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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8월31일 금요일 12 (제140호) 기획 8월의뜨거운여름73년전여름은더욱더뜨거웠을것같다.예부터나라에어두운운명이드리우면분연이일 어나충절(忠節)을보여나라를구하였던옛선조님을떠올려본다.1905년일제는무력을앞세 워을사늑약(을사조약)을통해외교권을빼앗고,1910년일본친일파총리대신이완용에게한일합병조약안을 통과시키도록하여결국이완용과데라우치사이에합병조약이체결된후36년은우리에게엄 청난고통을안긴시간으로기록된다.이기간동안수많은애국지사들이조국을위해목숨을바쳤다.목숨을바 친애국지사는부모와자식,형제등많은이력을갖고있으며,이중삼형제가함께조국을위해 항일투쟁에헌신한것은독립운동사에흔치않은예(例)로영원히숭모할일이다.애국지사박의연·의열·의훈 삼형제는돈독한우애를바탕으로하여함께조국광복을위해목숨을버리고의로움을따랐던 분으로광복73주년을맞아이들의독립운동사소개해본다. 애국지사 삼형제는 본관이 함양박씨로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조청대부 예부상서를 지내고 은 청광록대부 추밀원사를 지낸 휘 선(善)의 28세손 이고,순성보덕협찬공신 삼중대광 판삼사사로 함 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봉해지고 문재(文齋) 의시호(諡號)가내려진치암(恥菴)공(公)휘충 좌(忠左)의 20세손이며, 영해 입향조 원모재(遠 慕齋) 공(公)휘 鍾山의 14세손,울산부사를 지낸 소호(小湖)휘신지(身之)의9세손이기도하다. 아버지 휘 주병(周秉)은 통정감녕부도정(通政 敢寧府都正)이고,어머니는무안박씨이다. 영해 입향조 원모재(휘 종산, 1449~1516) 공 (公)은 어머님 거상중(居喪中)에 시묘 살이 하시 던 사실을 임금님이 아시고 삼년거여(三年居廬) 일도불가(一到不家)의 여덟 자를 하사(下賜) 받 고 정려가 내려진 효자 박 구(矩, 증 예조판서)의 손자이고 사직 휘 충신(忠信)의 아들이다. 백형 철산공이 진보현감으로 부임했을 때 따라와 관해 (觀海)차 이곳에 왔다가 향유의 권유로 인량리에 살게 되었다. 항상 고향을 잊지 못해 시사(時祀) 때와 기일(忌日)에는 앞당겨 참사(參祀)하고 벽 상에는 원모재(遠慕齋) 석자(三字)를 현판(懸 板)하고 종신토록 사모하는 정성을 다하였다. 원 모재공의 증손 휘 세룡(世龍)은 유일재 김언기 선생의 문인으로 사형제가 함께 여묘(廬墓)하던 중 임 진 란 에 왜 적 이 여 막 까 지 와 서 칼 을 뽑 아 위 협하나 공(公)은 태연한 얼굴로 꾸짖어 훈계하더 니 왜적도 서로 돌보고 탄신하며 바위에 박효자 가 거려(居廬)하는 곳이라 크게 써 붙이고 물러 갔다. 그 후 김정구 부사 또한 박씨사효(朴氏四 孝)라 썼으며, 우복(愚伏) 정경세(鄭慶世)가 경 상감사로 있을 시 이들 사형제에게 통정의 품계 와 부호군,훈도,참봉의 직을 제수(除授)되었다. 경한재(景寒齋) 公 諱 문걸(文傑), 경운재(景雲 齋)公 휘(諱) 희안(希顔)은 무과에 급제하여 곽 재우 장군과 함께 참전하였으며,삼의사(三義士) 의 아버지 휘 주병(周秉) 公은 영해 병신창의(丙 申倡義)에 도통(道統)을 지내는 등 영해부지(寧 海府誌) 효행편에 많은 분들이 등재되었으며 대 대로 충과 효를 실천하는 가풍이 이어져 애국지 사 삼형제의 돈독한 우애와 우국충정 또한 선조 님의삶에서비롯된듯하다. ▲해사(海史)박의연(朴義然) 선생은 1880년 09월 20일 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서 태어났으며, 호(號)는 해사(海史)이 고, 이명(異名)은 건(健)으로 어려서부터 한학 (漢學)을 배우고 유학(儒學)을 심련(心鍊)하다 가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붓을 놓고신돌석의병진에참가하였다. 신돌석 의병진은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사 건을 계기로 거의하기에 이르러 1896년 평해(平 海)에서 기병하였다. 이곳 일대는 일찍이 사귀어 온 동 지 들 이 많 은 곳 으 로 그 들 은 모 두 그 를 의 지 하고 따랐다. 때로는 의병들이 일본군의 최신식 무기를 두려워하자 신돌석은 필마단창(匹馬單 槍)으로 적병을 수없이 사살하여 용맹을 사방에 떨쳤다. 이리하여 평해 일대에는 일본병들이 감 히접근하지못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비밀리에 체결되자 이미 을미 의병 때 거의한 바 있던 동지들과 1906년 3 월 13일(음) 영덕(盈德) 복평리(福坪里) 축산 (丑山)에서 기병하였다. 