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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 이준 열사 위훈비(一醒 李 儁 烈士 偉勳碑) 1859년 기미 12월 18일 함경남도 북청에서 출생. 호는 일성이며, 성격이 강인하고 호탕한 기품과 비범한 용기는 특출하였다. 1888년 북청에 경학원을 설립하여 육영시험에 전력하였고 1894년 함흥순릉참봉에 임하였다. 1895년 우리나라 시초 법관양성소를 졸업한 일성 이준은 한성재판소 검사에 임명되었다. 1896년 서재필등과 조선독립협회를 조직 평의장이 되어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계속 조선독립협회에서 활동하였다. 1902년 만민공동회 주최로 내정개혁운동에 앞장서다가 이승만, 이동녕등 17명과 함께 투옥되었다. 또 개혁당을 조직 민영환, 이상재등과 활동하였으며, 1904년 한일의정서 반대운동을 일으키고 대한보안회 도충무로 일본인에 대부한 황지문권을 환원시켰다. 그후 적십자회, 공진회를 조직 회장에 피선되어 활동중 소인배들의 모하으로 황주 철도에 6개월간 정배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의 허구성을 국제적으로 알리기 위하여 상해서 활동하다가 귀국하였다. 1906년에는 윤효정, 장지연등과 자강회를 조직하였으며 동년 만국청년회, 헌정연구회, 국민교육화 회장등을 역임하고 보광학교와 서북흥학회, 오성학교를 창설하여 청년운동과 육영사업에 힘썼다. 열사는 다시 뜻한바 있어 평리원검사 및 특별법원 검사로 있으면서 법도를 바로 잡는데 노력하여 법의 수호신이란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동년 안창호와 비밀결사를 조직 활동하였고 안중근이 설립한 전남포 삼흥학교에서 '일심단결하여 완전독립하자'란 연제로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1907년 YMCA강당에서 최후로 연설한 연제 '생존경쟁'은 청중들의 감명을 깊이 받았다. 동년 국제보상연합회 회장시에는 국제보사에 대한 인식을 촉구하였으며 '한국부활론'을 저술하여 민족정기를 계도하였다. 같은해 을사보호조약은 일본의 강압적 체결임을 호소하려고 고종황제의 친서를 휴대하고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국권을 회복코자 이상설, 이위종과 같이 네델란드 헤이그에 도착, 세계언론기관에 호소하고 의장단을 방문, 고종황제의 친서와 신임장을 전달하였으나 일본대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에 격분한 열사는 자결순국으로써 한민족의 자주독립의 염원과 기개를 온세계에 떨쳤으니 때는 1907년 7월 14일 향년 49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