한 대접으로 하룻 밤을 지내며 긴 예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2014년 다시 찾은 농월정과 일가들에게서 변치 않은 일 가의 정을 느끼고 이를 담아 학호일기를 통해 농 월정과당시일가간의나눈정담을소개해본다. 학호 박래욱 선생은 1938년생으로 전남 장성에서 태어났다.우리나라감사원이뽑은3대청백리중수위 (首位)인 아곡 박수량 선생의 후예이기도 하다. 8세 되던 해부터 일기를 써왔으나 6.25로 인해 소중한 일 기책을 분실하여 현재 1950년부터 써온 일기가 전해 진다.현재까지하루도빠짐없이써온일기는1997년 한국 기네스북에 등재되었고, 국가유물로 등재되어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었다. 이에 본보에서는 다 음호부터‘학호일기’코너를마련당시시대상황의기 억을되돌릴수있는추억여행을가보기로한다. 【1963년8월27일】 물맑고녹음이우거져사람살기는신선같은이 마음9Km거리안의읍까지5원버스로안의면도착 했다. 교통비도 여행자(나그네) 편리를 굉장히 보 안준샘이다.(함양읍에서안의읍까지45원)금호강 중기를 따라 올라갔다.수정 같은 돌들(바위)늘어 져널려있고,쑥덕바위들로단장된금호강줄기청 수(물)가 좋고 농토는 적어 비옥한 토지 아무튼 이 고장은해결할것같다.함양읍에서들었던농월정 을물어서가다가안의향교를들여다보았다. 안의면은 안의현이라 하였으며 큰 면이라고 한 다. 옛적부터 밀양박씨 텃밭이며 자자일촌하고 일가들이 많으며 이 근방을 쩡쩡 울리고 살았다 고 한다.이 말에서 귀가 솔깃한 나그네 밀성박씨 종가를 물었더니 바로 윗마을 월림 부락 박태호 (朴台鎬)씨라수첩에적고인사를마치고나왔다. 분주히 서둘러 이곳의 명승지인 농월정을 향해 부지런히 걷다보니 요즈음 전혀 보지 못했던 까 치 한 마리를 보았다. 시간은 5시 30분이다. 조금 걸어가니 돌로 쌓은 성처럼 멋을 부리고 있다. 안 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굉장히 넓은 바위로 단장 된자연폭포수같다.산은왜푸르고물은왜맑은 가 여기에 조그만 한 암자라도 지어 대 자연을 벗 삼고 살아 보았으면 하는 정감에 사로잡힌다. 수 정 같은 맑은 물을 들여다 본 내 얼굴도 비추어주 고 물속에 헤엄치는 피리새끼까지 무두 모이니 너 어이 무슨 비밀을 어찌 모르랴 그러나 물은 아 랑곳없이 흘러 귓전을 고동소리 친다. 비탈진 산 끝 바위위에 세워진 정각이 500여 풍상을 견디고 서 있다. 이곳의 자랑꺼리며 냇 건너편에 신도비 가 거북대에 서 있으며 아름드리 된 수목들이 식 수한 사람들에 고마움에 인사하는 양 가지들이 축 늘어졌다. 이것으로 농월정을 자랑할 수 없는 금호강 물줄기 아름다운 산과 물에 쌓여져 있는 농월정, 대자연 숲속과 계곡 티 없는 무릉도원이 어딜소냐이곳이내일생에단한번이라하고옷 일랑 홀랑 벗고 물속에 퐁당 몸을 담그고 있으니 이 기쁨일랑 어디서 찾을 손가 내 시야는 그 아름 답고 웅장한 장관들을 정복하고 있는 것이다. 먹 어서라면 맑은 청수 왈칵 배속에다 다 쳐 넣 을 욕 심이련만 농월정은 삼복더위에 그런 것도 아랑 곳 없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폭포수는 바위틈 사 이로 끼고 돌아 물 고동을 울리고 이따금씩 새소 리가 농원정 산울림을 올린다. 한식경 후 개운한 기분으로 나왔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기 전에 찾 아가리라 하고 수첩을 보고 물어물어 찾아 간곳 이 안의면 월림리 성북부락 밀성박씨 종가인 박 태호씨 댁 불빛이 환히 켜진 굴레등 같은 기와집 사랑 대문안으로 들어가아무도 없는 사랑마루에 걸터앉아 둘러보니 큼직한기둥 높다란 사랑마루 상(上)하(下) 점잖게 안아 뜰을 내려다 보면서 호통을쳤던늠름한모습들이연상된다. 전갈을받고60세가량갓을쓴노인이젊잖게 인 사를공손히올리고저는전남장성의밀성박가라하 고 인근에 우리 300여호 일가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 즉 그렇게 우리 일가들이 살고 있느냐고! 