기병이후 영해읍을 거 쳐 평해읍(平海邑), 울진읍(蔚珍邑)을 행군하 며 병력을 점차 증강시켜 갔다. 신돌석 의병부대 는 가는 곳마다 크게 승리하며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11월에 엄동을 맞이하여 의병활동을 전 개하지 못하게 되자, 다음해 봄에 재개할 것을 기약하고 일단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돌석 장군이 영덕 눌곡(訥谷)에 이르렀을 때 길에서 우연히 옛 부하였던 김상렬(金相列)을 만났다. 김상렬의 간청으로 그의 집에 투숙하게 되었고, 그날 밤 김상렬 형제의 음모에 빠져 독주(毒酒) 를 마셨다. 신돌석이 쓰러지자 김상렬의 3형제 가 합세하여 도끼로 쳤다. 1908년 11월 18일의 일이었다. 이러한 참담한 소식을 전해들은 지방 민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민족의 앞날을 근심 하였다. 청하에 살던 한 사기장수가 지고 가던 짐을 내던지며, "세상사가 다 됐네. 우리가 이렇 게 구차하면서도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것은 신 장 군이 왜놈을 쓸어 내고 우리를 구해 낼 줄 믿었 더니 이제는 다 틀렸네." 하고 통곡하였다고 전 한다. 한말 의병운동은 이렇듯 한계성이 있었고, 그 때문에 구국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민 족에게 망국의 한을 남겨 주게 되자 선생은 신민 회에 가입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이어오면서 영 덕지구대표에 뽑혀 활약하다 국내에서의 활동 을 뒤로하고 1912년 동지 이상룡(李相龍) 김동 삼(金東三) 등과 만주 서간도 통화현(通化縣) 으로 망명하였다. 그곳의 이철영, 이원일 여 준 등의 동지들과 합 류하여 1913년 10월 독립운동단체인 경학사부민 단(耕學社扶民團)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에 참여 하였으며, 1914년에는 하서구(下西溝)에서 남흥 (南興)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여 동포들 을 계몽하고 민족사상을 고취시켰다. 이해 4월에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에서 이상룡 김동 삼 등 과 한 족 회 (韓 族 會 )를 조 직 하 고 그 는 중 앙 위 원에 선출되어 활동하며 군자금 모금에 전력을 기울였다. 1915년 민족유일당촉성회(民族唯一黨促成會) 를 발기하여 남북만(南北滿)을 순회하다가 독립 단의 한치응, 박응서와 함께 일경의 밀정(密偵) 유길선(柳吉善)을제거(除去)하였다. 1919년 복벽주의를 극복하고 공화적 민족주의 에 기반 한 독립전쟁을 전개하고, 만주·중국 내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위해 노력한 준정부적 조 직인 통의부의 총관(統義府總管)을 역임하였고, 또 임시정부가 통합된 후에 국내실태조사원의 명 (命)을 받아 귀국하여 그 임무를 수행하다가 경 북 의성에서 피검(被檢)되어 사형이 확정, 형장 으로 가는 도중(途中) 일인(日人) 통역자와 두 동생의도움으로탈출하여다시상해로갔다. 1923년에는 상해에서 독립운동의 일원화와 국 권회복을 위한 일치단결을 위해서 국민대표회의 가 개최되자 선생도 이 회의에 참석하였으나, 여 러 가지 의견의 대립으로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 였다. 만주에 돌아와 길림성 황기둔(吉林省黃旗屯) 에서후진양성에전념하였다. 1927년 3월에는 신 숙(申肅) 등과 독립촉성회 를 결성하기 위하여 전만대표자회의를 소집하였 는데 그는 북만(北滿) 대표로 선출되기도 하였 다. 1933년에는 하얼빈에서 일본 대사 무등신의 (武藤信義)를 격살하기로 남자현(南慈賢) 이규 동(李奎東) 등과 계획하였으나, 남 여사가 체포 되어 사형 당하는 불운을 겪고 거사는 성공하지 못하고 해방을 2년 남겨놓은 1943년 6월 11일 파 란만은 생애를 마치니 향년 63세이다. 정부에서 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추서하였다. ▲하산(河山)박의열(朴義烈) 경북 영덕(盈德) 창수면 인량리에서 1889년 01 월 21일 태어났다. 