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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8월31일 금요일 6 (제140호) 기획·관향조 종친회 영해박씨는 신라 파사왕의 후예이다.시종조는 파사왕의 현 손(5세손) 물품의 맏아들로서 호는 관설당(觀雪堂) 휘는 제 상(堤上)으로내물왕때삽량주의태수로있었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와 일본의 압력에 시달리는 약소국가였 다. 눌지왕의 두 아우인 복호(卜好)는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 고,미사흔(未斯欣)은왜(倭)로인질로보내어볼모로잡혀있 었다. 눌지왕(訥祗王)이 즉위하여 고구려와 일본에 억류된 아우 를 그리워하며 신하를 보내어 귀환을 여러 차례 요구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이에 박제상이 고구려로 가서 뷺한 뿌리의 후예로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뷻라는 한마디로 복호를 데려왔다. 그리고 박제상은 다시 미사흔을 구하기 위 해서 왜국으로 떠나 그해 7월에 그곳에 도착, 뷺신라왕이 나의 부모를 죽이고,나를 해치려 하므로 도망쳐 왔소뷻하고 망명한 것으로가장했다.왜왕은그말을곧이듣고장차신라를칠때 미사흔과 그를 앞잡이로 삼으려는 속셈을 품게 되었다. 왜왕 으로부터 어느 정도 신임을 받게 되자 그는 자주 미사흔을 데 리고 바다에 나가 뱃놀이를 하면서 탈출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지척을 분간할 수 없도록 안개가 끼자 그는 바 로 이때다 하고 미사흔을 몰래 신라로 떠나보냈다. 박제상의 활약으로 두 아우를 무사히 찾은 눌지왕은 크게 잔치를 베풀 고 노래를 지어 불렀으니 그 노래가 유명한 븮우식곡븯(憂息曲) 이다. 한편 미사흔을 떠나보내고 숙소로 돌아온 박제상은 감시하 는왜인에게뷺왕제는몸이피곤해서주무시고계시오뷻하며시 간을 끌다가 마침내 발각되어 왜왕 앞에 묶여 나가 문초를 받 게 되었다. 뷺나의 신하가 되면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뷻는 왜왕 에게 뷺나는 계림(鷄林)의 신하이다. 나는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망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을 것이며, 계림의 모진 종아리 는 맞을지언정 왜국의 작록은 받지 않을 것이다뷻하며 굴복하 지않았다.발바닥을벗겨갈대밭을끌고다녀도뷺나는계림의 신 하 다 뷻 하 며 굴 복 하 지 않 고 불 에 달 군 철 판 위 로 끌 고 다 녀 도 끝내 굴복하지 아니하자 왜왕은 그를 목도(木島)로 유배시켰 다가 마침내 불에 태워 죽이고 말았다.그러자 부사로 갔던 김 철복(金轍復)이그의 말을 끌고 가서 의복을 수습하여 매장하 고 이 사 실 을 혈 서 로 써 말 의 입 에 물 리 고 채 찍 을 쳐 바 다 로 쫓고 자결하였다. 말이 신라로 돌아와 궁궐 앞에 이르러 혈서 를 토하고 죽으니 왕이 그 혈서를 읽고 크게 슬퍼하며 대아찬 에 추증하고 양산에 비를 세워 충절을 기렸다.그리고 후세 사 람들은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에 충렬묘와 치산서원, 양산에 효충사, 춘추원, 공주에 동계사, 영덕에 운계서원 등을 세워 제향하였다. 