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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읍 3.1만세운동 항쟁지 ● 정의 : 1919년 3월 12일 철원군과 김화군의 주민들이 모여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 ● 현재주소 :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청양리 일대 ● 당시주소 : 강원도 김화군 김화면 청양리 ● 현재상태 : 청양리 헌병주재소가 있던 곳은 무수정이란 곳으로, 현재는 주택이 자리하여 그 흔적을 전혀 만나는 접경 지역으로, 당시 만세운동에는 철원군민 뿐만 아니라 김화군민도 참여하였다는데 김화읍의 만세운동은 김화읍 청양리(淸陽里)에서 시작됐다. 이곳에는 당시 김화 헌병분견소 청양리 파견소가 설치돼 있었다. 1919년 3월 12일 청양리과 갈말읍 지경리 주민 800여명은 헌병 파견소에 집결하여 독립 만세의 힘찬 첫 함성을 터뜨렸다. 청양리는 김화와 철원이 만나는 교통의 요지로 시위대에는 인근의 도창리, 토성리, 동막리, 내대리 주민까지 합세하여 큰 세력을 과시했다. 토성리 쪽으로 넓게 펼쳐진 벌판에 모인 시위대들은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만세를 힘차게 외쳤다. 이어 오후 1시 쯤 방향을 바꾸어 문혜리로 이동, 갈말면 사무소에서 문혜리 시위대와 합세하여 직원들이 도주하여 텅빈 면사무소를 점거하고 밤이 깊도록 만세를 부르며 나라 잃은 국민의 쌓인 울분을 마음껏 터뜨렸다. 당시 김화지역에서는 지역 내 6개소에서 8회에 걸쳐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만세운동에 참가한 연 인원은 모두 3천500여명으로 추산되며 실제 인원은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참가자들으 추측했다. 4월 4일 근동면 하소리(下所里) 주민들이 만세 시위대를 형성하여 김화읍내로 행진해 들어갔다. 수비대와 헌병의 저지를 뚫고 읍내에 이르자 읍민들이 합세하여 시위대는 5백여명으로 불어났다. 이 고장 출신 독립운동가 이강훈 선생(1903~2003)은 당시 17세의 어린 나이에 만세운동에 참가하였으며 곧 만주로 망명하여 상해임시정부와 김좌진 장군 아래서 독립운동에 헌신, 독립투사의 길을 걷게 된다. 한편 지오면(岐梧面) 소재지인 창도리(昌道里)에서는 더욱 맹렬한 만세쉬이가 펼쳐졌다. 3월 27일 시작된 창도리의 만세시위는 29일 밤에 이르러 500여명 규모로 불어났으며 이날 밤 성난 군중들은 헌병 주재소에 돌을 던지며 진입하여 헌병과 충돌, 헌병의 발포 사태로 이어져 사상자가 발생하고 시위 주동자들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