호(號)는 하산(河山)이고, 세 진(世鎭)은 이명(異名)이다. 일제에게 국권이 침 탈당하자 형 의연(義然)과 함께 신돌석 장군의 의병진에 합류하여 의병활동을 하다 1912년 24세 때에만주로이주하였다. 1913년 10월 통화현(通化縣) 하서구(下西溝) 에서 허혁(許爀)등과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 고 중앙검찰장(中央檢察長)에 임명되어 활동하 였다가 1917년에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 校)를졸업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1910년 신민회의 이회영, 이 시영 등이 남만주에 신흥 강습소를 조직하였는 데, 1911년 만주 서간도 지역에서 신흥강습소(新 興講習所)로 출발하여 1919년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했다. 학교 명칭은 이외에도 시기에 따라서 대동중학교(大東中學校)·신흥중학교·양성중학 교(養成中學校) 등으로 불렸다. 1909년 신민회 (新民會)는 만주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로 하 고, 1910년 7월경 신민회 회원인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의 6형제와 이동녕(李東寧) 등 이 남만주의 류허 현[柳河縣] 싼위안푸[三源堡] 쩌우자 가[鄒家街]지역을 사들여 망명 근거지로 삼았다. 이들은 이곳에서 신민회의 '신'자와 다시 일어 난다는 의미의 '흥'자를 붙여 신흥강습소를 조직 했고, 동시에 민단(民團) 성격의 자치조직인 경 학사를 조직했다. 그러나 1911년 가을의 큰 흉작 으로 경학사가 해체되고 1912년 가을에 새로운 한인자치조직으로 부민단이 조직되자, 신흥강습 소는 퉁화 현[通化縣]하니 강[哈泥河]으로 이전 했고, 1913년 5월에는 학교명칭을 신흥중학으로 개칭했다. 특히 3·1운동 이후에는 많은 청년들이 만주로 들어오고 일본육사 출신의 이청천(李靑 天)·김경천(金擎天) 등이 망명해 신흥학교에 참 가하면서번창했다. 1919년 5월에는 학교 이름을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했고 부민단이 개편되어 조직된 한족회 산하 의 학교로 발전했다. 신흥강습소에서는 일반 중 학과정인 본과 외에 무관양성을 위한 속성과를 두었으며,신흥중학교에서는 4년제 본과와 6개월 또는 3개월 과정을 두어 청년들을 교육했다.신흥 무관학교로 발전되면서 류허 현 고산자에 2년제 고등군사반을 두어 고급간부를 양성하고자 했다. 또한 퉁화 현 하니 강, 치다오거우[七道溝] 콰이 다마오쯔[快大帽子] 등에는 분교를 두어 초등군 사반을 편성하여 3개월간의 일반훈련과 6개월간 의 후보훈련을 시켰다. 1920년 폐교시까지 졸업 생 2,000여 명을 배출하여 독립군 양성에 크게 기 여했다.】 1922년에는 통의부(統義府) 통화검찰감(通化 檢察監)이 되었고, 1925년 정의부(正義府)가 조 직되자 부교(副校)및 지방조직책으로 일하는 한 편 북만 야성현 취원창(聚源昶)에서 박성호(朴 聖浩), 유기동(柳基東), 김만수(金滿秀) 등과 자 치회(自治會)를 조직 일경(日警)과 싸우다가 유 기동,김만수는전사(戰死)하였다. 그리고 1928년에는 빈강현 8구(濱江縣八區)에 빈성정미소(濱成精米所)를 운영하면서 중동선 오길밀하(烏吉密河)라는 곳에 농장을 경영하면 서 독립운동을 지원하였고, 동원학교(東源學校) 를 설 립 하 고 그 교 장 이 되 어 군 관 양 성 및 민 족 교 육에주력하였다. 그러던 중 1930년 11월 17일에 중동선 오밀하 (中東線烏密河) 부근에서 공산당에게 피살되니 향 년 4 1 세 의 젊 은 나 이 로 조 국 광 복 의 꿈 을 이 루 지 못하고 영면하였다. 이에 평소 그를 따르던 정 의파(正義派) 50여명은 결사대를 조직하여 공산 당의 토벌을 추진하기도 하였다.특히 1931년 1월 15일자 경성일보,동년 1월 18일자 동아일보는 이 사건을 일제히 보도하였고,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 (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호산(湖山)박의훈(朴義熏) 경북 영덕(盈德) 창수면 인량리에서 1895년 10 월 22일 태어났다. 