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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강종근 목사 강종근(姜琮根)은 1901년 9월 20일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에서 부친 강영동과 모친 박형옥의 2남으로 태어났다. 철령에 있는 이동교회(裡洞敎會)에서 신앙생활을 시작. 925년 배재학당 졸업, 1929년 감리교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 1926년 5월 14일 윤희성과 결혼하여 1남 3녀 자녀를 낳았다. 1929년 감리교협성신학교를 졸업한 후, 신영리교회(현재 세검정교회)에서 목회를 시작. 1937년 연천교회 담임전도사로 목회. 1938년 강원도 철원군 김화 창도교회(현재는 북하) 담임. 1939년 목사 안수를 받고 정회원에 허입한 후 철원지방 철원제일교회를 담임. 강종근 목사는 하나님의 복음과 함께 조선 민족이 하나님의 은총 속에 독립하여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1940년 9월 철원제일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신사참배를 거부하자 조선총독부의 "사상범 예비검속령"에 의해 검거되었고, 철원경찰서에 구금되어 가혹행위를 당한 후에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일제는 설교시간과 청년부 간담회에서 민족주의를 고양시켜 조선독립을 꾀했다는 죄를 씌워 1941년 10월 9일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하였다 (1941년 형공 제1587호). 그의 판결문을 보면 그는 연천교회 담임 때부터 교회 청년들에게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할 것을 격려하였는데, 특히 창도교회 시무 중 기소된 것이 많았다. 미결 구류기간 중 받은 혹독한 고문으로 쇠약해진 강종근 목사는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으나 1942년 6월 3일 새벽 끝내 순교하엿다. 그는 마지막 면회에서 윤희성 사모에게 원수를 사랑할 것을 이야기하였다. "여보, 나는 주님의 곁으로 갑니다. 절대로 나를 취조하고 감옥에 보낸 일본 경찰을 미워하지 말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세요. 그리고 우리 자녀들은 하나님이 다 키워주시겠다고 나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찬송을 불렀다. "이 몸에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1942년 6월 3일 강종근 목사는 신앙을 지키며 죽도록 충성하다가 세브란스 병원에서 숨을 거두고 하나님 나라로 갔다. 숨을 거두기 전 "나는 기뻐"라고 한 마디를 하고 숨을 거두었다. 순교자 강종근 목사는 2003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고, 2006년 11월 국립 대전현충원에 유해가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