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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 이준 선생은 조선 왕조 철종왕 10년 서기 1859년 음 12월 18일 未(미)시에 함경남도 북청군 속청면 용전동에서 탄생하였다. 고 휘 병권 비 청주이씨 조고 휘 명섭 선조는 이씨왕조 창업주인 태조 대왕 휘 성계의 영백인 완풍군 휘 원계이요 환조대왕의 장남이다. 선생의 초휘 성좌 자 여천이요. 향과를 볼때에는 휘 선재 자 순칠이요 후일에 호를 해옥 또는 일성이라 하였다. 3세때에 양친이 돌아가시고 조부의 앞에서 장성하였다. 천안영위한 선생은 12세에 향시에 응하여 그 문사는 세인을 경탄케하였고 17세에 대지(大志)를 품고 상경하여 적리 김병시상공 종친 대원군 유림의 명류인 면암 최익현과 접제하여 초인의 재사임이 인정되였었다. 때마침 청일전쟁의 뒤를 이어 이 나라 근대화 운동이 싹트자 법관양성소를 졸업 검사에 취임하였으나 대관탄핵으로 퇴관하였다.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 박사와 함께 독립협회에 盡淬(진쉬) 평의장으로서 보수파와의 투쟁으로 신망이 위험하게 되자 원법부 대신 장박과 함께 일본에 망명하여 와세다대학을 졸업 귀국후에는 협회의 후신인 만민공동회에서 ○○한 정론을 펴는 동시에 지사 민영환 이상재 등과 비밀히 개혁당 결성을 진행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1904년에 아일전쟁이 일어나자 조국의 위기를 예감하고 당시 도지부대신 이용익과 함께 한국의 엄정중립을 선언하게 하였다. 전시 중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늑성하고 전후에 침략이 더욱 가중하자 상해로 가서 열국의 여론환기로 을사조약 저지에 힘쓰는 동시에 마침 미국대통령 데오더루스벨트의 영애의 내한을 계기로 한미공수동맹을 획책하였으나 영일동맹중인 국제정세의 불리로 대하기경 만회할 수 없었다. 1905년 11월 17일에 일사 이등박문이 우리 군신을 병위로 강압하고 을사보호조약의 국치가 오게되자 지사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송병준 등이 뒤이어 순국하고 거국이 격분하였었다. 선생은 개연히 전선에 나서서 뇌려풍비(雷勵風飛) 치성동인(致誠動人) 으로 구국에 건신(揵身)하였었다. 대한자강회 공진회 등 결사로 민중을 각성시키기에 전력하면서 때로는 일본이 강점한 황지개간권의 탈환 탐관오리의 탄핵으로 황주철도에 알배되는 고난도 격었고 때로는 내정개혁을 위하여 평리원 검사로서 은사안의 불공오탁을 들어서 법부대신 이하영을 고발하여 법의 엄정을 밝히려도 하였었다. 일채를 갚으려는 국채보상운동의 선두에 서기도 하고 국민교육회 서북흥학회에 청년지사 안창호 이갑 등과 협력하여 삼성학교 경영으로 애국청년을 양성도 하고 안중근 경영의 삼흥학교에 가서 애국혼 환기에도 힘쓰는 등 鞠躬盡瘁(국궁진췌)하였었다. 국가의 근대화에 헌정실시가 선결임을 통감하고 헌정연구회를 결성하여 그 회장으로 있으면서 우선 인재등용으로 내정의 혁신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일본이 늑성한 보호조약 때문에 모든 경론이 저지되고 수포화되므로 당면의 대급은 이 철쇄를 단절함에 있다고 본 선생은 생명을 내걸고 이를 위하여 싸우기로 하였다. 때마침 화란국 해아에서 아제의 발의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과 함께 고종제의 친임을 얻어 그 회의에 제소하여 일본의 羈絆(기반)을 단절하려 하였다. 제의 친서를 지니고 수륙의 만리원정을 거처 아경에서 동지 이위종과 함께 먼저 아제의 후원을 얻고 이어서 미국인 할버트의 주선으로 미국대표의 동정을 얻어 회의장에서 일본의 침략과 잔학으로 늑약임을 통론하는 동시에 열국기자들에게 일본의 비인도와 국제사기를 폭로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영국을 배경으로 방해하고 일적에게 유폐된 고종제의 친임 부인의 위전이 오자 회의에서의 위약광정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참회할 자격조차 피탈되었다. 선생의 통분은 극에 이르러 만강열혈로 통론일장하고 아신성인의 순국으로써 외로는 열국의 사이비정의를 규탄하고 내로는 국민의 순절구국의 대도를 교시하니 때는 서기 1907년 7월 14일 이었다. 한국에 인연깊은 원세개의 포장에 剖胸濺血 示心眞 壯節便驚 天下人 萬里魂歸 迷故國 千家淚灑 哭忠臣 豈思妻子 難暝目 爲報君王 不有身 大義堂堂 懸日月 泉臺應結 伯夷隣. 선생의 유해는 해아국립공원에 안장하고 생전에 혈맹의 우이던 이상설 선생의 친필로 이준 1859년 한국 북청에서 출생하여 1907년 화란국 해아부에서 순절하다 라고 지하였다. 선생의 유해가 해아에 계신지 56주년인 서기 1963년 10월 4일에 조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성북구 수유리 산 127번지의 1호 산록에 안장하다. 초계주씨와의 사이에 1남 1녀을 길르니 장녀 송선 장남 용으로 송선은 사인 조건학에게 가하고 재취 평동 이일정 여사에게 1녀 종숙을 길러서 사인 류자후에게 가하였다. 후학 류선열 근찬 서기 1963년 10월 4일 파평후인 윤희채 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