오고가 는말이정이들어안채로들어오라기에넓직한대청 마루두칸이정명양쪽에는도지기들이정돈되어옛 날부터부와권세위풍당당한가풍을알수있다. 박태호씨는15대조인지족당이조참판을지내 셨는데 달을 희롱한다는 정자가 바로 농월정이 라 옛 적에는 현재 위치한 건물 뜰에 종담정사, 정담서당이(이곳에 팔담팔정) 지어놓고 형제들 이 우애스럽게 세월을 보내셨다고 하시면서 후 예 재실과 신도비까지 세웠으며 농월정 주변이 박씨들 소유였다 하니 이 얼마나 세도가 당당했 는지 짐작들이 간다.훌륭했던 선조님 덕분에 영 화를 누렸고,그 후손들은 현제 무엇을 해놓았는 지 묻고 싶었다. 박태호씨는 8남 1년녀(9男妹) 중 금년 3월에 28세 딸을 부산 화랑염직공장에 근무한이일동(李日東)씨와결혼신행을미루고 있다. 4남인 해균(20세)인데 재작년에 안의고등 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있는 중이라고 하면서 친 절히대ㅐ주어정이가는구나.내여정길느낀대 로일기장을보여주고읽어주었더니와~하.... 해균이와 소유인 원두막으로 참외가 늦게 되 었다면서 배불리 먹고는 마을 청년들과 계속된 이야기를 시냇물 내려가는 소리 이따금씩 산새 소리 정경에 취해 다정한 동성동본 가까운 친척 의정을새삼느껴본다. 【2014년9월9일화요일一氣晴】 여행 출발부터 날씨가 맑아 좋았다.일찍 일어 난 나는 마을 한 바뀌 돌았다. 옛 부농가(富農 家) 집은 좁고 외양간이 비좁아도 소 먹이통 나 무구시를 보니 소 3~5마리 정도 80 넘은 老母가 지팡이작대기호미들고밭으로가는모습은영 락 산 골 촌 로 (村 老 ) 이 다 . 인 정 많 게 뭐 좀 마 시 고 가라는 말까지 외종제(外從弟)와 펜션 들러 씻고출발을하였다. 먼저 오릉행이다. 어제까지 잘 소통된 도로는 경주관광단지 차량행렬로 꽉꽉 막혔다. 민우와 박서방 번갈아 운전 솜씨로 먼저 신라 천년고도 의 경주 오릉에 들러 나 혼자서 상석 앞에서 참 배를 정중히 드렸다. 넓은 오릉을 한 바뀌 돌아 동서남북에서 배알을 하옵고 폐문된 숭덕전 정 문에서도 배알을 드리고 일행은 오릉을 바삐 빠 져나와 어린 사남매 손(孫)들과 부모들이 자동 차를 타고 달리는 오락경기장에서 1시간, 노인 세명에게창밖으로손짓웃음선사하고신라시 조왕이 알에서 태어나신 월지(月池) 못을 들러 보고각종기념품을구입하여나왔다. 11명을 태운 승합차는 88고속도로를 달리지 만 비좁은 도로 확장공사로 정체 일쑤다. 젊은 아들과사위가운전을잘한탓으로내가52년만 에 들리고 싶은 함양군 안의면 성북동 월림,159 0년대 족당 박명부씨 고택에 하차해주고 일행 1 0명은광주로떠났다. 나 홀 로 종 손 댁 길 을 묻 던 차 문 중 박 규 대 씨 (경진생)에게 52년 만에 나의 일기를 보여주고 5 2 년 전 나 와 같 이 원 두 막 이 야 기 등 나 를 알 고 있 었다. 깜짝이다. 그렇지 않아도 서울을 찾아오려 고 했다면서 종손 집을 가르쳐주어 찾아 들어 갔 다.예나 지금이나 종가의 고택 대문 사랑대문 사 랑채 안채 52년 전이나 똑같은 형상이요 뒤에 부 조묘사당뜰앞잔디들도,현재81세갑술생종부 와전화통화한터라구면같구나.나를맞이한안 댁 2칸 중 대청에 52년 전 밥상 맞았고,故박태호 씨 큰 며느님 안 대청이다.20년 전에 사별(死別) 하시고 5남매를 둔 종부요 어머니요 가장으로써 자녀 모두 출가시킨 진주여고출신으로 부친 조 씨도6.25당시경찰관이었다는진진한이야기다 정한 오누이 같다. 숙모도 옆에서 정겨운 모습을 보고 듣고 이런 일이 있었구나.당시 사연들 공진 단20알을선사하였다.참으로아름답다. 【2014년9월10일수요일날씨맑음(晴)】 정갈하고 깨끗한 대대로 종손의 침실이요 무 이산방(無夷山房) 門이 밝아 두툼한 이부자리 속에서 일어났더니 서쪽 문토(門土)에 금부 반 야심경(般若心經) 나의 잠자리를 편하게 해주 셨을거이라 밖을 나와 덕유산 계곡수 서출(西 出) 동류수(東流水)일세 해 뜨는 산맥을 따라 나도 물길 따라 걷곤 하다가 들어왔더니 박규대 씨가 댁에서 아침밥상이란다. 