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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성 선생은, 1919년 3월 1일 평북 선천군(宣川郡) 선천읍(宣川邑)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선천의 만세시위는 민족대표였던 이승훈(李昇薰)이 신성학교(信聖學校) 성경교사였던 홍성익(洪盛益)에게 3월 1일 신성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부탁하며 추진되었다. 홍성익은 동료 교사인 김지웅(金志雄) 등과 연락을 취하며 만세시위 계획을 추진하였다. 신성학교 내의 업무는 김지웅이 담당하였는데, 그는 학생들을 불러 독립선언서 등사 등을 맡겼다. 당시 신성학교 4년생이던 그는 김지웅의 지시에 따라 동급생인 장일현(張日炫)·고병간(高秉幹)·박찬빈(朴贊彬) 등과 함께 도쿄[東京] 유학생들이 발표한 2·8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한편 시위 현장에서 사용할 태극기도 대량으로 제작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학교 종소리를 신호로 그는 동교 학생들과 일제히 교문으로 뛰쳐나갔다. 사전 연락에 따라 옆에 있던 자매학교인 보성여학교(保聖女學校) 학생들도 동참하였다. 학생들이 천남동(川南洞) 시장에 도달할 무렵 시민들도 동참하여 시위군중은 1천명에 달하였다. 시위대는 군청과 경찰서를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때 선천수비대와 경찰이 출동하여 발포를 감행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시위군중은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6월 3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불복하여 고등법원에 상고하였다. 그는 상고 취지에서 일본이 내세우는 기만적인 동양평화의 허구성을 질타하고, 일제의 식민통치 잔학상을 지적하였다. 또한 일본인의 한국인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비판하는 한편, 2천만 동포는 죽음으로 혈전을 통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임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7월 12일 상고가 기각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1922년 쥬오대학[中央大學] 전문부를 졸업하였고, 1927년에는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 경제학과에서 수학하였으며, 1930년 흥사단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