관설당(휘 제상)의 아들 문량(文良)의 호는 백결(百潔)이 다. 5세 때 부친께서 왜국에서 순국하시고, 모친께서는 치술 령에 올라가 동해를 바라보면서 왜국에 간 남편을 기다리다 가 순절하시고, 큰누이 아기, 셋째 누이 아경 역시 모친을 따 라 순사하자 둘째누이 아영에게 양육되었다. 자비왕(慈悲 王) 때 이척찬예부시랑을 지냈고 대령군(大寧君)에 추봉되 었다. 관직에있을때도청빈하였지만벼슬을버리자더욱가난하 여 옷 한 벌 을 백 군 데 나 기 여 입 었 으 므 로 세 상 사람들이 백결 선생(百結先生)이라 하여 부자간이 충절(忠節)과 청빈(淸 貧)함의대표적인인물로추앙받고있다. 26세(世)에 이르러 휘 명천(命天)은 고 려 정종조에 전법사 판서(典法司判書) 삼중대광벽상공신(三重大匡壁上功臣)에 오르고, 금자어대(金紫魚袋)를 하사 받았으며, 예원군(禮原 君)에 봉해져 중시조로 예원의 관향 사용하였고,현종조에 예 원(禮原·禮州)이 영해(寧海)로 바뀌면서 영해박씨로 사용하 게 되 었 다 . 영해박씨는 크게 2파(派)로 나뉜다. 예원군(禮原君)의 현 손(휘 태길)은 정순대부 밀직재학을 지내고 영성군(寧城君) 에 봉해지고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公은 아들 둘을 두었는 데 용재(用才)·용량(用良)으로 장자 용재(用才)公은 조정대 부 검교 예빈경으로 아들 회의(懷義)는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이부상서 좌복야이고손자 휘송비(松庇)는위사공신(衛社功 臣)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평장사 겸 상호군판도판서 태자 태사를지냈다.덕원군에봉해져고향영해고을이덕원소도호 부(德原小都護府)로 승격되었고, 그는 태사공파의 파조가 되 고 후 손 들 은 충 북 보 은 , 옥 천 , 회 인 , 예 산 , 안 태 등 에 집 성 촌 을 이루며각문중으로분류된다. 충의공(忠毅公, 휘 태길)의 차자 용량(用良)은 은청광록대 부 상서좌복야이고 시호는 충경(忠敬)으로 그의 아들 응경 (應卿)은 부윤(府尹), 손자 인근(仁謹)은 신호위 대장군으로 시호는 충정(忠靖), 증손 세통(世通)은 고종왕2년(高宗王 二 年,1215)에 통해현령(通海縣令, 평안남도 평원군 서북부에 있던 옛 고을)이 되고 同11年(1224)에 양광도 안찰사(楊廣道 按察使) 兼 진안대장군(鎭安大將軍)이 되어 수훈(殊勳)하니 高宗王 三十二年(高麗第 23代)에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 平章事)에 올랐고, 원종조(元宗朝,高麗24代 1259~1274년)에 통해군(通海君) 봉해져 시중공파의 파조이고 후손들은 봉화, 안동, 영주, 예천, 양동, 간성, 울진, 평해, 청송진보, 김화, 양 구,용인,양주,문천등에각문중을형성하고세거한다. 시중공의 아들 諱 홍무(洪茂)는 고종 14년(1227년)에 태어 나 1245년(乙巳)에 진사시(進士試)에 合格하고, 同年九月에 한림원주사(翰林院主事, 임금의명을 받아 문서를 꾸미는 관 아)가 되고, 高宗 三十九年(辛亥)에 이부랑중부사(吏部郞中 副使),1254영(고종41)계림부자사(鷄林府刺史)되고,이듬해 봄 에 치 술 령 ( 述 嶺 ) 에 시종조(始宗祖)와 시조모(始祖 母)사우를중수하였다. 