물론 어제저녁은 宗婦 맛깔 나는 밥상이요 오늘아침 식탁은 규대 씨택 밥상이라........<줄임> 50여년전약속농월정다시찾아 일가의정나누어븣 학호 박래욱 선생의 일기 1997년기네스북에등재 박래욱현종이평생써온일기를설명하고있다. 농월정-경상남도함양군안의면월림리에있는누정으로예로부터 정자문화의보고라불리는화림동계곡의정자가운 데하나이다.조선선조때관찰사와예조참판을지낸지족당(知足堂)박명부가정계에서은퇴한뒤지었다. “무신불입(無信不立)신뢰가 없으면 서지 못한 다. 신뢰가 없으면 존립 기반이 없다 신뢰는 조직 의 생 존을 위 해서 마 지막 까지 지 켜야 할 덕 목입 니 다 .” 폭 염이 끝 인 듯 하면 서도 아 직까 진 선풍 기와 에어컨이 필요한 지난 15일 오후 취석 박원해 선 생을 찾은 광주광역시 금남로에 소재한 광주서예 연구원에서의첫만남의일성(一聲)이다. 신뢰와믿음은예술인의가장큰덕목이라하면 서 이 를 삶의 좌 우명 으로 삼 고 지금 에 이르 렀다 는 취석선생의글씨는선이굵고유연하면서도아름 답다고많은예술인들은말한다. 1950년전남나주에서태어난취석은군대를다 녀 온 후 당시 어 려운 시절 많 은 사람 들이 질 병의 고 통에 시 달리 는 것을 보 고 한의 학을 배 우기 로 결 심하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유명한 침의 대가들 을 찾아다니면서 침술을 배웠으나 한의학의 대부 분이한문이었기에어려움이있었다.체계적인공 부를 위해 한문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하고 1975년 아무것도 모른체 학정 이돈흥 선생의 한문서예교 실을찾았다. 학정 이돈흥 선생은 우리나라 서예원로작가로 꽤 유명한 서예대가이다. 이곳 1층에서 노강선생 의 한문 강의를 들으면서 2층에서 서예를 하는 사 람 들이 서 예도 해 보 지 않 겠냐 는 말에 그 럼 축문 이 나 쓰고 비 문글 씨만 쓸 줄 알면 되 지 않을 까 하 는 생각에 처음 붓을 잡았다. 3개월이 6개월이 되 고 다시 수년 이 지났 다. 학 정 선생 을 찾 은 지 5년 이 되어 학원 강사를 요청받았다. 학정선생의 명 성은 대한민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든 유명한 분 인데강사라니선생의명성에누를끼치지않을까 하여 처음엔 망설였다. 아직 내가 생각하는 서예 에 대 해 만 족하 지 않 았는 데, 그 러나 노강 선생 을 비롯 한 주변 분 들의 적 극적 인 권유 에 10년 간 많은 원생들을 지도했다. 그러나 본인 자신이 아직 배 움의갈증이해소된것은아니기에전국의유명한 서예대가들을 찾아다니며 서법 연구와 자신만의 서체를 만들어갔다. 특히 여초 김영현 선생이 계 신 서울 을 오가 는 천리 길 여정 은 많이 힘 들었 다고 기억한다. 전국의유명한서예가를찾은것은그분들이지 도하는 기초를 알고 싶었고, 이는 자기만의 지도 방식과서체연구에큰도움이되었다고한다. 예향의 도시라고 말하는 광주,아시아문화중심 인 이곳에서 개최되는 전라남도 미술대전, 전국 무등미술대전,광주광역시 미술대전 등에서 차례 로특선을차지하였다.그리고예술이라면모두가 동경하는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2003년 특선의 영예를 안았다. 2008년부터는 대한민국미술대전 의 심사위원으로 선정되어 대한민국 최고의 서예 가로 서 인정 받은 셈 이다 . 스승학정선생과 중국을오가며교류전을통해 중국에서도 이미 유명인사가 되었다.취석 선생은 주 2회 전남 나주시 공공도서관에 나가 지역의 서 예인구저변확대를통해우리서예를알리고있다. 전국의 사찰과금석문에취석선생의글씨를볼 수 있다. 취석 선생은 서예도 우리의 전통문화이 다 . 그 리고 서 예는 사람 을 차 분하 게 만 든다 며 서 예 예 찬론 을 펼 치면 서 이는 믿 음과 신 뢰를 가질 수 있고, 인성함양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며 우리 사회가믿음과신뢰로써더윤택해졌으면한다고 말하고 있어 취석 선생과 같은 분들이 오래도록 우리 곁에 있어 더 행복한 사회가 만들어지길 기 대해본다. 