호(號)는 호산(湖山)이고 명 진(明鎭)은이명(異名)이다. 1913년 1월에 만주 환인현(桓仁縣)으로 이주 하였으며,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 하였다. 1922년에는 통의부(統義府) 제4중대원 으로입대하여섭외를담당하였다. 1930년 5월에는 독립군 결사대원 50여명과 함 께 하얼빈(哈爾濱) 일본총영사관을 습격하였다 가 여기서 동지 31명이 중국 관헌에게 체포되었 다. 이후 1931년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입당하였다. 1933년에는 동삼성(東三省)을 뒤로 하고 이청 천(李靑天)·오광선(吳光鮮) 등과 함께 산해관 (山海關)으로이동하여은신하였다. 1934년에는 하얼빈 교외 승덕가(承德街)에서 중국인과 같이 동풍태정미소(東豊泰精米所)를 경영하였으며, 1936년 7월에는 낙양군관학교(洛 陽軍官學校)에서 학생 모집 차 오광선(吳光鮮) 이파견한황인식(黃仁植)·김기대(金基大)두 청 년을 유숙하게 하고 군자금을 지원하는 등 활약 하다가광복후귀국하였다. 광복 후 한국독립당 및 대종교(大倧敎)에 관여 하면서 민족정기 진작에 큰 활약을 하였다. 선생 은 1983년 6월 29일 향수(享壽) 88세로 생을 마감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 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 하였다. 註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1930년 1월 25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조직된 민족주의 계열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정당으로 결성 이후 한국독립 당은 재건(1935. 9)·통합(1940. 5)의 변천과정을 거치면서그조직이변화했다. 삼형제의 독립운동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본은 노 골적으로 강제합병을 추진하였고,전국의 지식인 층은 이를 지켜보면서 전국에서 의병운동이 활발 해졌다. 의연, 의열 형제는 신돌석 의병진에 합류하였 으나 한말 의병활동은 한계를 드러냈다. 이는 이 완용 같은 배신을 밥 먹듯 하는 이들이 있었고,이 데올로기 속에 계파가 나누어지는 일들이 비일비 재하였기때문으로분석된다. 그러나 이들 삼형제는 이억만리 만주로 망명하 여 학교를 설립하여 체계적인 지식을 쌓아 계몽 운동을 꾸준히 펼침으로서 항일운동에 불을 댕겼 다. 특히 삼형제의 독립운동은 선현들의 선비정 신에서도많은영향을받은듯하다. 함양박씨 문중의 선현(先賢)들은 경북 영덕의 인량리 입향(입향조 종산)이후 임진왜란에 분연 히 일어났고, 일제강점기와 6.25를 거치면서 7명 의후손이조국을위해몸을바쳤다. 그리고 그 후손들의 삶은 궁핍한 생활로 연명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오죽하였으면 ‘이곳 수수 께 끼 에 찬 물 보 다 더 차 가 운 것 이 무 엇 이 냐 ’고 물 으 면 ‘울 산 댁 밥 솥 에 물 이 라 답 변 한 다 .’고 하 였 을 까 . 이는 청빈한 선조의 삶에서도 연유되었지만 독립 운동과정에기울어진가세(家勢)의탓도있다. 최근 들어 우리 정부에서는 독립운동가의 후손 들을 찾고 있다.우리 박문(朴門)에도 독립의사 4 01명이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았지만 후손들을 찾 지 못해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독립운동 가의 후손들은 어려운 살림살이 때문에 이유 없 이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는 방증이다.광복 7 3주년을 맞은 이때 조국을 위해 희생당한 숭고한 선열들의 넋을 기려보며 이들의 후손들이 정당하 게보상받는길이열리기를기대해본다. 애국지사박의연·의열·의훈삼형제 선조 유지를찾아븣 애국지사삼형제의선원세계 원모재-함양박씨영해입향조원모재공께서항상고향을잊지못해벽상에원모재(遠慕齋)석자(三字)를현판(懸板)하고종신토록 사모하는정성을다한곳으로울산부사소호(小湖)휘신지(身之)의태생지(사진좌측건물)이며,후손들의충효(忠孝)사상 의정신적인공간으로입구에삼의사사적비가세워져있다. 애국지사삼형제의생애(生涯) 해사박의연 박의연의사와부인영양남씨 하얼빈로씨야공동묘지에서(앉은사람좌측박의연의사) 삼의사사적비. 맺음말 CMYK