1255년(고종42) 밀직사(密直使)가 1276년(忠烈王 2年) 예 의판서(禮義判書)가 되니 국자감(國子監(유학을 가르치던 최고의 국립 교육 기관)과 향학제도(鄕學制度)를 강화(强化) 하였다. 1278년(忠烈王 4年)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 평장사(金紫 光綠大夫門下侍中平章事)에오르다. 또 忠烈王 6年에 세자빈객령(世子賓客令)을 兼任(겸임)했 다. 시중공의 손자는 휘(諱) 함( 鞫)으로 1255년(高宗 43) 태어 나 1279년(忠烈王5) 예문관 부제학(藝文館副提學)이 되고, 1 282년(忠烈王 8年) 사급녹권(賜給祿券, 임금이 내리는 공훈 을 새긴 패)을 배사(拜辭,하사를 사양함)하고 1333년(忠肅王 復位 元年)에 문하시중평장사 겸 좌복야(門下侍中平章事兼 左僕射)가되고강양백(江陽伯)에추봉되었다. 이렇듯 조(祖)·부(父)·손(孫) 3대(代)가 시중을 역임함으 로우리역사상기이한일로기록된다. 강양백(江陽伯)의 손자의 휘(諱)는 구(球), 자(字)는 경옥 (景玉)으로 운봉의 감무로 권농(勸農)과 병마(兵馬)를 단련 하는 단련판관을 지내고 고려가 기울자 벼슬을 버리고 은거 하여 절의를 지키고 후손들로 하여금 ‘글은 배우되 벼슬길에 는 나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이 분의 후손들은 돈옹공의 호를 따 돈옹공파라 하며 그의 6대손 휘 전(澱)·흡(洽)·익 (瀷) 등 4촌 3형제가 안동 예안에서 봉화지역에 처음 입향 하 게된다. 봉화문중의 후손들은 고려 말 운봉(雲峰, 현 안동시 예안 면)현감을 지낸 휘 구(球)의 후손들로 영해박씨 시종조 관설 당(휘제상)공(公)은 경남 양산군 상북면에서태어나 신라시 대 주 거주 지역은 양산이었다. 이후 고려시대에 이르러 예원 군(휘 명천)이 영해지역을 식읍으로 하는 예원군에 봉해지면 서영해를기반으로세거지가형성된다. 영해읍지에 따르면 뷺고려시중(高麗侍中) 박세통(朴世通) 조(祖), 자(子) 손(孫) 삼대가 거주하던 곳으로 조정에서 그 마을에 부역(賦役)을 없이 해 주었으니 그 때문에 그 마을 이 름을 거무역(居無役)이라 하였는데 영해부 북쪽 12리(十二 里) 거리에 위치하여 해변에서 2리(二里) 쯤 떨어져 있는 곳 이다.뷻라고 전해지고 있어 시중공의 후손들이 영해에 대대로 거주하였음을알수있다. 시중공(강양백)의 6대손 돈옹공이 고려 말 안동군 예안면 기사(棄士, 벼슬을 버린다는 뜻)리에 은둔하면서 그의 후손 들이 안동에 세거하게 되었고, 또 돈옹공의 6대에 이르러 전 (澱)·흡(洽)·익(瀷)등 4촌 3형제가 임진왜란 당시 안동 예안 기사리에서 봉성지방으로 피신 황무지를 개척하고 영해박씨 의뿌리를내렸다. 뱚집성촌 탐방 영해박씨봉화문중(遯翁公派)입 촌사 경북 봉화군봉성면봉양리전경-영해박씨400여년세거지이다. 영해박씨는 경북 봉화군 일대에 약 150여가구 700 여명의성손들이 크고 작은 집성촌을 이루며 지역 의토성으로자리고있다.운봉감무에오른돈옹공 (휘 球)이 영해에서 안동 예안으로 이거하여세거 지를 정한 후 그의6대손에 이르러 임진왜란에 몸 을피해봉화지역에입향후황무지를개척하고영 해박씨의뿌리를 내려, 영해박씨 돈옹공파 봉화문 중을소개해본다. 봉양리 입 향조 휘 흡 제단 비. 송원고택-종중의대소사를의논하고있다. 뱚영해박씨본관의연원 뱚영해박씨세계(世系) 야목문중세거비-2010년금봉2지구저수지둑 높이기사업을추진하면서저수지옆도로변으로 이전하였다. 괴당정 -괴 당정(槐塘亭, 휘 性欽)께서 정자를 지어 많은 후학을 길러냈으나 현재는 2010년수몰로 인해 존재하지 않는다. 뱚입촌약사 뱚▶7면으로계속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