취석 박 원해 선 생 프로 필 △ 전남 나주 생 (生) △ 대 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역 임 △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 선 △ 광주광역시 미술대전 특선 △ 전국 무등미술대전 서예부문 특선 △ 전라남도 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 △광주광역시 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 △광주광역시 미술대전 운영위원 역임 광△ 전국 고교백일장 심사위원 역임 △ 국 제서법예술연합주체 KBS 휘호대회 은상수상 △ 중국 서예교류전 △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 △전국무등미술대전초대작가△전라남도미술 대전 초대작가 △광주광역시 미술대전 초대작가 △ 국제 서 법예 술연 합본 부 및 호남 분회 회 원 △ 한국 미술협회 회원 △ 광주민속박물관 이사 △ 광주서예원구원장. ■종친탐방븣 서예가취석박원해선생 무신불입(無信不立)-취석박원해書. 취석박원해선생대형작품(佛心)을펼쳐보이고있다. 2018한중교류전에서본인의작품을펼쳐보이고있다.사진맨오른 쪽취석박원해선생은‘혼자웅대한산봉우리에앉 았노라獨坐大雄峰’의작품을선보였다.(오른쪽에서2번째학정이돈흥선생) 조선초기정치·행정·군사분야의전문가로활약 한 구치관 선생의 치적에 대한 전문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묶은 ‘청백리재상 구치관’이라는 ‘학술연구 서’가지난7일오전10시서울올림픽파크텔올림피 아홀에서 능성구씨충렬공종중·충열공구치관연구 소가공동주최한출판기념회를통해선보였다. 이날 출판기념회는 식전공연에 이어 본 행사 에는 한학자이자 전통문화연구가인 구자청 선생 의 ‘구 치 관 선 생 의 생 애 에 대 한 집 약 적 스 토 리 ’ 박중훈 한국행정연구원 선임연구원의 ‘청백리 구치관선생과오늘의시대 적 정신’ 한국학 중앙연구 원 안장리 책임연구원의 ‘구치관 선생과 계유정난 의 역사적 사실관계’의 주 제로 연구자의 담론마당이 펼쳐져선생의생애에대한조명이이루어졌다. 청백리 구치관 선생은 세종에서 성종에 이르는 여섯임금들의 치세동안 활약했던조선전기의 문 신이자 무신으로 유명하다. 그의 일생은 크게 세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는 출장입상(出將入 相)으로 ‘전장으로 출전하면 뛰어난 장수가 되고 조정으로 들어오면 훌륭한 재상이 된다는 뜻이 다.’ 다시 말하면 문무(文武)의 자질을 두루 갖춘 걸출한인물을지칭하는말이라하겠다. 둘째는청백리이다.여섯임금을모시면서다섯조 (曹)의참판과조정의요직을거쳐영의정에오르면 서 부정한 모든 청탁을 배척하였고, 집이 가난하여 장례를치를수없어임금이특별히장례비용과물품 을하사하였으니청백리의표상이아닐수없다. 셋째로는 충렬(忠烈)이다. 선생의 사후에 조 정에서는 국가사회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충렬이라는시호를내린것이다. 선생이 영의정을 사임할 때 사관이 논평하기 를 “구치관은 의논이 정직하고 용모가 엄의하 여 사람마다 존경하고 두려워하였으며,또 청렴 하고근신하여뇌물을 받지않았다.”고 하였다. 한편 행사를 공동주최한 능성구씨충렬공종중 (회장 구형회) ·충열공구치관연구소(소장 구자 청)는 평생동안 절제와 청렴을 몸소 실천하여 공· 사생활에 모범을 보임으로써 청백리 재상으로 추 앙을받으신선생의치적이전문가들의학술적연 구결과로이세상에빛을보게되는영광스러움을 맞았다며 행사 참석자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잊 지 않았다 . /자료제공충렬공구치관연구소 ■타성(他姓)소식븣 ‘청백리재상구치관’출판기념회가져 능성구씨충렬공종중·충열공구치관연구소 공동주최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