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page


43page

열사 이준 선생은 조선 왕조 철종왕 10년 서기 1859년 음 12월 18일 未(미)시에 함경남도 북청군 속청면 용전동에서 탄생하였다. 고 휘 병권 비 청주이씨 조고 휘 명섭 선조는 이씨왕조 창업주인 태조 대왕 휘 성계의 영백인 완풍군 휘 원계이요 환조대왕의 장남이다. 선생의 초휘 성좌 자 여천이요. 향과를 볼때에는 휘 선재 자 순칠이요 후일에 호를 해옥 또는 일성이라 하였다. 3세때에 양친이 돌아가시고 조부의 앞에서 장성하였다. 천안영위한 선생은 12세에 향시에 응하여 그 문사는 세인을 경탄케하였고 17세에 대지(大志)를 품고 상경하여 적리 김병시상공 종친 대원군 유림의 명류인 면암 최익현과 접제하여 초인의 재사임이 인정되였었다. 때마침 청일전쟁의 뒤를 이어 이 나라 근대화 운동이 싹트자 법관양성소를 졸업 검사에 취임하였으나 대관탄핵으로 퇴관하였다.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 박사와 함께 독립협회에 盡淬(진쉬) 평의장으로서 보수파와의 투쟁으로 신망이 위험하게 되자 원법부 대신 장박과 함께 일본에 망명하여 와세다대학을 졸업 귀국후에는 협회의 후신인 만민공동회에서 ○○한 정론을 펴는 동시에 지사 민영환 이상재 등과 비밀히 개혁당 결성을 진행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1904년에 아일전쟁이 일어나자 조국의 위기를 예감하고 당시 도지부대신 이용익과 함께 한국의 엄정중립을 선언하게 하였다. 전시 중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늑성하고 전후에 침략이 더욱 가중하자 상해로 가서 열국의 여론환기로 을사조약 저지에 힘쓰는 동시에 마침 미국대통령 데오더루스벨트의 영애의 내한을 계기로 한미공수동맹을 획책하였으나 영일동맹중인 국제정세의 불리로 대하기경 만회할 수 없었다. 1905년 11월 17일에 일사 이등박문이 우리 군신을 병위로 강압하고 을사보호조약의 국치가 오게되자 지사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송병준 등이 뒤이어 순국하고 거국이 격분하였었다. 선생은 개연히 전선에 나서서 뇌려풍비(雷勵風飛) 치성동인(致誠動人) 으로 구국에 건신(揵身)하였었다. 대한자강회 공진회 등 결사로 민중을 각성시키기에 전력하면서 때로는 일본이 강점한 황지개간권의 탈환 탐관오리의 탄핵으로 황주철도에 알배되는 고난도 격었고 때로는 내정개혁을 위하여 평리원 검사로서 은사안의 불공오탁을 들어서 법부대신 이하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