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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재규(공사겸)은 경상남도 합천(陜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23일 상백면(上栢面)과 삼가(三嘉)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3월 18일의 삼가 장날을 이용하여 정연표(鄭演彪) 등과 함께 4백여명의 시위군중을 지휘하여 오전 11시부터 오후 8시까지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무력행사로 일단 해산하고 3월 23일 상백면에서 다시 거사하기로 약속하였다. 3월 23일, 그는 칠순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정원규(鄭元圭)·진택현(陳宅賢)·오영근(吳永根)·정치규(鄭致圭) 등과 함께 4천여명의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상백면사무소 일대를 시위행진하고 면사무소를 불태우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어 4천여명의 시위군중은 10여리 떨어진 삼가 장터로 시위행진하였다. 도중에 일제의 연락망을 두절하기 위하여 전주 2개를 쓰러뜨리고 삼가 장터에 도착하였는데, 이날 삼가 장터에는 가회(佳會)·삼가·상백면으로부터 시위군중이 모여들어 그 수가 1만 3천명이나 되었다. 오후 3시경, 정금당(正衿堂) 앞에서 김전의(金典醫, 성명미상)·정방철(鄭邦哲)·김달희(金達熙)·임종봉(林鍾鳳) 등이 등단하여 조국독립의 필연성과 일제의 침략상을 규탄하는 강연회가 열렸다. 그러나 마지막 연사인 임종봉이 등단하여 연설을 할 무렵, 강연장을 포위하고 있던 일본 헌병이 임종봉에게 총격을 가하였다. 이에 격분한 시위군중이 그들에게 달려들자, 일본 헌병은 경찰주재소로 도망하였다. 오후 5시 30분경, 시위군중은 몽둥이와 낫을 들고 경찰주재소로 달려갔다. 이때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일본 군경의 무차별 사격으로,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던 그는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