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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발하여 법의 엄정을 밝히려도 하였었다. 일채를 갚으려는 국채보상운동의 선두에 서기도 하고 국민교육회 서북흥학회에 청년지사 안창호 이갑 등과 협력하여 삼성학교 경영으로 애국청년을 양성도 하고 안중근 경영의 삼흥학교에 가서 애국혼 환기에도 힘쓰는 등 鞠躬盡瘁(국궁진췌)하였었다. 국가의 근대화에 헌정실시가 선결임을 통감하고 헌정연구회를 결성하여 그 회장으로 있으면서 우선 인재등용으로 내정의 혁신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일본이 늑성한 보호조약 때문에 모든 경론이 저지되고 수포화되므로 당면의 대급은 이 철쇄를 단절함에 있다고 본 선생은 생명을 내걸고 이를 위하여 싸우기로 하였다. 때마침 화란국 해아에서 아제의 발의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과 함께 고종제의 친임을 얻어 그 회의에 제소하여 일본의 羈絆(기반)을 단절하려 하였다. 제의 친서를 지니고 수륙의 만리원정을 거처 아경에서 동지 이위종과 함께 먼저 아제의 후원을 얻고 이어서 미국인 할버트의 주선으로 미국대표의 동정을 얻어 회의장에서 일본의 침략과 잔학으로 늑약임을 통론하는 동시에 열국기자들에게 일본의 비인도와 국제사기를 폭로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영국을 배경으로 방해하고 일적에게 유폐된 고종제의 친임 부인의 위전이 오자 회의에서의 위약광정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참회할 자격조차 피탈되었다. 선생의 통분은 극에 이르러 만강열혈로 통론일장하고 아신성인의 순국으로써 외로는 열국의 사이비정의를 규탄하고 내로는 국민의 순절구국의 대도를 교시하니 때는 서기 1907년 7월 14일 이었다. 한국에 인연깊은 원세개의 포장에 剖胸濺血 示心眞 壯節便驚 天下人 萬里魂歸 迷故國 千家淚灑 哭忠臣 豈思妻子 難暝目 爲報君王 不有身 大義堂堂 懸日月 泉臺應結 伯夷隣. 선생의 유해는 해아국립공원에 안장하고 생전에 혈맹의 우이던 이상설 선생의 친필로 이준 1859년 한국 북청에서 출생하여 1907년 화란국 해아부에서 순절하다 라고 지하였다. 선생의 유해가 해아에 계신지 56주년인 서기 1963년 10월 4일에 조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성북구 수유리 산 127번지의 1호 산록에 안장하다. 초계주씨와의 사이에 1남 1녀을 길르니 장녀 송선 장남 용으로 송선은 사인 조건학에게 가하고 재취 평동 이일정 여사에게 1녀 종숙을 길러서 사인 류자후에게 가하였다. 후학 류선열 근찬 서기 1963년 10월 4일 파평후인 윤희채 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